제1장. 악마의 유혹 투투투투투투투투- 갑작스레 들리는 요란한 바이크 소리에 수업 중이던 학교 전체가 깨어났다. 텅 빈 운동장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는 커다란 바이크의 궤적을 쫓아 아이들이 창가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지루한 수업을 들으며 반쯤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자헌도 마침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인연으로 주위로 빼곡히 몰려든 급우들 사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혈기왕성한 사내자식들은 수업 중이란 것도 잊고 앞에서 선생이 소리를 지르든지 말든지 온통 밖으로만 신경이 향해 있었다. 대낮에 외제 바이크를 몰고 학교 운동장을 돌고 있는 놈이 누구인지가 그들에겐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혼란과 소란의 틈새에서 자헌은 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운동장을 돌고 있던 바이크가 멈추고 누군가 그래, 자헌이 입고 있는 바로 그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고 있었다. “재영이?” 자헌은 뜻밖의 인물에 놀라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천재영은 예자헌의 친구였다. 코흘리개 꼬마였을 때부터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그런 그가 지금 자헌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두근하고 심장이 울렸다. 재영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누군가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그대로 그 위압적인 바이크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자헌이 보는 앞에서 모두가 동경해 마지않는 어떤 곳을 향해 달려갔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그날 밤. 자헌은 재영이 돌아올 때까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재영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자헌은 녀석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기분 좋지는 않았다. 가족과 친구들을 알고 가까이 살고 있다 해서 상대에 대해 모두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헌은 설마 재영이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다른 친구가 생기고 차마 자헌에게 소개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해도 일말의 서운함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소꿉친구라기보다는 친구이자 형제와 같았다. 몇 살 때까지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첫사랑이 누구인지 아는 것과는 다른 정신적인 면에서 서로의 의지가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짓궂은 얼굴을 하고 웃으면 마치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 되지만 머리 쓰는 것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재영이다. 어쩌면 그런 믿음을 저버릴 수 없어서 자헌조차도 속여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재영이 자신만 이곳에 남겨두고 어딘가 먼 곳으로 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자헌은 초조해졌다. 얼굴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직접 듣고 말리라 결심한 자헌은 벌써 몇 시간째 재영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두두두두두두- 새벽 한시가 다 된 시간에 귀에 익은 바이크 소리가 주택가를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자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치는 곳에 섰다. 이윽고 커다란 오토바이가 자헌의 앞에 멈춰 섰다. “뭐야, 자헌이 너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뛰어 내리며 말을 걸어왔다. “….” “간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어딘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재영을 이곳까지 태워온 상대였다. 그는 두 사람의 상황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오토바이를 출발시킨다. “아, 고마웠다. 내일 보자!” 재영은 막 멀어져가는 상대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또 다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사라지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어딘가의 창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비친 재영은 성한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엉성하게 반창고를 붙여 놓은 모습은 어딘가에서 패싸움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굳이 묻고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보이는 봐와 같이 재영은 패싸움에 끼어들었고 자헌은 희미한 불빛가운데서 그 상처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확인한 뒤였다. 재영은 이 시간까지 자헌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재영이 신발 끝으로 작은 돌을 툭툭 차는 동작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부분 재영이 일을 저지르고 자헌이 그것을 수습한 뒤에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곤 했다. 지금 역시 두 사람 중 누군가 말을 해야 했고 언제나처럼 자헌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헌이 너덜너덜해진 재영이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렸냐?” 겸연쩍게 웃으며 재영은 맞아서 터진 입가가 당기는지 입속으로 투덜거린다. 그 모습을 보자 자헌은 재영의 달라진 점 따위 알 수 없어졌다. 자신이 모르는 무엇으로 변해버린 듯도 했고 또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구야? 아까 그 녀석. 나도 봤어 5교시에….” 더 이상 말은 필요치 않았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헌이 궁금해 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재영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털썩 집 앞 석단에 주저앉았다. 그도 자헌에게만큼은 ‘내일 이야기하자’ 따위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앉자, 한판 뛰었더니 힘들다.” 자헌은 망설이다가 그대로 재영의 옆에 주저앉았다. 몇 시간 동안 서 있던 다리가 제법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너도 나 작년 겨울 방학 때 삼촌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것 알지? 처음에는 놈이 가게에 왔다가 다른 손님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알게 됐는데, 왠지 마음이 맞아서 그 뒤로 종종 좀 과격한 놀이에 어울리게 됐거든…. 일부러 말 안한 건 아닌데, 너 원래 껄렁한 놈들 싫어하잖아.” 물론 자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부터 재영은 묘하게 귀가 시간이 늦어지곤 했으니까. “어울려서… 패싸움이라도 하는 거냐?” “뭐, 비슷해.” 재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는다. 그 모습에 자헌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후욱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대책은 세워 둔거야? 선생들이나 아저씨한테 뭐라고 변명할 건데? 너 오늘학교에서 완전히 스타된 것 아냐? 내일 등교하자마자 상담실로 불려갈 걸.” “아! 맞아. 그게 있었구나.” 재영은 그제야 자신이 수업 중에 교실을 뛰쳐나갔다는 자각이 든 듯 손바닥을 탁 쳤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태평해서 좋겠구나.” 자헌은 재영에게 핀잔을 주며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는다. “에이~ 자헌이 너 내가 딴 놈 이랑만 노니까 질투 나서 그러는 거지?” “하아…. 아까 그 녀석은 뭐하는 놈인데 수업시간에 당당히 학교 안으로 오토바이 몰고 쳐들어 오냐?” 갑자기 만성인 두통이 도졌는지 자헌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차가운 표정을 하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재영은 그런 반응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받는다. “걔, 우리 학교야.” “응?” “그 녀석-이름이 연무흠인데, 들어본 적 없냐? 되게 유명한데- 우리 학년이잖아. 뭐, 거의 학교에 안나오긴 하지만….” 재영의 느긋한 말투에 자헌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에 힘을 주어 꽉꽉 눌렀다. 연무흠이라면 당연히 들어 본적 있다. 아니 상문고학생 중, 연무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다들 한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까지 같이 어울려 다닌 게 그 연무흠이라고?” 자헌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응!” “‘응!’이 아니잖아!! 응이! 도대체 잠시 신경 안 쓰고 있었더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천재영!!” “앗, 자헌이 엄마가 화났다.”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재영이 장난스레 목을 움츠리며 화를 돋우자, 자헌은 벌떡 일어서서 최대한 무서운 표정으로 살살 눈치를 보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내일 학교 가서 담임이나 학생주임이 부르면 협박당했다고 해.” “무슨….”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그 녀석이야 선생들도 건들지 않는다며! 교무실에서도 졸업만 시키면 된다고 날짜만 새고 있다는 소리도 있던데, 오히려 학교 안나오면 더 좋아한다는 말도 나오는 이런 시점에서 그런 녀석과 어울리고 있다는 걸 알면 너만 덤탱이 쓰는 거잖아!?” “그렇다고 친구를 배신 하냐?” 물론 재영이 그런 캐릭터가 아니란 것은 자헌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제길!!” “야, 화내지마. 무흠이 그렇게 나쁜 놈 아냐. 좀 과격하긴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겠지. 제길, 그 때 혼자 아르바이트 하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자헌은 주먹을 움켜쥐고 자신의 지난 거취를 후회한다. 당시 여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그쪽과 어울리느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자헌은 자신을 자책을 했다. 결국, 그 여자친구와는 자기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는 이유로 현재 헤어진 상태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헌은 미덥지 못한 얼굴로 재영의 말에 코웃음을 친다. “무슨 변명을 어떻게 하려고?” “변명 안 해. 그냥 사실 대로 이야기 할 거야.” “뭐? 재영이 너 지금 학교 최고의 문제아와 친구라고 말을 하겠단 소리냐?” “그럼, 안돼?” 참 천진하게도 묻는다. 순진한건지 순진한 척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헌의 기호에 맞춰 행동해 주는 건지. 자헌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집어 삼켰다. “물론, 얘기 못할 거야 없겠지. 나야 물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이해하지만 과연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나는 항상 네 올곧은 면을 좋아해 왔지만, 이럴 때쯤은 융통성을 좀 발휘하면 안 될까?” “자헌이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말이지. 나도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잘 봐! 너만큼은 아니지만 키도 제법 컸고 싸움도 잘해, 나.” “그런 건 나도 알아. 너랑 도장 같이 다닌 게 누군지 잊었어?” 자헌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먼 옛날 친구라고는 옆집 사는 자헌이 밖에 없던 재영은 워낙 키가 작아서 혹시나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할까 걱정한 부모님에 의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걱정은 단지 기우였을 뿐, 원래가 활달했던 재영은 운동을 하게 되고 자주 사소한 폭력사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뭐, 그래봤자 코피 좀 흘리고 마는 수준이었지만 그 때부터 자헌은 재영의 폭주(라고 할 것도 없지만)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해왔다. 친구들에겐 ‘재영의 엄마’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자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자헌,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별것을 다 걱정한다며 재영은 자헌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친다. “그게 말대로 될 성 싶으냐? 아무래도… 안심이 안돼. 내일부터 너 나랑 같이 다녀.” “야야, 나에게도 사생활이….” 재영의 미약한 항의는 자헌의 싸늘한 시선에 꼬리를 내리고야 말았다. “어린놈이 무슨 사생활 타령이야!? 잔말 말고 내일 수업 끝나면 기다려.” “푸큭큭큭큭… 애들이 네 이런 모습을 보면 또 재영이 엄마라고 놀릴걸?” “그러든지 말든지.” “어쨌든 내일은 안돼. 약속 있어.” “누구? 아까 그 놈?” “뭐, 누구든….” 재영은 말끝을 흐리고 피곤한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헌을 힐끔거린다. “어저씨한테 확 찔러버린다?” “해봐, 어떻게 되나 보게.”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해보지만 재영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자헌이 그래주었으면 하는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뻔히 예상하던 반응이지만 자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꼰다. “이 자식, 그 놈이랑 어울려 다니더니 이제 협박하는 법까지 배웠냐?” “협박은 네가 먼저 했잖아. 그리고 넌 내가 걱정 되서라기보다는 나 혼자만 답답한 현실을 뚫고 나간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 아냐? 너 역시 본래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겠지? 말해봐, 예자헌. 모범생이란 딱지가 붙고 점점 어떤 틀 안에 가두어지는 자신이 참을 수 없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멋대로 수업시간에 교실을 나가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치고받고 싸우는 게 부러운 거지?” “….” 자헌은 아무 말도 없이 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로는 아니라도 비슷하긴 했다. 괜히 겉멋으로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보다. 이런 식으로 의표를 찌르는 것을 보니. “예자헌, 부러워만 하지 말고 그냥 망가져버려! 뭘 그렇게 겁내하는 거야? 아직 열일곱 밖에 안 된 녀석이 몸은 더럽게 사린다니까!” “하여튼 말은 잘하지.” 걱정하는 척은 혼자 다하고 갖은 생색을 냈는데, 뒤 늦게 정곡을 찔린 자헌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재영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누가 본다면 낯 뜨거운 장면이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해본 말인데, 내가 제대로 찔렀나보네?” 건네 온 싱거운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자헌은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섰다. “…피곤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 자라! 괜히 붙들고 있어서 미안하다.” 자헌은 물끄러미 재영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평소 같으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을 자헌이 얌전히 물러난 게 이상한지 재영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야, 너 괜찮냐?” “누가 할 소리냐.”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자헌은 쓴웃음을 짓는다. 들어가라는 말을 남겨놓고 등 뒤로 재영의 남겨놓고 자헌은 골목 하나건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행했다. 어느 순간 피식 자조의 웃음이 샌다. 재영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수업을 빼먹고 어디 가서 실컷 싸움을 하고 밤늦게 들어온 재영을 보자 정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걱정한 마음만큼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재영의 그 무모한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날 등교하자마자 재영은 자헌의 예상대로 상담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풀려날 때까지 몇 시간동안 중간 중간 선생만 바꿔가며 말 고문을 당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간신히 아귀 같은 선생들에게서 풀려나 상담실을 나서는 순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헌과 마주쳤다. “어?” “아무리 잘못한 놈이라도 점심은 먹이겠지 하고 기다렸다.” 자헌은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미처 제대로 된 반응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는 재영을 매점으로 끌고 갔다. 자헌은 완전히 지쳐서 흐느적거리는 재영의 팔꿈치를 붙잡고 걸었다. 그 사이에도 재영은 쉴새없이 반성문을 몇 장이나 썼다며 투덜거린다. 두들겨 맞은 것은 아닌 듯해서 일단 안심했지만, ‘그 선생 미친 것 아냐?’ 따위의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 재영을 보며 자헌은 이 녀석 정말 심리상담을 한 번 받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미어터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헌은 용케 빈자리를 찾아 재영을 앉혀놓고, 선생들에게나 파는 매점 아줌마의 특제 라면을 사들고 왔다. “자헌이 너, 능력 있다?” 젓가락까지 쪼개서 손에 들려주는 자헌을 보며 재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래서 여자애들이 이 녀석을 좋아하는 건가하고, 새삼스레 친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신도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이렇게 해줘야지 하는 생각까지 하며. 물론, 그 중간 중간에 친구를 빙자해 호기심을 얼굴에 덕지덕지 쳐 바른 녀석들이 자헌에게 ‘재영이 엄마, 또 시작이냐?’라며 놀려댔고, 재영이를 보고는 어제 멋있었다며 격려(?)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있던 녀석들을 쫓아낸 것은 역시 자헌이었다. 우리 아들(?) 밥 먹는데 방해하지 말라면서 가차 없이 나무젓가락을 휘둘렀던 것이다. “뭐래?” 주변이 조금 조용해지자 공기 밥까지 얻어와 재영의 라면 그릇에 말아주던 자헌이 뜬금없이 물었다. 굳이 앞뒤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상담실에서 선생들이 뭐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공부하기 힘드냐고 고민 있으면 말하라더라.” 웃기지 않느냐는 듯 재영은 키득거리며 몸을 떨었다. 재영이 평소 시험성적이야 공부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욕이 나올 만큼 녀석은 나름대로 천재적이다. 그것은 비상한 기억력 탓인데, 녀석은 한번 본 것을 머릿속에 그대로 사진처럼 찍어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한다. 가끔 주위에서 보면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칠판에 쓰인 글자를 통째로 외우지만 순서에 영향을 받는다. 맨 처음 것부터 뒤로 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영이는 순서에 상관없이 칠판 자체를 외우는 것이다. 이런 걸 과연 천재적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특별한 능력인 것은 분명하다. “재영이 너, 언제까지고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능력은 세월이 흐를수록 힘들어져.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지금처럼 놀기만 하면 곧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될 걸.” “네, 엄마….” 잔소리 듣기 싫다는 뜻이다. 재영이 정말 엄마는 어쩔 수 없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하자, 자헌 역시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삑-삑-삑-삑- 전자음에 재영이 평소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핸드폰을 꺼들고, 들어온 메시지에 키득하고 입속으로 웃으며 자헌에게 액정화면을 보여준다. 『형, 저 한중이요. 악마형이 끈나고 가치가제요. 저 지금 발피고 있어요. 무서워 죽겠어요. ㅠoㅠ』 엉성한 문장과 난무하는 오타에 지헌은 픽하고 웃었다. 하지만 재영이 웃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큭큭…. 여기 한중이란 녀석, 1학년이거든. 덩치는 산만한데 입학 초에 무흠이한테 게기다가 좀 두들겨 맞고 난 뒤로 그 녀석에겐 꼼짝 못해. 얼마나 맞았는지 그 뒤부터 무흠이 몰래 악마라고 부르고 있어. 거기다 무흠이 녀석 보기와 다르게 손끝이 무뎌서 핸드폰하고 안 친하거든. 푸하하하하!! 그래서 그 녀석 맨 날 한중이 시켜서 문자 보내는데, 그 때마다 한중이 무흠이 놈 눈앞에서 악마라고 부르며 한을 풀고 있지.” 재영이 신나게 웃어젖히는 것과 다르게 자헌은 멀뚱하니 그런 재영을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학원만화적인 상상력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오늘 또 그 녀석들이랑 나가는 거냐?” “뭐….” “그럼, 교문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나 좀 보고 가.” “설마, 그 녀석들한테까지 설교하려는 것은 아니지!?” 재영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헌을 힐끔 거렸다. “아니. 어떤 녀석들이랑 어울려 다니는지 확인 해 놓으려고, 걱정 마! 이상한 소리 안할 테니까. 내가 아무나 살뜰하게 챙길 정도로 열혈이거나 정의감에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별로 믿을 만한 소리는 아니다. 물론 자헌의 이 관심과 자상함은 현재 재영이에 국한 되어 있긴 하지만, 재영이에게 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대외비적인 다정한 얼굴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안에 있는 얼굴은 상당히 냉정해서 무모한 일은 절대 저지르지 않는 쪽이다. 본인이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일에 시간 빼앗기는 것을 싫어서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인물이 아닌가. “알았어. 그럼, 이번기회에 두 사람 소개시키는 것 재미있을지도….” 재영은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짓궂은 미소를 띠며, 깨끗이 비운 그릇을 수거해 매점 주방으로 들어가는 자헌을 보고 있었다. 방과 후, 자헌은 일찌감치 나와 교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재영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재영이 먼저 갔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그였다. 평소 누구를 기다린다든지 하는 귀여운 짓을 하지 않았기에 안면이 있는 녀석들은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간다. “아들이 속 많이 썩이냐? 그러게 키워 놓아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남 말 할 처지들이 아님에도 다들 재미있어하고 있다. “꺼져! 이 자식들아.” “힘내라! 재영이 엄마!” 나 너에게 만원 걸었다. 라는 안 해도 좋을 말까지 하는 친구(를 빙자한 원수)들에게 자헌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잠시 후, 투두두두 하고 익숙한 바이크 소리가 학교 안이 아니라 옆의 샛길로부터 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에 대해 생판 모르는 사람이 봐도 굉장한 바이크 한대가 자헌의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여기! 어딜 보는 거야? 헤헷, 면허 딸 때까지 신세 좀 지고 있지.” 어리둥절한 채 바이크를 쳐다보고 있는 자헌을 소리쳐 부르며 재영이 무흠의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재영의 허물없는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무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다리로 땅을 짚고 선채 자헌을 힐끔 쳐다본다. 어제 밤에는 어두워서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헌이 눈앞에서 직접 연무흠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악평에 어울리지 않게 깜짝 놀랄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시원스러운 이마와 검은 눈썹이 인상적이었고, 우뚝 솟은 콧날이나 얇은 입술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했다. 얼굴에 맞게 호리호리한 몸매 또한 거칠고 투박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남을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파워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연무흠에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눈이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함을 느끼게끔 만드는 그 눈초리는 단순히 날카롭다는 형용사만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송곳처럼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굳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 인사해. 이쪽은 내 소꿉친구인 예자헌, 그리고 이쪽이 얼마 전에 알게 된 연무흠.” 한순간 시선이 부딪히자 자헌은 움직임도 잊고 그 눈에 사로잡혔다. 자헌은 무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꼿꼿하게 얼어붙었지만, 그 이유는 다른 이들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일정도의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단순히 무서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흠은 경직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헌의 반응에 픽 웃더니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만다. 모범생이라는 것들이 익히 그렇듯 이 녀석도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무심하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 직후에 나온 생각지도 못한 인사말에 다시 시선을 되돌려 자헌을 쳐다본다. “만나서 반갑다. 예자헌이다. 재영이가 신세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무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자헌이 말했다. 같은 또래 중 여기까지 한 사람을 재영이를 빼고는 아직 없었다. 흥미가 인 무흠은 새삼스레 자헌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말라 보이는 것 치고는 큰 키에 -무흠 보다 2센치 정도 커보였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주보아 오는 눈은 영리해 보였고, 곧은 심지(心志)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외모가, 아니 객관적으로 여자들이 꽤나 좋아할 것 같은 부드러운 얼굴이 그 시선 하나 때문에 특색을 갖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상대의 마음속에 담긴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재영은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양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어댄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런 재영을 미친놈 쳐다보듯 보는 둘에게 자랑스레 말한다. “내가 두 사람 다 겪어봐서 아는데, 너희 둘이라면 묘하게 통할 거리고 생각했어. 역시, 내 눈은 너무 정확하다니까!!” 재영의 말에 아연해진 자헌과 무흠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뭐, 어쩔 수 없지’ 라는 표정을 짓는다. 최초로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묘한 조합이다. 예자헌에 천재영 거기다가 연무흠이라는 공식은 어떻게 갖다 붙여놔도 어울리지 않는다. 얌전한 모범생에 활발한 분위기 메이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내 놓은 못 말리는 불량, 그 조합만큼이나 개성적인 세 사람은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판이하게 달랐다. 입고 있는 교복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다. 일단 자헌이는 모범생답게 착실하게 교복을 챙겨 입고는 있었지만,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와 셔츠를 재킷 밑으로 빼내 입은 모습은 의외였다. 반면 무흠인 일단 교복 바지에 헐렁한 라운드 티, 그리고 재킷 대신에 걸쳐 입은 카디건이라는 조합이었는데, 어떻게 봐도 교복이라고 할 수 없는 차림이었다. 그중에 가장 제대로 챙겨 입은 것은 재영이었는데 녀석이야 말로 셋 중 가장 완벽하게 흐트러짐 하나 없이 교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오늘 그 형이 한턱내기로 했거든 실컷 얻어먹을 거야!” 거의 재영이 혼자 떠들고 있었고 자헌과 무흠은 가끔 맞장구를 칠 뿐 별달리 말이 없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교문 앞이었고 학생들은 묘한 오라를 피우고 있는 세 사람을 피해 후문이나 그들을 빙 돌아 하교 중이었다. 내일이면 또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모르지만, 이미 세 사람 다 다른 녀석들의 눈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자헌은 문득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재영의 머리에도 무흠의 머리에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의문사항은 그 자리에서 질문한다. “헬멧은?” “없어.” 자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땅치 않은 듯 묻자, 무흠이 귀찮다는 어조로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없다니? 처음부터 없었다는 거야? 귀찮아서 안가지고 다닌다는 거야?” 드디어 시작되었다. 자헌의 특기 조목조목 따져 묻기. 재영은 두 사람의 공방을 흥미롭게 지켜볼 뿐 말리려고 하지 않는다. 재미있었던 것이다. “후자다.” “너야 상관없지만, 뒤에 사람을 태우고 헬멧을 갖추고 다니지 않는 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다.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재영이 다치면 어떻게 해줄 거냐?”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제까지 무흠이에게 저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무흠이 하는 일에 이러저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 “…야, 천재영. 저건 뭐냐?” 황당한 건지 아니면 기가 막힌 건지 무흠은 화도 내지 않고 뒷자리에 앉아 키득거리는 재영에게 물었다. “무흠이 넌 모르겠지만, 저 녀석도 이상한 곳에서 유명해. 행여 말로 저 녀석을 이길 생각은 말아라. 특히 무흠이 넌! 푸하하하핫!!” “….” “….” 신나게 웃어젖히는 재영을 내버려 두고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서로를 힐끔거린다. 뭐가 저렇게 큰 소리로 웃을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묘한 곳에서 둔감한 두 사람이다. “천재영. 위험하니까 손, 앞으로 잡아.” 한참을 정신없이 웃고 있는 재영을 보던 자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앉은 재영의 모습이 갑자기 위태위태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흠에게 바짝 다가앉은 것도 아니고 지금 재영은 끝자리에 간당간당하게 앉아서 손을 뒤로 돌려 좌석의 가장자리를 짚고 있었다. 자헌에게 그 모습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네네, 엄마~” 재영의 장난스러운 대사에 큭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무흠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순간 자헌은 날카롭게 무흠을 노려본다. “너무 늦지 말고 술은 안돼!” 끝까지 당부에 당부를 잊지 않는 자헌의 모습에 재영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무흠이 움직였다. “간다.” 무흠은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힐끔 자헌을 돌아본 뒤 그대로 급출발을 한다. 자헌을 놀려주려는 일부러 인 게 분명한 도발행위였지만, 목소리가 닿기에는 이미 너무 멀었다. “위험하다니까 그러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갑작스러운 발진에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뒷자리를 잡고 거기다 돌아보며 손까지 흔드는 재영이 때문에 인상을 쓰는 자헌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재영은 학교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무흠이 패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굳이 관계를 감추려고 했던 자헌에게 들킨 이상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는데, 자헌이만이 그때까지 그런 재영에게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자헌은 될 수 있는 한 재영이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자연히 무흠이나 그 쪽 패거리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하지만 단지 안면을 텄다 뿐이지 서로를 쳐다보는 눈에는 반감이 가득했다. 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은 출입이 금지된 옥상이었는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물쇠통을 고장 내놓고 선생들 몰래 들고났다. 처음에 재영이 자헌을 달고 그곳에 나타났을 때 1학년인 한중은 저 녀석이 꼰지르면 어떻게 할 거냐고 꽤나 흥분 했었다. 재영이 말했듯이 상당한 덩치를 한 싸움꾼이었다. 패거리들이 다 같이 모여도 떠드는 것은 주로 재영이나 한중이였고, 연무흠은 거의 말이 없었다. 그는 대부분 옥상 주위에 둘러쳐진 펜스에 기대 앉아 운동장이나 통학 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중은 패거리들 중 제일 덩치가 컸고 얼굴도 아저씨 스타일이었지만, 하는 행동은 아직 어렸다. 무흠이나 재영이 앞에서는 얌전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는 자주 큰소리를 쳐댔다. 그리고 첫 날 자헌이, 한중 자신보다 머리하나는 작은 재영이에게 귀염 떠는 한중을 보고 웃은 일로 쭉 앙심을 품고 있었다. 무흠이는 자헌이 재영을 따라 자신들의 주위를 맴돌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한중은 자헌의 존재를 못마땅해 하며 사사건건 걸고 넘어졌다. 거기에 박차를 가한 것은 재영이었다. 자헌이 한중에게 어떤 취급을 당해도 재영은 항상 재미있어하는 얼굴을 하고 도우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도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중은 본격적으로 자헌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야, 저 자식 별명이 뭔지 아냐? 계집에처럼 엄마란다. 엄마! 웃기지 않냐?” 물론 앞에 ‘재영이’가 빠져 있었지만, 한중은 키득거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는 패거리들에게 말했다. 점심시간 막 밥을 먹고 제법 포만감에 젖어 있던 녀석들은 한중을 따라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들 눈에도 키는 웬만큼 크지만 제대로 싸움한번 해본 적 없었을 것 같은 얌전한 모범생은 우스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문제는 자헌이었다. 녀석들이 놀리고 비웃으면 움찔거리는 반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항상 지나치게 태연했다. 맞받아쳐서 같이 욕이라도 하든지 무서워하기라도 했으면 좀 덜 할 텐데 자헌의 그 무관심이 오히려 한중의 기분을 건드렸다. “아, 씨발. 계집애랑 같이 있으려니 암내가 나서 못 앉아 있겠네!” 모두들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흥미롭게 자헌이와 한중을 곁눈질 한다. 딴 곳을 보고 있던 무흠이까지 힐끔 자헌을 돌아본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헌에 대한 이 패거리들의 태도가 결정될 것이다. 아직까지 자헌은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야, 거기 너. 3학년. 그래 네 년 말이야.” 가깟으로 눈이 마주치자 한중이 이죽 거렸다. 여자취급을 하는 것은 대 놓고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말이었다. 특히 자헌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혀 여성스럽지 않았기에 그 의도가 더욱 명백했다. 이제 패거리들이 노골적으로 웃어댄다. 심심하던 차에 간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재영이 역시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말없이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네 년이 지금 내 말을 무시 하냐?” 자헌은 쌍소리를 지껄이는 한중을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입을 연다. “네가 그런 유치한 혼잣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대꾸를 해줄 수도 있고.” 순간 한중이 폭발했다. 어쩌면 단지 계기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그게 이 마음에 안 드는 모범생 녀석이면 더 좋고- 때려눕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씨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한중은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자헌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외소 해 보이는 겉모습에 비해 뼈 값이 나가는지 생각보다 팔이 묵직하게 당겨진다. 한중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모두들 이정도 되면 무서워서 벌벌 떨거나 딱딱하게 굳기 마련인데 코앞으로 끌어당긴 얼굴 어디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한중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네가 이겼다고 해줄 테니까. 그만하자.”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아니 한중에게만 들리게 작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한중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른하게 귀찮다는 듯한 그런 말투가 한층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이런 건방진!!!” 감히 누구에게. 하고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한 한중은 그대로 팔에 힘을 주고 쥐고 있던 녀석을 집어 던졌다. 아니, 던졌다고 생각한 순간 너무도 어이없게 상대가 한중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눈 깜짝 할 사이에 자헌의 얼굴이 정면으로 비쳤고,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온몸을 회전시키는 화려한 발차기가 들어왔다. 피할 새도 없이 퍼억 하고 한중은 바닥으로 쳐 박혔다. 순간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재영의 웃음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덤빌 사람에게 덤벼야지. 이래서 한중이 넌 멀었다는 거야. 저 녀석 나랑 같이 도장 다닌 게 몇 년인데 너 하나 못 넘기겠냐?” “….” 그런 이야기는 싸우기 전에 하시라니깐요. 한중은 바닥에 누운 채 재원에게 원망 가득한 시선을 보냈지만, 깨끗이 무시당했다. 친한 친구라고 들었는데, 어쩐지 그렇게 시비를 걸어도 도와주지 않더라니. 뒤 늦게 직접 당해보라는 재영의 의도를 깨닫고 한중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미안, 발차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냐?” 한중은 웃고 있는 재영이 보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눈앞에 손을 내밀어 오는 자헌이 더 미웠다. 있는 대로 자존심이 상한 한중은 자헌의 손을 탁 쳐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턱이 얼얼한 것이 조금만 더 제대로 들어왔으면 이빨 다 나갈 뻔했다. 침을 뱉자 빨간 핏물이 넘어왔다. “썅!!” 이래서야 1학년 짱의 위신을 세울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저쪽에 모여앉아 키득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보자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정말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한중이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자 다들 휙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 했지만, 웃느라 어깨 떨리는 건 어떻게 감출 수 없었다. “이 새끼들. 지금 웃었던 놈들 다 죽인다!”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움찔거리며, 우르르 몰려 옥상을 나간다. 하지만 분명 한중이 안보이게 되면 또 지네들끼리 죽어라 웃어댈 게 분명했다. 말끔한 모범생에게까지 두들겨 맞은 녀석이라고, 자신들은 한중이에게까지 싸움으로 진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졸지에 패거리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한중이 자헌에게 더욱 앙심을 품게 된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적어도 한중이 자헌을 여자취급을 한다든지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고, 패거리들도 은영중에 자헌이 재영이 옆에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특히 같은 학년인 3학년들과는 꽤 친해져서 쉬는 시간이라든지 등하교 때에 제법 아는 척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자헌이 그들과 어울리는 한도는 여기까지였다. 자헌은 자발적으로 패거리들의 일원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도 자헌을 자신들의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다. 밖에서 따로 만나거나 서로 어울려서 몰려다니지는 일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패거리와 자헌은 서로 많이 익숙해졌지만 분명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했다. 재영은 여전히 자헌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변함이 없었고, 자헌의 별명은 여기에서도 ‘재영이 엄마’였다. 휴일 아침부터 재영에게 연락을 했지만, 새벽같이 나갔는지 아니면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은 건지 집에 없었다. 자헌은 형에게 받은 시사회권을 지갑에 넣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랜만에 같이 영화나 볼까 했는데 재영이 행방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볼 수밖에. 물이 빠진 청바지에, 브이넥의 아란 스웨터에 흰색의 폴로셔츠를 받쳐 입은 자헌은 확실히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머리는 평소대로 단정하게 빗질만 한 뒤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내버려둔다. 자헌은 이렇게 하면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19금 영화를 보러갈 때 유리했다. 거울을 다시 한번 확인 한 뒤 자헌은 지갑을 뒷주머니에 꽂고 집을 나섰다. 되도록이면 양손을 자유롭게 만들어 놓는 건 어느 사이엔가 몸에 밴 습관인데, 가끔 밤늦게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서 시비 거는 녀석들을 만났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 쪽으로 나갔다. 휴일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이런 날은 두 사람이 같이 걷는 것보다 혼자 걷는 게 편하다. 자헌은 대부분의 휴일은 형에게 얻은 시사회권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 처음에는 달리 할일이 없기 때문에 시작했는데, 그게 반복되다 보니 유일한 취미생활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재영이 좋아하는 액션영화 같은 경우에는 요즘처럼 녀석에게 다른 볼일이 있지 않는 한은 함께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에게 밀려 자헌은 자연히 조금 한산한 차도 쪽으로 걷고 있었다. 소음이 심하고, 차도 많아 자헌은 무흠의 커다란 바이크가 옆에 와 서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무흠이 일부러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헌은 무흠이 말을 걸기전가지 그가 바로 뒤쪽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이, 거기 재영이 친구. 어딜 그렇게 가?” 큰 소리도 아니었다. 그런대도 자헌은 갖은 소음들 속에서 그 목소리만을 아주 정확히 가려들었다. 그리고 돌아보는 순간 바로 뒤에 커다란 오토바이가 가로막고 있어 내심 놀랐다. 자신이 어떻게 그 큰 기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예자헌이다. 연무흠.”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어디까지나 냉정, 침착했다. 더불어 기억력 나쁜 무흠에게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입력시켰다. 입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무흠이 밖에서 자헌을 보고 이렇게 아는 척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니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자헌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역시, 무흠은 자헌의 말을 무심하게 흘려들으며 사람이 바글거리는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쓴 채다. 여전히 눈에 띄지만 어딘지 무서운 인상이라 이쪽을 보던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뭐해? 약속 있냐?”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허물없이 대하는 무흠의 태도에 자헌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 무흠은 사람들 앞에서 자헌에게 말 한마디 시키지 않았고, 자헌 역시 부러 무흠에게 말을 걸 일은 없었다. “아니.” 자헌은 무흠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 알아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직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왜?” 이도저도 아닌 감탄사를 내뱉으며 무흠은 몇 번이나 자헌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의도를 모르니 자헌이로서도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수밖에. “너, 달라 보인다?” “넌 똑같은데.” 싱거운 말에 자헌은 피식 웃으며 무흠의 복장을 보고 지적했다. 정말 똑 같았다. 교복 바지에 라운드 티에, 카디건 대신 체크무늬 셔츠를 걸치고 있는 것 외에는. “일 없으면 탈래? 마침 헬멧도 있는데.” 무흠은 자헌이 일전에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선뜻 청했다. 하지만 자헌은 무흠의 청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기절할 만큼 놀랐다. 자헌이 기억하는 한 다른 누군가에게 무흠이 먼저 어디를 가자고 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자신의 패거리가 아닌 사람에게는 더욱. 순간 보려던 영화의 예고편이 뇌리를 스쳤지만, 자헌은 재영이 말했던 ‘부러워만 말고 망가져버려!’라는 말이 떠올라 갈등하며 물끄러미 무흠을 쳐다보았다. “타라!” “…헌팅이냐?” 날아오는 헬멧을 받아든 자헌은 농을 건넸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앞에서 무흠의 웃는 모습을 보고 쓰게 웃으며 착실하게 헬멧을 눌러썼다. 무흠이야 여전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시원스럽게 밖으로 내 놓고 있었지만, 헬멧을 쓰라고 잔소리를 해 봤자 들을 상대도 아니고 할 생각도 없었다. “벨트 잡아.” 엉거주춤 올라타긴 했는데, 어디를 잡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자헌에게 무흠이 말했다. 그리고 살짝 허리에 와 닿는 자헌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힘을 넣는다. “꽉 잡아 떨어져.” 그리고 급출발, 쥐어졌던 손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자헌은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려야 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행선지도 모른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어딘지 엉성한 전개가 되고 있었지만, 자헌은 그것보다는 방금 자신의 손을 잡아 누르던 무흠의 손아귀 힘에 신경이 쓰였다. 신고 있는 운동화의 사이즈나 손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그러고 보면 잡고 있는 허리의 선도 상당히 통이란 느낌이다. 아직 성장 중이란 것일까. 익히 보아오던 도시의 풍경이 평소와 전혀 다른 속도감과 모습으로 자헌의 눈앞을 스쳐갔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서는 순간을 제외하고 무흠은 꽉 막힌 도로를 용케 잘도 빠져나간다. 한참을 달린 후 멈춘 곳은 자헌이로서는 이미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길이었다. 어질어질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우선 답답한 헬멧부터 벗었다. 귀가 먹먹하고 정전기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어 자헌은 떨리는 손으로 무흠에게 헬멧부터 건넨다. 한마디쯤 할만 할 텐데 무흠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자헌을 못 본 척 한다. “여긴 어디냐?” 자헌은 길게 숨을 내쉬고 곤두서 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물었다. “밥 먹자.” 짧은 한마디와 머리로 까딱거리며 가리킨 방향에 있는 것은 햄버거 가게. 평소 자주 다니는 곳인지 무흠은 망설임 없이 골목어귀에 오토바이를 주차시키고 앞장선다. 처음부터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을 했다면 자헌은 햄버거가 아니라 좀 더 제대로 된 것을 먹자고 말했을 것이다. 압구정 쪽의 낚지 볶음 전문점이나, 건대 뒷골목의 닭 한 마리 칼국수는 아니더라도 햄버거 보다는 나은 메뉴를 선택했을 게 분명하다며 투덜거려봤자 무흠에게 통할 것 같지는 않다. 무흠을 따라 골목을 나오자 제법 넓은 도로가 보였다. 시내가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유동인구가 적은지 차나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가나 북적이는 오늘 같은 날 이러기도 쉽지 않다. 자헌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신의 앞을 걷는 무흠을 보며 어쩌면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이제까지 봐온 바로는 짐작이 맞을 것이다. 사람 많은 것 싫어하고 말하는 것도 귀찮아서 누가 뭘 물어도 죽어라 노려보다가 상대가 오줌을 지릴 정도가 되어서야 ‘꺼져’한마디로 끝내는 녀석이니. “어서오…. 아, 지금 오빠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햄버거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말이다. 묘하게 익숙한 태도와 말을 거는 여자애가 서 있는 카운터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는 무심함을 보고 자헌은 여기가 녀석들이 평소 들어앉아 있는 곳이라고 확신했다. 주문할 시간도 주지 않고, 무흠은 자헌을 힐끔 쳐다본 뒤 계단을 올라가버린다. 마침, 귀엽게 생긴 여자애와 시선이 마주친 자헌은 슬쩍 눈인사만을 건넨 뒤 무흠을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 사내 녀석들 특유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경박한 웃음소리가 계단을 반도 올라가지 전에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래서야 누가 여기서 햄버거를 사 먹겠는가. 자헌은 혀를 차며 자신이 이 곳 매니저라면 저 녀석들부터 내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헌이 올라가자 자기들끼리 떠들고 낄낄거리던 놈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흠이가 먼저 올라갔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노골적으로 상대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시선과 은근한 경계심, 그리고 자헌이 당연하게 무흠의 앞자리로 가 앉는 행동이 불러일으킨 경악에 찬 반응들은 차라리 흥미롭기까지 했다. 연무흠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존재였던가 싶어서. “가서 알아서 사와.” 자헌이 자리에 앉자마자 무흠은 가까이에 있던 녀석을 손짓으로 불러 놓고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다. 무엇을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주지도 않고, 가서 알아서 사오라니…. 자헌은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서는 꼬맹이의 묘하게 구겨지는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거기, 잠깐만.” 꼬맹이는 발길을 멈추고 ‘애는 또 왜이래?’라는 얼굴로 울상을 하고 뒤 돌아본다. 이제 뒤에 앉은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헌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꼬맹이에게 내밀었다. “정확히, 와퍼세트 두개하고, 너 마실 콜라 하나만 사와라.” “네?” 유난히 키도 작고 얼굴도 새까만 녀석은 반신반의하며 자헌에게 되묻는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다. “못 들은 거야?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야?” “아, 아뇨. 제대로 들었습니다.” “그럼, 가봐!” 녀석은 무흠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자헌이 내민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다시 붙잡힐까봐 겁이라도 먹었는지 후다닥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쓸데없는 짓을.” 꽁지가 빠져라 사라지는 녀석을 보며 쓰게 웃던 자헌은 나직한 한마디에 무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비릿하게 입가에 걸린 미소에 자헌은 평소 무흠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었다. “애들 코 묻은 돈으로 산 햄버거를 먹고 체하는 것 보다 이게 훨씬 낫지.” “신경 안 써.” “너야 그렇겠지만, 나는 신경 쓰여.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지 마, 싸우자는 것은 아니니까.” 자헌의 말에 무흠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슬쩍 시선을 돌린다. 순간 자헌은 무흠의 맨얼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 픽 웃고 말았다. “눈….” “….” 무흠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자헌에게로 돌아온다. 자헌은 다시 웃는다. “나, 네 눈 마음에 들어. 아무 생각도 없이 쳐다본다는 건 알겠는데, 볼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어. 거기다 화가 나기라도 하면 정말 가슴을 꽉 움켜잡히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두근두근 거려.” “뭐냐, 그건….” “그러니까. 부러 시선 피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 어릴 적부터 무섭다는 소리 많이 들었지? 그래서 사람들 잘 쳐다보지 않게 됐고? 싫다는 놈들은 그냥 무시해. 네 특기잖아? 그 대신 나를 볼 때는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봐도 돼. 시원스러울 정도로 오싹해서 정말 마음에 들거든.” 즐겁게 말을 이어가는 자헌을 무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너….” 무흠의 입에서 탁하게 갈라진 음성이 나오자 자헌은 씩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이 이러고 있을 때, 모여 있던 패거리들은 방금 전 자헌의 행동이 무흠에 대한 도전 행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자헌이 자주 재영이와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누군가가 저 둘이 친구 아니냐고 했고, 자헌이 재영의 친구라면 무흠의 친구이기도 하지 않겠냐고 의견이 모아졌다. 재영도 없이 두 사람만 나타났으니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각자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을 때, 아까 심부름을 보낸 꼬맹이가 쟁반에 햄버거 세트와 자신의 콜라를 얹어 가지고 왔다. 녀석은 내려갈 때와는 반대로 까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무흠이 아닌 자헌의 앞에 쟁반과 거스름돈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리고 콜라 감사합니다.” 넙죽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걸음도 가볍게 자신의 콜라를 챙겨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자헌은 녀석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무흠에게 물었다. “네 밑에 있는 애들은 모두 우락부락하게 생긴 줄 알았더니 귀여운 녀석도 있구나? 저 녀석 이름이 뭐냐?” “몰라.” 무흠은 태연하게 햄버거 하나를 집어 가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부스럭부스럭 껍질을 벗기는 모습을 보니 정말 모르는 얼굴이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아무리 주위에 무관심하더라도 항상 어울려 다니는 상대 이름도 몰라서 볼 때마다 너, 어이, 라고 부르면 누가 기분 좋겠냐? 하긴 너처럼 말 짧게 끝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는 게 더 곤욕스러울 것도 같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헌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비밀이다. 자헌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인 채로 평소 재영에게 하듯 음료수 팩에 빨대를 끼워 무흠의 앞에 밀어 놓고, 자신의 음료수 뚜껑은 벗겨내어 일회용 케첩 용기로 사용한다. 막 햄버거를 베어 물던 무흠은 황당해하는 얼굴을 감추려고도 않고 자헌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헌의 이런 행동은 재영이 버전으로 무흠도 종종 보아오던 것이지만, 설마 그 대상이 자신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적 없었다. 애들 보는 앞에서 이런 낯간지러운 취급을 당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과연 힐끔힐끔 이쪽의 동향을 살피던 녀석들의 눈이 세모꼴이 되어 있었다. “너….” “예자헌, 방금 전에 우리, 이름을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이렇게 말하며 자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흠에게 냅킨을 건네며, 입가에 소스가 묻었음을 알린다. 이제 무흠의 표정은 제법 험악해져 있었다. 몰래 훔쳐보던 녀석들이 더 이상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볼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래. 예자헌, 안 집어 줘도 돼.” 무흠은 험악한 눈초리로 자헌이 내밀고 있는 냅킨을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아, 신경 쓰이냐? 미안,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재영이?” “뭐, 처음 시작이 재영이였지 옛날에 그 녀석 까불고 놀다가 넘어져서 몇 달간 양쪽 팔에 깁스를 하게 되었거든 그 때부터 쭉- 녀석은 챙겨 받는 게 익숙해졌고, 나는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졌지.” 그 와중에도 자헌은 감자튀김을 싸고 있던 종이를 찢어 무흠이 앞으로 벌려 놓는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무흠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고쳐. 안될 것 같으면 한사람한테만 하든지.” 자헌은 드물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흠의 사납게 생긴 눈을 한참을 응시한다. 두 번째 듣는 말이다. 말투와 내용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았다. 첫 번째는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그리고 지금 못마땅한 기색이 완연한 무흠에게. 다른 것이라면 그 쪽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자헌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무흠은 단순히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연무흠 너 지금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 것 아냐?” 자헌이 농을 건네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무흠의 한쪽 눈썹이 슥 밀려 올라간다. 이 녀석이 드디어 미친 건가 하는 얼굴로 무흠이 혼잣말을 한다. “재영이 녀석도 가끔 혼자 미쳐서 날뛰던데….” 뒤에 생략된 말은 분명 너도 만만치 않구나. 따위의 말이 분명했다. 두 사람 가까이에 앉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된 패거리들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과연 친구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며…. “아, 그러고 보니 재영이가 안보이네. 아침부터 연락해도 없기에 너랑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뒤늦게 자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항상 재영이를 죽자 사자 쫓아다니는 그 덩치 큰 한중이라는 1학년도 없었다. 하긴 있었다면 두 사람이 이렇게 평화롭게(?) 마주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면허.” “아, 오늘이 그 날인가? 어쩐지 연락이 안 되더라니…. 시험보고 오자마자 오토바이 산다고 난리도 아닐 텐데, 네 것은 비싼 거지?” “조금.” “큰 거로 한 장? 개조까지 하면 좀 더 드나?” “흠….” “큰일이네. 재영이 녀석 겁도 없이 장물이라도 사려고 덤빌 텐데….” 대화가 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과연 말 짧게 끝난다. 내용을 알고 있다 해도 뜬금없이 내뱉은 무흠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자헌이 대꾸를 하자, 본격적으로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패거리들은 완전히 질려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게 무슨 말이냐?’, ‘몰라, 그러니까… 큰 거로 한 장이면 백만원?’, ‘장난하냐 십새야?’뒤에선 이미 난리가 났다. 자기들끼리는 안 들리게 한다고 작게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소곤거려도 같은 공간이다. 그것은 이미 말이라기보다는 웅성거리는 소음에 가까웠다. 다행인 것은 자헌은 재영이 일로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생각에 잠겨 있었고, 무흠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소음이고 싸움이고 관심 없다는 듯이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쿠당』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무흠이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순간 웅성거리던 녀석들이 놀라 입을 다물고 무흠을 쳐다보았다가 그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하나 둘 패거리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을 내다본다. 아니 아래쪽에서 바이크를 탄 채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는 노란머리를 향해 갑자기 소리를 지러댄다. 녀석의 손에는 각목이 들려 있었고 그 앞에는 이쪽 패거리들의 바이크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놈은 효과를 예상 한 듯 씩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각목을 휘둘러 바이크에 붙어 있는 백미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가장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무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녀석들도 날듯이 무흠을 따라 밖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그곳에서 자헌은 달려 나간 녀석들 중 누군가가 지른 소리의 에코에 피식 웃었다. ‘장래용! 너 거기서 기다려. 너, 죽었어. 씨발쉐이!!!’ 기다리란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확히 자신과 무흠이 먹고 버린 용기만 정리해 분리수거하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래도 이걸로 오늘 모임은 끝이 난 것 같다. 아니면 시작이든가. 분위기로 보아 자헌은 이쯤에서 빠져주는 게 좋을 듯 했다. 어쨌든 거치적거리기만 할 테니. 밖으로 나오자 피해를 본 오토바이의 주인인 듯한 몇몇 녀석들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 반대편에서 무흠이 긴 각목으로 바닥을 끌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달리는 오토바이에 뛰어 올라탄 건지, 아니면 날아간 건지, 어떻게 한건지 모르지만 지금 무흠이 들고 있는 몽둥이는 상대편이 휘둘러대던 그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미 아까 그들의 오토바이를 부수던 상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뭐에 다쳤는지 무흠의 광대뼈 쪽으로 길게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은 가리고 있었지만 언뜻 부딪히는 까만 눈알이 자신을 응시하는 녀석들을 노려본다. 무거운 걸음과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당장이라도 휘둘러 댈 것처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움켜쥐고 있는 각목이 위험스레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악마 같다는 것이리라. 어찌나 표정이 음침한지 자헌이 보기에도 등 뒤에 노을배경만 있어도 충분히 그렇게 보일 것 같은 분위기다. “괴물 같은 녀석.” 자헌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무흠을 보고 있었다. 뭐에 스쳤는지 관자노리 아래로 피가 번져있다. 시끄럽게 욕을 하고 떠들어대던 녀석들도 그런 무흠을 보고 흠칫해서 입을 다문다. 패거리들 앞까지 와서 무흠은 들고 있던 각목을 발치에 내 던지고, 뭐라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욕인 것 같다. “어떻게 할까요? 당장 쫓아가서 조저 놓을까요?” 흥분한 패거리중 하나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자 일견 어른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가 말린다. “방금 그 새끼는 일부러 도발하러 온 거야. 뻔하잖아? 지금 쫓아가면 매복하고 있다가 치려는 거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재균형?” “너, 그 것 타고 달려봐라. 아마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경찰한테 먼저 잡힐걸.” “아, 썅!!!” 다혈질인 녀석이 오토바이 타이어에 발길질을 하며 화를 삭인다. 익히 있어왔던 일인 듯 나이 좀 있어 보이는 녀석들은 그나마 조금 침착하다. “무흠이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말해 봐, 너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재균이라는 이름의 제법 강단 있어 보이는 남자가 무심하게 서 있는 무흠에게 최종 결정권을 넘겼다. 이제 모두들 무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기습, 내일 집합해.” 순간, 분이 풀리지 않은 녀석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와 당연하다는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몇몇이 망가진 바이크를 끌고 사리지자 당연한 순서로 재균이 투덜대는 녀석들을 달랜다. “괜찮냐?” 자헌은 패거리들이 흩어진 틈을 타 무흠이에게 물었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외려 자헌을 잡아끈다. “가자.” “잠깐, 피는 닦고 가야지!” 자헌은 단단히 힘이 들어간 무흠의 팔을 움켜쥐고 그 사나운 눈을 직시했다. 턱까지 핏줄기가 흘러내린 모습을 보건데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가시도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운전자들 중 누군가가…. 어쨌든 노력이 통했는지 무흠은 자헌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햄버거 가게의 화장실로 끌려들어갔다. “제길, 많이도 찢어졌네.” 종이 수건에 물을 묻혀 피를 먼저 닦아 낸 뒤, 자헌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무흠의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빗어 넘기고 상처를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나는 부분이 3~4센치 가량 빨갛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칼에 베인 자국이다. “아프냐?” “별로.” “일단 피는 멈췄는데, 어떻게 할래? 이대로 병원에 갈래?” 순간 무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이런 별거 아닌 상처로 병원 가는 게 우습다는 것이리라. 자헌은 말 안 해도 알만하다는 듯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대신 주방에서 얻어온 소독약과 후시딘을 기분 내킬 때까지 발라댔다. “재밌냐?” “그 재미라는 게 일회용 반창고로 어떻게 하면 상처를 다 가릴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라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 눈에 힘을 주고 상처에서 비껴나지 않게 사각 반창고를 붙이던 자헌이 대놓고 빈정거렸다. “쿡!” “웃지 마, 연무흠. 어쨌든 오늘 너 때문에 좋은 구경 많이 했다. 어떻게 살면 햄버거 하나 먹는데 드는 기력 소모가 하루 종일 영화관에 죽치고 앉아 영화 보는 것 보다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 수가 있는 거냐.” “아까… 영화 보려던 거였어?” “시사회권이 생겨서…. 같이 갈래?” 연무흠과 영화라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헌이 즉흥적으로 권하자 무흠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묘하게 일그러진 무흠의 어깨를 툭 치며 자헌은 짓궂게 웃었다. “걱정 마. 억지로 끌고 가는 짓은 안할 테니까. 자, 다 됐다. 나가자!” 주섬주섬 어질러 놓았던 것들을 챙겨 든 자헌이 무흠에게 말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한발 먼저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어? 왜, 두 사람이 나란히 화장실에서 나오는 거야?” 어느새 왔는지 재영이 두 사람을 맞는다. 아직 남아있던 멤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재영은 자헌과 무흠을 번갈아 보며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자헌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얼굴이다. “재영이 네가 들으면 광희난무 할만한 섬씽이 있었다.” 자헌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빌렸던 구급약품들을 돌려주며 객쩍은 농담을 건네고 일부러 가까이 다가서서 재영의 얼굴을 마주보며 씨익 입술을 끌어 올린다. “그래서, 시험은 잘 봤냐?” 재영은 화답이라도 하듯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새로 만든 원동기 면허증을 꺼내 자헌의 눈앞에 내밀었다. 자헌은 재영의 뽐내는 듯한 표정에 녀석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으러 트리며 웃었다. “앞으로가 걱정이지만, 일단 축하한다. 천재영, 뭐 갖고 싶은 것 있어?” “YAMAHA의 드랙스타 클라식 1100이나, 비라고 536.” 오래전부터 재영의 방에 걸려 있던 그 사진속의 오토바이를 말하는 것 같다. 벌써부터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것을 타고 달리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자헌이 재빨리 재영의 뒤통수를 쳐서 녀석을 꿈속에서 끌어냈다. “재영아, 천재영!! 너 그거 사러 갈 때 혼자가면 안돼. 아저씨 시간 안 되면 나라도 따라갈 테니까. 절대 혼자 가지마!” “에헤헤헤….” 듣고 있는 건지 아닌지 재영은 자헌에게 맞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웃는다. 평소에는 이런 녀석이 아닌데, 가끔 한 가지에 집중하면 상태가 이상해지곤 한다. 그렇게 되면 목적하는 물건을 갖기 전까지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자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 자신이 재영의 뒤통수를 쳤을 때부터 이쪽을 알아보고 죽어라 노려보는 한중의 시선을 살짝 외면했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다. “무흠아 많이 다쳤냐? 아까 너 또 오토바이 위로 날아올랐다며?” 자헌의 당부를 제대로 들기는 했는지 이미 평소의 아무 걱정 없는 표정으로 돌아간 재영이 무흠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뭐, 별로….” “그런데, 자헌이는 네가 데려온 거야?” 어수룩한 표정을 하고 잘도 정곡을 집어낸다. 하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무흠이 말고 자헌일 아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을 데리고 자신들이 노는 곳에 오는 것과 단지 얼굴을 알고 지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연무흠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하나 달고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그게 몇 번 본적도 없는 한 다리 건너 친구라면 더욱…. 모두들 궁금하게 여겼지만 감히 묻지 못한 말을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묻고 있었다. “….” “천재영 사람 입장 곤란하게 뭘 그런 걸 묻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너 평소엔 무흠이 바이크 얻어 타고 다녔잖아? 오늘은 뭐타고 온 거야?” 뚱하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무흠이 대신 자헌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놓고 말을 돌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영은 싱긋 웃으며, 재균이 옆에 앉아 있는 한중이 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 녀석 스쿠터에 매달려 왔지.” “풋….” 참으려고 해봤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헌은 다시 한층 강해지는 살기를 피해 고개를 돌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면 면허를 딸 수 없을 테니 스쿠터를 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덩치로 작은 스쿠터를 모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렇게 따져보면 저쪽에서 나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는 저 녀석 상당히 성실한 편이었네.” 아직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자헌이 재영에게 말했다. 순간 재영은 ‘뭐? 노려봐!?’하고 흥분해서 한중에게 날아갔다. 감히 선배에게 눈 부라렸다는 이유로, 자가보다 머리하나는 작은 상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한중은 갖은 엄살을 떨어댄다. 쓰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헌은 누군가 자신의 옆으로 슥 다가와 서는 것을 느꼈다. 돌아본 곳엔 무흠의 날카로운 눈이 마치 꿰뚫듯이 자헌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것이 닿는 곳마다 타오를 것 같이 되었다.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무흠의 검은 눈동자에 붙들렸다. “가자, 데려다 줄께.” ‘나를 볼 때는 시선을 피하지 마’라고 말했지만, 그 결과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역류하는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자헌은 그대로 무흠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바이크에 올라타고 막 출발을 한 순간에 와서야 자헌은 자신이 재영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나왔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어? 저 인간들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네. 악마에 도깨비 같은 인간이 함께 라니,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운 인간들이 대 놓고 공포분위기 조성하는 이유가 뭐야, 정말. 보기만 해도 끔찍 하….” “한중이 너, 지금 내 친구에게 뭐라고 했냐?” 재영이 싱긋 웃는 얼굴을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던 한중의 눈앞에 들이 밀었다. 순간 녀석이 흠칫 굳어져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소리 내어 말을 했다는 걸 모르는 얼굴이다. 살살 웃으면서 협박을 가하고 있었지만, 재영은 투덜거리는 한중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헌과 무흠 이 자신에게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저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졌는지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어제의 일 따위 전혀 기억나지도 않는 것처럼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고, 재영은 곧 기습이다 싸움이다 핑계대고 노느라 느긋하게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면허를 딴 것을 계기로 재영은 본격적으로 오토바이 구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첫날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지갑과 통장, 돼지 저금통까지 다 털어봐야 오십 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이 재영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었다. 요즘은 중고도 그 보다는 비싸다. 특히, 재영이 원하는 오토바이의 타이어 값도 안 될 것 같은 금액을 가지고는 어림없는 소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볼까 해도 딱히 짧은 시간에 학생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바이트가 있을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요즘 재영이는 저기압이다. 특히, 오늘은 오토바이 사달라고 시위하다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난 뒤라 더 그랬다. “어떻게 맞았기에 입안이 다 터진 거야? 자, 빨대 꽂아 줄 테니까 요구르트라도 마셔.” 하지만 세상에는 재영의 저기압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위대한 예자헌. 재영이의 엄마로 불리며, 녀석의 화풀이 따위 먹던 빵 위로 파리 올라앉은 정도의 심각성도 부여하지 않는 인간이다. 재영은 능숙하게 빵의 비닐을 뜯어낸 뒤 자신의 앞으로 내미는 자헌을 힐끔거리며 이 녀석에게 돈을 빌려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영의 주위에서 바이크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는 다른 녀석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재영은 그 생각을 애써 몰아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녀석에게만큼은 돈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구두쇠처럼 ‘다 끌어안고 무덤까지 가련다’형이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자헌이라면 웃으며 선뜻 그 많은 돈을 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게 분명했다. “내가 돈을 냈으니까. 내가 골라 줄께.”그리고 생긋 웃고는 안전성 보장에 속도도 적게 나오면서 무쇠 같은 헬멧이 귀엽기까지 한 신제품 스쿠터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갚아주면 되잖아.’ 같은 대사는 저 예자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스쿠터는 면허 없어도 탄다니까. 이러면 면허 딴 의미가 전혀 없잖아.’ 따위의 말 역시 그 웃는 얼굴로 한방에 날려버릴 것이다. “하아….” “왜? 무슨 일 있어? 고민 있으면 말해봐! 내가 할 수 있는 한 협조 할 테니까.” 자상한 자헌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영은 이것이야 말로 악마의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녀석들은 모두들 연무흠의 그 정신 빼놓을 듯한 외모와 무서운 눈,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면 드러나는 폭력성을 빗대어 악마 같다고 말하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무슨 일 때문에 고민하는 줄 뻔히 알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다. 어릴 적 순진했던 재영은 몇 번이고 자헌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부드러운 분위기, 웃는 얼굴, 큰 키, 단정한 생김새,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면 닭살이 일어날 것 같은 다정함. 수많은 여자들이 자헌의 저 겉모습에 반한다. 하지만 녀석이 웃는 얼굴 뒤로 어떤 계산을 하고 있고, 얼마나 냉정해질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실제로 자헌은 다정하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헌의 다정함에 반했던 여자들은 결국 그 다정함에 질려 떠나간다. 자헌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다. 자신의 안에서 어떤 것도 그 자신에 우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게 부모든 친구든 사귀는 사람이든…. 악마란 달콤한 얼굴로 다가와 부드러운 말로 사람을 홀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생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재영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악마에 가까운 사람은 연무흠이 아니라 예자헌이었다. 헤어날 수 없을 정도의 다정함으로 무장하고 결국은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른다. “아무것도 아냐. 망할 아저씨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제기랄!!” 괜히 자리에 없는 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리며 재영은 자헌이 쥐어준 빵을 덥석 베어 물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멋진 YAMAHA 비라고 536을 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 눈 딱 감고 아버지 카드를 훔쳐 봐?’ “재영이 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빵 꼭꼭 씹어 삼켜. 또 저번에처럼 빵 쪼가리 목에 걸려서 고생하지 말고.” “너… 이제 독심술도 하냐?” 육교 위에 자리 펴도 될 것 같다. 이 녀석. 재영은 마땅찮은 얼굴을 하고 자헌에게 눈을 치켜떴다. 자헌은 항상 재영이 위험한 생각을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지적해 온다. 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라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섬뜩했던 적도 있다. 물론, 재영이 본인이야. 불건전한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귓볼을 잡아당긴다는 사실을 알 리 없을 테니. 자헌이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아는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자헌은 쓰게 웃으며, 평소 하던 대로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뻗은 손을 간신히 멈추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해도 몸은 어느새 움직이고 난 후다.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다. 어쨌든 같은 나이의 친구가 귀여운 것이다. 모두들 자헌이 누구에게나 다정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웃는 것도 상냥하게 대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다. 비록 아무도 믿고 있지 않지만. 자헌은 시선을 돌려 펜스 끝에 앉아 있는 무흠을 보았다. 순간 바람이 불어 얼굴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단정한 얼굴을 슬쩍 보여준다. 그날을 계기로 지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눈이 가끔 피하지 않고 자헌을 마주보곤 한다. 하지만 그것뿐, 무흠은 다가와 말을 걸지도 다가가 말을 걸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무언으로 자헌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이 있고 무흠은 한동안 자헌을 데리고 자신의 패거리들이 있는 곳으로 갔던 일을 후회하는 듯 했다. 충동적인 일인지라 누군가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그 자신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한순간 자헌은 무흠의 일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창을 통해 잠시 이웃을 들여다 본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자헌은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일시적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던 것처럼 느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무흠은 여전히 저쪽에 있었고, 자헌은 아직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 자신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뚜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독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한사람에게만 하라는 말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무흠이 했던 말은 낯간지럽게 사내 녀석에게 그러지 말란 의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헌의 안에서 그 말은 의미를 바꿔가고 있었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어떤 미지의 것으로…. “고쳐. 안될 것 같으면 한사람한테만 하든지.” “응?” 볼이 터져라 빵을 우물거리던 재영이 자헌의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치켜뜬다. “아니, 많이 먹으라고.” “뭔가 다른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빵 먹다말고 무슨 말이야? 아직 배고파? 우유줄까?” “아니, 됐어.” 자헌이 자신 몫의 빵과 우유를 건네자, 재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뭔지 모르겠지만, 요즘 자신의 친구가 어딘지 이상하다. 여전히 녹을 듯한 미소를 짓고 살뜰하게 챙기고 그리고 그런 것 치곤 주변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뭔가가 변해버렸다. 재영은 자신의 앞에 어설픈 불량배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이상해.” 재영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어딘지 먼 곳을 응시하는 자헌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디 한군데 딱 집어 지적하긴 힘들지만 묘하게 흐트러진 교복차림만 보더라도 자헌은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대다. 어딘가 이상하지만 정작 뭐가 이상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뭐가?” 작은 종이 쪼가리가 허공을 나는 것에 시선을 주고 있던 자헌이 재영을 돌아본다. “너. 너, 뭔가 이상하다고, 아직도 전에 내가 했던 말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순간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레 웃었다. 재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다. 애써 자헌에게 숨기고 있다가 졸지에 불량스러운 녀석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걸 들켰던 날, 너도 일탈을 꿈꾸지 않느냐고 그렇다면 그냥 망가져 버리라고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기억하고 있다. 정말 재영의 말 그대로였으니까. 말 그대로 망가질 생각은 없지만, 뭔가-그게 학교이든 가족이든 자기 자신이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기는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것은 변화를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한 계기이다. “나는… 그날 네가 해준 이야기, 아주 고마워하고 있어. 어딘가 답답했던 내 마음속을 처음으로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거든. 그리고 네가 한 말에 대해서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이 내가 정말 앞뒤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를 리 없잖아?”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자헌이 그럴 리 없지.” “그렇지?” 납득하면서도 재영은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는 자헌을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오늘은 점심 먹고 다들 어딘가에서 퍼져 자는지 패거리들도 거의 옥상에 올라오지 않는다. 무흠이와 재영이 그리고 자헌을 빼면 1학년의 한중이와 친구인 듯한 녀석들 둘, 이렇게 여섯이서 점심시간 옥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 화장실 가야 되는데, 먼저 내려간다!!” 예비종이 울리자 재영이 이렇게 소리치고 날듯이 옥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재영이 없으면 이런 사람들과 어울릴까 보냐는 얼굴의 한중이 친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옥상에는 자헌이와 무흠 두 사람만 남았다. 자헌인 자신들이 먹은 흔적을 주어모아 쓰레기통 대신으로 사용하고 있는 박스에 가져다 넣고, 아직까지도 아까의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무흠을 돌아본다. 다른 곳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 “…안가냐?” 쓰게 웃으며 자헌이 먼저 말을 걸었지만 답이 없다. 평소처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시선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쯤 자헌의 몸은 불에 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먼저 내려간다.” 대답도 없고 그렇다고 움직이려고도 않는 무흠을 보고 자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돌아섰다. 아직 무흠을 대할 때의 태도를 정해놓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왠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처럼 무흠을 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를 대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헌은 옥상의 문을 열고 거의 천장쯤에 작은 창문 하나가 달린 어두운 계단참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래된 책걸상과 자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통풍이 잘 되지 않아 궤궤한 곰팡이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자헌이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중에 등 뒤에서 끼익하고 옥상 문이 열렸다 닫힌다. 그리고 등 뒤로 사람이 서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수업에는 들어갈 모양이다. 자헌은 왠지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넌 정말 잘 웃는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체된 공기 탓인지 무흠은 민감하게 자헌이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헌은 더 이상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다. 강한 힘에 밀어 붙여져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을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안되나?” 약간 무심한 듯한 어감에 눈앞으로 다가온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흠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보며 자헌은 그가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무흠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가 붙잡았는데,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랄까. “안될 것은 없지만, 그냥… 왠지 거슬려.” 가까이 다가온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럴 리가 없건만 무흠이 다가서는 순간 자헌은 계절을 잊고 도려내는 듯한 추위를 느꼈다. 어쩌면 낯선 상황에 답지 않게 당황 한 건지도 모른다. “왜?” 되묻는 목이 잠겨 있었다. 자헌은 무흠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무흠은 등 뒤의 작은 창에서 스며드는 빛을 의지해 자헌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본다. 자헌은 관찰 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항상 지켜보고 살피는 입장에 있었던지라 지금 상황은 자헌에게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몰라.” 무흠의 코끝이 자헌의 뺨에 와 닿는다. 그리고 답하는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싱겁기는….” 웃고 있는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다. 자헌은 무흠의 어깨에 손을 올려 살짝 힘을 주어 밀었다. 그걸로 그냥 못 이기는 척 이 알 수 없는 게임을 그만둬 줬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무흠이 밀려나지 않으려고 버티는 바람에 그냥 살짝 닿아있던 코끝으로 그치지 않고 입술이 뺨에 와 닿는다. 순간 무흠은 몸을 떨면서 웃어댄다. 덕분에 흔들리는 것들은 뭐든 맞닿게 되고 만다. 서로의 어깨가, 머리카락이, 얼굴이, 입술이, 그리고 호흡까지도. 자헌은 인상을 썼지만, 자신의 어깨위에서 떨고 있는 무흠의 머리를 치우려 하지는 않는다. 아니 되려 그 어깨위에 올렸던 손도 늘어뜨린 채, 이번에야 말로 등을 벽에 기대고 서서 무흠이 웃음을 그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는 게 재미있냐?”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자헌이 물었다. 무흠은 웃음이 그치고 난 뒤에도 닿아 있는 몸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자헌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치고 달려 내려갈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항상 웃을 수 있지?” 약간 쉰 듯한 음성에 평소 태연하게 웃음 짓는 자헌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자헌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무흠을 힐끔 쳐다보며 말한다. “싫으면 보지 않으면 될 것을…. 그렇게 보기 싫다면 웃지 말아야 하는 이유라도 한 가지 대봐.” “그냥, 기분 나빠.” “기각!” 자헌의 단호한 판결에 무흠이 쿡쿡거리며 웃는다. 평소의 무관심한 모습으로 보아 정말 상상도 되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자헌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무흠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순간 조금 긴 듯한 무흠의 머리카락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자헌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나하고 있을 때만은 평소보다 배는 말이 많아진다는 것 알고 있냐?” “….” “그리고 누가 곤란한 질문을 하면 일단 무시하고 본다.” 단 한번 보고 근거도 없이 내뱉은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무흠이 고개를 돌려 자헌을 마주봐왔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또 다시 자헌을 사로잡고 숨 막히게 했다. “키스할까?” 동문서답도 이정도면 조만간 몇 사람 간 떨어지게 할 것 같다. 자헌은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진지한 분위기의 무흠을 보았다. 겉모습을 보고, 말 그대로 의미인지 아니면 단순한 장난인지 분간 할 수 없다. 동요한 나머지 자헌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수업… 들어가야 돼. 이래봬도 일단은 성실한 학생이니까.” “이미 늦었어.” 맞닿은 입술 위에서 중얼거린 말은 들렸다기보다는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한순간에 허를 찔린 자헌은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흠은 자헌에게로 파고들었다. “욱….” 얼굴이 감싸 쥐어져 고정되자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혀가 입속을 휘젓고 다니는 낯선 감촉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짧게 자른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자헌은 무흠의 혀가 끈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입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참아 냈다. 어느 순간 막혀있던 숨을 내쉬며 살짝 눈을 뜨고, 자헌은 무흠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한 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의 입자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초자연적인 감각이 시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헌이 무흠에게 놓여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때까지도 자헌은 무흠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헌이 무흠에게 두려움을 느꼈거나 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왠지 현실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헌은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너 뒷모습 정말 죽인다.” 키스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품안에서 빠져나간 자헌을 보며 무흠이 말했다. 놀리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짓궂은 목소리였다. “…제길, 털어주는 아량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자헌은 툴툴거리며 교복에 뿌옇게 엉겨 붙은 먼지들을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하지만 그걸 론 부족했는지 좀처럼 깨끗해지지 않는다. 모양새로 보아서는 세탁소행이 될 것 같다. “지금가면 한참 수업 중일 텐데.” 저만치 계단을 내려가는 자헌의 뒷모습을 보며 무흠이 지적했다. “그래서? 여기서 너랑 더 있으라고? 왠지, 굉장히 사양하고 싶어진다.” “쿡쿡.” 위를 힐끔 올려다보며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자헌을 보며 무흠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 녀석과 키스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자헌의 반응을 보건데, 그 쪽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처음에는 놀려줄 심산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진지하게 혀가 얽혀 들었을 때는 자신도 놀랐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뭔가 색달랐다. 반응이, 끝나고 나서 멋쩍은 듯이 떨어져 나가는 태도가 그랬다. 끈적하게 달라붙지도 않았고 끌어안을 필요도 없었지만,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여자애들과 하던 그런 것과 다르게 금기를 범한다는 쾌감이 더해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다. “색다른 걸 발견했어.” 무흠은 홀로 계단참에 앉아 어둠에 싸인 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순간 잠잠하던 공간이 요동친다. 차갑게 가라앉은 무흠의 두 눈이 뭔가에 반사되기라도 한 듯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오랜만에 색다른 먹이 감을 앞에 둔 날짐승이 된 것처럼 무흠은 잔인한 충동을 느꼈다.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재영이 전화번호가 적힌 지저분한 팸플릿을 꺼내든 순간, 자헌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위험하다고 자헌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고 오토바이를 상상하지 못한 싼값에 살수 있다는 생각에 온통 정신이 나가있는 재영에게는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벌써부터 꿈에 부풀어 잔뜩 들떠있는 재영일 보며 자헌은 그 답지 않게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을 해서 알아듣는 상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이미 재영이 아닌 것이다. “재영아, 거기 언제 갈 거야? 설마,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지? 너 동안이라서 혼자가면 뒤집어쓰니까 절대 혼자가면 안돼! 알았지?” “응. 걱정 마. 한중이랑 가기로 했어.” ‘그래서야 혼자 가는 것 보다 나을 게 뭐야? 나랑 같이 가자는 말이라는 걸 그렇게 모르겠냐!’ 라는 호통은 자헌의 웃는 얼굴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릴 했다가는 재영이 뿐만 아니라 저쪽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덩치 큰 1학년까지 상대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 “연무흠은 같이 안가? 바이크라면 그 쪽이 더 잘 알지 않을까?” 건방진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살기를 품고 와 박혔지만, 자헌은 모르는 척 했다. 자헌이 무흠을 가져다 댄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영은 열심히 감가튀김을 집어먹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녀석은 먹고, 마시고, 싸움하는 일 아니면 움직이는 것 싫어해.” “물어는 봤어?” 아무리 그래도 한중이 보다는 낫지 싶어 자헌은 가장 안쪽 테이블에 들어앉은 무흠을 힐끔 거렸다. 녀석도 시선을 느꼈는지 쏘아보듯이 자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 시선도 따가운 것으로는 한중이 못지않다. “저 상판을 봐라. 그런데 같이 가게 생겼나. 됐어! 한중이랑 갈 테니까. 자헌이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그러니까 이렇게 될까봐 불안했다니까.’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자헌은 입술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고 있었다. 절대 말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돕겠다고 했다가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한건지 모르지만, 요즘 재영은 툭하면 ‘내가 어린애냐!!’라고 자헌에게 화를 내곤 했다. 그런 알 수 없는 일로 화를 내는 것부터가 아직 어리다는 증거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것은 좋지 않다는 걸 자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언제 갈 거야?” “토요일 날 수업 끝나면.” 귀찮게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느냐는 얼굴로 재영은 귀찮다는 듯 자헌을 힐끔 쳐다본다. “아, 마침 잘 됐다. 그날 나 일 없는데, 같이 가자!” “…예자헌, 너는 절대 안 데리고 가!” “에?” “못 들었어? 너랑은 안 간다고! 너 가면 분명 이것저것 트집 잡을 거잖아.” 무슨 당연한 소리를 이라는 얼굴로 자헌은 꽤나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영을 쳐다보았다. 왠지 더 이상 파고들 틈이 없다.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어른스러운 척은 혼자 다하다가도 이렇게 한번 발동 걸리면 그걸 꺾을 사람은 없다. 본인이 납득하기 전까지는. “그래, 그럼. 안 따라 갈 테니까. 만약 구입하게 되면 바로 와서 보여줘야 돼!” 하는 수 없이 자헌이 한발 양보했다. 그제야 재영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진다. 그리고 뒤통수에 와 박히던 따가운 시선들 중 하나가 가벼워진다. “자헌이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도 벌써 열여덟 살이다. 더 이상 어리지 않다고, 세상에 사기꾼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가서 보고 정 의심스러우면 그냥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너무 고민하다가는 머리 벗겨져!” “욱!” 자헌은 아픈 곳을 찔려 낮게 신음했다.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아버지의 두발이 상당히 가벼운 편이기에 그렇지 않아도 자헌이 그것에 대해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한 말이 분명했다. 자헌은 모친 쪽 형제들을 닮았지만, 대머리는 유전이라지 않는가. 재영은 이렇게 살짝 자헌의 약점을 찔러, ‘아직 우린 충분히 어려’ 따위를 말하려던 게 분명한 죽마고우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시승식 시켜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훗. 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재영은 거들먹거리며 일어나 다른 녀석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더 이상의 추궁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 인 듯. “역시, 어리다니까.” 자헌은 도망치는 재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은 언젠가 무흠을 따라 와봤던 그 햄버거 집이다. 여전히 위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패거리들은 말리는 사람하나 없이 자신들 편한대로 눌러 붙어 있다. 전에 왔을 때 아는 척을 했던 그 아르바이트 여자애 빼고는 아무도 이곳에 올라오지 않는다. 작고 귀여운 얼굴에 앳돼 보이는 그 녀석은 의외로 강단이 있는 듯 무흠의 패거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녀석들도 작은 여자애에게까지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 알고지낸 사이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 돌보느라 힘드시군.” 시선을 올리자 무흠이 아까까지 재영이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넨 것은 오랜만이다.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가 해야 할 일이지.” 자헌은 손대지 않고 놓아두었던 햄버거를 무흠에게 내밀며 건성으로 말했다. 사실 자신이 재영에게 상관하는 이유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과잉보호야.” 고개를 흔들어 거절을 표시한 무흠은 똑바로 자헌을 보며 지적하자, 자헌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쉰다. “알아. 이렇게 해봤자 고쳐지는 것도 없고 고마워하지 않는 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어. 그냥, 습관 같은 거라고 했잖아.” “아니 다행이네. 나는 또 팔불출 어머니 마음인가 했지.” “과찬의 말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무흠이 슬쩍 평소 자헌의 별명을 빗대어 놀리자, 자헌은 그 말을 빈정거림으로 되받는다. 그런 자헌을 보던 무흠이 피식하고 싱거운 소리를 낸다. 그리고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자헌을 똑바로 쳐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한사람한테만 하라고 했을 텐데?” 마치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싸늘한 시선을 띄고 무흠이 자헌을 노려봐온다. 자헌은 그런 살벌한 얼굴의 무흠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너 하는 꼴을 매일 눈앞에서 보는데,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째 상당히 거슬리는 말투였지만, 무시하고 자헌은 말을 받는다. “지금 한사람에게 하고 있잖아!? 제 발로 수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천재영이에게.” “저 바보는 그냥 내버려두고, 말 바꿔 타지 그래.” “그래, 어디의 누구로 바꿔 탈까?” 피식피식 웃으며 자헌은 실없이 농담을 했다. 저 연무흠이 자신에게 농담씩이나 던지고 있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긴 했지만,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 층계참에서의 이상한 분위기나 키스신 따위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던 참이다. 분명 그 정도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무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자헌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나.” “뭐…?”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되묻고 말았다. 농담은 농담으로 받으면 되지만, 지금 무흠에게서 나오는 말은 단순한 장난으로 받기에는 지나치게 무게감이 어려 있었다. “나에게 하라고, 그 닭살 돋는 짓거리든 뭐든 다 받아 줄 테니까. 나한테만 해.” “그거… 진심이냐?” 자헌이 잔뜩 인상을 쓰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목이 잠겨 소리가 갈라지자 자헌은 주변을 신경 쓰며 소리를 죽였다. “연무흠. 너, 그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도통….” 숨통이 조여 오는 듯한 위압감을 느끼며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목에 손을 댔다.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은 시끄러운 곳에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헌이 무흠을 보고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어두운 공간에 갇힌 것처럼 주변과의 흐름이 단절되었다. 어깨를 짓눌러 오는 압박감에 자헌은 숨을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넌 이미 알고 있잖아?” 어둠의 주인이 무흠의 입을 빌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의 가장 자리를 움켜쥐었다. 숨 막힐 정도의 긴장감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입을 벌렸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지금부터다.” 순간 긴장이 탁 풀렸다. 자헌은 숨을 헐떡이며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얼음이 반쯤 녹은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흠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런 자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토요일. 종례를 마치자마자 아이들은 반쯤 사라지고 이미 없었다. 자헌은 느긋하게 가방을 싸면서 어떻게 하면 재영이 기분상하지 않도록 녀석을 따라잡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재영이 가지고 있던 그 팸플릿에 있던 수상한 전화번호는 이미 외워두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뒷문 쪽을 쳐다보았다가 손을 멈췄다. 어쩐지 아이들이 모두 앞문으로 나간다 했더니 그곳에는 무흠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자헌을 쏘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자헌은 가방을 둘러매고 천천히 무흠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교실에는 청소당번들 외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쩐지 빨리 사라진다 했다. 자헌이 실소를 터뜨리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무흠이 눈을 번쩍인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분명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청소당번들을 의식하고 자헌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무흠은 그걸 것 따위 개의치 않고 말한다. “시간 있지?” “왜? 심화반 들어가야 되지만….” 찾아온 이유도 그렇지만 뜬금없이 시간 있냐니 영문을 알 수 없다. 자헌은 말끝을 흐리자, 무흠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진다. “심화반? 그건 또 뭐야?” “풋, 그런 게 있어. 그런데 시간은 왜?”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막 기분이 나빠지고 있다는 걸 감추려고도 않고 무흠은 퉁명스럽게 자헌을 재촉했다. 간간이 시간을 확인 하는 걸 보니 분초를 다투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무턱대고 그냥 따라가기에 연무흠은 지나치게 찜찜한 존재였다. “무슨 일인지 먼저 알려주면 시간을 낼 수도 있고.” “그럼, 가자!” 다짜고짜 팔을 잡아끈다. 갑작스러운 일에 자헌도 당황했지만, 내내 이쪽을 신경 쓰고 있던 청소당번들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러다가는 월요일, 학교에 오면 예자헌이 연무흠에게 게기다가 당했(맞았)다더라 하는 헛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야, 잠깐, 잠깐만! 시간을 낼 수도 있다는 말이 언제부터 시간이 있다는 말로 둔갑을 한거냐?” 이라고 항의 해봤자, 무흠에게 통할 리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조합에 지나가던 녀석들이 계속 힐끔거리는 모습이 거슬려 반항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자헌이었다. “안 도망 갈 테니까 팔 놓고 가, 연무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들려.” 안절부절 못하는 자헌의 행색을 힐끔 쳐다보더니 무흠은 움켜쥐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자헌은 막 놓여나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은 팔목을 문지르며 툴툴거린다. “그럼, 제대로 대답을 해.” “너 재영이 따라가려는 거 아니었어?” 무흠은 자헌의 시선을 외면하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아! 뭐야.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그제야 자헌은 무흠이도 지금 재영의 뒤를 따라가려고 한다는 걸 눈치 채고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순간 어느 때 보다도 싸늘한 시선이 와서 박혔지만, 자헌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너도 신경 쓰였지?” 자헌은 순순히 무흠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무흠은 그런 자헌을 보며 코웃음을 친다. “웃기지마. 너 때문이잖아.” “나?” 황당해하는 자헌을 무시하고 무흠이 따지듯이 추궁한다. “아직도냐?” “…?” 아직도 재영이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냐는 소리였다. 자헌이가 재영이와 사귀던 사이도 아니고 친구가 혹시 이상한 물건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자헌은 어이가 없어 무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녀석을 무시해 버렸다. “야!” 무흠이 자헌을 거칠게 돌려세웠다. 시선이 부딪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너 이상하다는 것 알고 있냐?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아느냐고!! 우리가 전부터 알던 사이도 아니고, 갑자기…. 그래, 내가 좀 사람들에게 잘해준다고 치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교정 뒤꼍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잦아드는 목소리와 함께 자헌은 한낮의 태양에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무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순간 무흠의 손끝이 뺨에 와 닿았고 자헌은 움직일 수 없었다. 햇볕을 받아 어지럽던 머리에 무흠의 손끝이 닿는 순간부터 찬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헌은 이 곳이 학교이고 자신이 무흠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가자.” 무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섰고, 자헌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오토바이를 세워놓은 곳까지 온 무흠이 시동을 걸고 자헌에게 헬멧을 건넸다. 하지만, 자헌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것을 거절하고 뒷자리에 올라타 어색하게 무흠의 혁대를 움켜쥐었다. “어디인지 알아?”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무흠은 그대로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와 사람이 거의 없는 주택가 골목을 천천히 달렸다. 자헌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무흠의 등에 머리를 묻고, 후…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제법 사람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의 먹자골목 근처였다. 벌써부터 삐끼들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쥐어주고 있었다. 당당히 교복을 입은 채 눈에 띄는 바이크를 몰고 이런 곳까지 들어온 둘을-무흠의 옷은 거의 교복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힐끔거린다. 걔 중에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좋아라 소리 지르는 여자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사실 그 녀석들은 시끄럽기만 할뿐 딱히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내 녀석들은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아마 그쪽도 그럴 것이다. “여기가 맞는 거야? 어째, 분위기가….” 뒷자리에서 내려서서 굳은 몸을 쭉 펴보며 자헌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성인들의 거리이지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보는 쪽과 연령대가 맞는 이들만 눈에 들어왔던지. “이 근처가 맞아.” 무슨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흠은 자신 있게 말하며 자신의 혼다를 오토바이 보관소에 세우고 열쇠를 채운다. “야, 그냥 여기다 세워놓고 가도 돼?” 주위의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지 않게 너무 안일한 행동이라 자헌은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무흠은 태연하게 편의점 앞의 패거리들을 향해 씨익 미소 짓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괜찮아. 저 녀석들도 내 물건에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까.”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저쪽에서 성질 급한 녀석이 무흠의 웃는 얼굴에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서자, 다른 녀석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친구를 말린다. 무흠은 다시 한 번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으나 곧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인파 속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재영이를 어떻게 찾으려고?” 자헌도 일단 무흠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이런 혼잡 속에서는 무턱대고 돌아다닌다고 찾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를 보나 사람들 투성이라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찾기란 여간 해선 힘들 것 같다. 무흠은 힐끔 사람들 사이로 부지런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자헌을 돌아보고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중이냐? 나다.” 분위기로 보아 상대는 한중이라는 1학년 덩치인 듯 무흠인 낮게 목소릴 깔았다. 그것을 보던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픽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자헌 앞에서는 나물나물 잘도 지껄여 대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갖은 폼을 잡는다. 무흠은 무섭게 자헌을 노려본 뒤 재빨리 등을 돌린다. “응. 어디냐?” ‘….’ “뭐? 너 지금 나한테 반항 하냐?” 목소리가 음산하게 쫙 깔린다. 등을 돌리고 있는 대도 무흠의 주변으로 불길한 오라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카락이 멋대로 뻗혀 있는 무흠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저쪽에서 뭐라고 변명하는지 들리지 않지만,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 “…뭐야, 이 새끼.” 통화가 갑자기 끊긴 듯 무흠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주변에도 연무흠과 통화를 하다가 감히 전화를 끊어버릴 만큼 배짱 좋은 놈이 존재했던가 보다. 아니면 죽으려고 작정을 했든지. 무흠은 고개를 휙 돌려 살벌한 시선으로 자헌을 마주봐왔다. 순간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실제로 날카롭다거나 하는 눈초리에는 많이 익숙해 있고, 전혀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그냥 끊겼어?”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도 않는데,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끊어버렸어.”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자헌이 서 있는 곳까지 들렸다. 이래서야 불쌍하게 됐다고 해야 할지…. “잠깐, 핸드폰 좀 빌려줘 봐!” 자헌은 거리낌 없이 무흠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는 어딘가로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무흠이 눈짓으로 누구에게 거는 거냐고 묻자, 말없이 입술위로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무흠은 궁금증이 인 듯 자헌의 가까이 붙어 서서 신호음을 듣는다. ‘네, 여보세요?’ 조금 건방진 투의 남자 목소리에 무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아까 무흠이 그랬던 것처럼 자헌도 휙 등을 돌리고 통화를 시작한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오토바이 중고 보기로 한 사람인데요. 네, 네. 길을 잃었거든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자헌은 빙긋 웃으며 무흠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무흠이 더 묻기 전에 말을 잇는다. “아, 재영이 팸플릿에 있는 전화번호 외워뒀거든.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서 어디서 만나기로 했냐 하면, 이쪽이 아니라 저 건너편이라는데. 이름 들어봤어? 핑크? 핑키? 술집이라는데.” 손가락을 뻗어 찻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블록이 신시가지라면 그 쪽은 구시가지라고 하는 게 맞겠다. 갖가지 노점상들과 허름한 레코드가게, 헌책방 그리고 지저분하게 낡은 다방에 한물간 단란주점까지 없는 게 없다. 왠지 저쪽 어느 골목 버려진 주차장 같은 곳에서라면 뭔가 뒤가 구린 물건도 제법 나올 것 같다. 두 사람이 다시 무흠의 바이크를 세워 놓았던 그곳에 오자 그것은 무사히 보관되어 있었다. 편의점 앞에 모여 있던 녀석들은 그 사이 어디론가 사리지고 없었다. 장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흠은 골목과 샛길이 사방으로 뚫려있는 길을 막힘없이 달려 나간다. 뭐든지 익숙한 듯한 심지어 작은 골목하나까지도 앞을 확인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이크를 몰고 있었다. 무흠이라면 평소에도 이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 오래지 않아 무흠은 어느 건물 앞에 바이크를 세웠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관 골목이지만 손님 보다는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지름길 삼아 다니는 듯 했다. 무흠인 골목어귀의 한의원 주차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바이크를 세워놓고 또 앞질러 걷는다. 익숙한 태도를 보아 짐작대로 이 곳이 주 활동 무대인 듯 했다. 무흠이 패거리가 자주 가는 햄버거 집과도 그리 멀지 않다. 얼마안가 제법 후미진 골목에 숨겨진 듯이 보이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핑크탱고」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아리송한 이름이지만, 술집 옆의 작은 빈터에 할일 없는 건달 같은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문채 서 있었다. “어이, 너희들이 연락했던 애들이냐?” 자헌의 교복을 보고는 바로 반말로 나온다. 불량스레 뒤쪽에 서 있는 무흠이 아니라 자헌이 바이크를 사러왔다고 생각했는지 침을 틱 뱉고 어슬렁거리며 자헌의 앞으로 다가온다. 키는 자헌이 더 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인상이 더 구겨진다. “저, 혹시 저희 말고 다른 애들 안 왔습니까?” “왔으면 저게 남아 있겠냐?” 남자는 히죽 웃으며 공터 한쪽에 세워져 있는 바이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가서 구경해봐. 궁금한 것 있으면 묻고, 미리 말하지만 어디 가서 이렇게 싼값에 저런 건 못 구한다고!!” 남자의 재촉에 떠밀려 두 사람은 그것을 가까이에 가서 보게 되었다. “이거….” 무흠은 멀뚱히 서서 꽤 진지하게 바이크를 살피는 자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왠지 눈에 익은 물건의 모습에 유심히 그것을 보게 되었다. “이거 그 쪽 것?” 말끝이 살짝 올라가며 의문을 표시하는 자헌의 모습에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버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하지.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파는 거라 싸게 내 놓는 거야.” 바이크와 날건달 같이 생긴 남자를 번갈아 보던 두 사람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흠이야 여러 번 봤을지도 모르지만, 자헌은 단 한번 본적 있었다. 얼마 전 햄버거집 앞에서 긴 각목을 마구 휘둘러 백미러를 때려 부수던 녀석의 오토바이와 똑 같았던 것이다. “넘버가 똑같아.” “저 배기통 찌그러진 것 내가 한 거야.”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눈앞의 녀석이 이 오토바이의 주인이 아님을 확신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그 녀석에게 의리를 지켜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이, 너희들 뭘 중얼거리는 거야? 살려면 빨리 사고 돈 없으면 꺼져!” 시간이 흐르자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남자가 빽 소릴 질렀다. 다시 두 사람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 아니라도 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둥 하는 소릴 귓등으로 흘리며 두 사람은 다시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바이크가 도난당한 것이든 아니든 어차피 두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재영을 찾으러 왔는데, 녀석이 없으니 어차피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재영이 녀석 이곳에 온 게 아니라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감히 이 나를 헛걸음 시키다니 만나면 죽인다.” “그거 어째, 화살이 나한테 돌아올 것 같다?” 자헌이 힐끔 무흠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말을 받듯 무흠 역시 자헌을 곁눈질하며 이죽거렸다. 일단 재영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지만, 결국 무흠이 이 일에 끼어든 것은 자헌 때문인 것이다. “….” 자헌은 알면 됐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 아무런 말도 없는 무흠을 재촉한다. “그 한중이라는 녀석한테 전화 좀 다시 해봐.” 그 순간 무흠이 발을 멈추고 저만치 골목 어귀에 쓰러져 있는 스쿠터를 쳐다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자헌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저거…. 한중이 것 아냐? 어떻게 된 거지?” 자헌의 말을 듣는 건지 아닌지 무흠은 한참을 넘어진 스쿠터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대꾸도 없이 순식간에 저만치 날아가는 무흠의 모습에 놀란 자헌은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제길!!” 어느 골목에서인가 자헌은 무흠을 놓치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헌은 막연하게 재영이 위험에 처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 할 뿐이다. 허리를 굽혀 입안에 고인 침을 뱉고 또 앞으로 뛰었다.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뛰면서 귀를 기울이며 어딘가에서 싸우는 소리라도 들리길 기대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땀이 흘러 내려 눈앞을 가리고 등에 달라붙어 있는 가방은 뛰는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막 가방을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근처에서 뭔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자헌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회색의 낮은 담들과 간판 집, 묘하게 폐쇄적인 술집 등이 있는 길가의 골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까이 가자 누군가의 악에 바쳐서 떠들어대는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자헌은 일단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방해가 될지 먼저 판단해야 했다. 담을 끼고 슬쩍 돌아다보자 창고처럼 쓰이는 낡은 공터였다.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던 건지 건축 자재들이 한쪽에 싸여 썩어가고 있었고, 낡은 가전제품 같은 게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방금 자헌을 멈춰 세웠던 큰 소리는 아직도 먼지를 날리고 있는 냉장고가 넘어지면서 낫던 것 같다. 일단 자헌이 서 있는 곳에서는 재영이나 한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자헌의 눈앞을 달리던 무흠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큰 소리로 욕설을 지껄이는 녀석과 대치 중이었다. 짧은 노란 머리가 왠지 낯이 익다 싶더니 바로 도난 오토바이의 주인이었다. “연무흠 이 씨방새!! 누가 모를 줄 알아? 네놈들이 꾸민 일이지. 이 악마 새끼!” 흥분해서 떠들고 있는 녀석도 실컷 싸우고 난 뒤인 듯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거나 앉아 있는 녀석들도 꽤 되는 것 같다. “무슨 헛소리야?” 무흠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잔뜩 인상을 구겼다. “씨발,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안 내놔!? 네놈들이 가져간 것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니까 병신아, 우리가 뭘 가져갔냐니까? 혹시, 니 깔치 말이냐?” 무흠은 이죽거리며 상대방을 비웃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차 열을 받은 노란 머리는 더욱 날뛰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자헌은 무흠이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을 확신 했다. 저 녀석은 지금 싸우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눈빛부터가 평소랑 다르다. 어차피 무시무시한 것은 같지만. 살짝 고개를 빼낸 자헌은 무흠이 서 있는 뒤쪽에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앉아 있는 한중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재영이라고 추정되는 누군가가 미동도 않고 모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느긋하게 싸우고 있을 때냐. 연무흠!’ 이사이로 중얼거리며 자헌은 자신이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대로 싸움이 붙으면 다친 녀석들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옆에 있다가 더 크게 상처 입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바이크 내 놓으란 말얏! 이 빌어먹을 개새꺄!!!” 『퍼억!!』 노란머리가 무흠에게 달려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헌은 가방을 던져 녀석의 머리를 명중시켰다. 마침 그 안에 영어시간에 쓰던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사전이 들어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노란머리는 가방에 얹어 맞은 순간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포즈를 하고 앞으로 넘어졌다. 순간 무흠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오는 자헌을 쳐다보았다. “너… 뭐냐.” “뭐긴, 재영아? 천재영 괜찮아?” 자헌은 그대로 멀뚱하니 서서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흠을 지나쳐 재영이에게 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렴풋이 짐작은 되었지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 자헌이 네가 여기 왜 있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재영이 부스스 털고 일어선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도 기절한 척 하려고 했더니만… 이라며 겸연쩍은 듯 귓가를 긁적인다. 어이가 없어진 자헌은 헛웃음을 치며 무흠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냥 피식 웃고 만다. “왠지 못 볼꼴을 본 것 같아.” 자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잡고 재영이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여기저기 타박상에 입안이 터졌는지 계속 피를 뱉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상처는 재영이 보다 한중이 심한 듯 했다. 그 때 자헌의 가방을 맞고 넘어진 노란머리가 머리통을 움켜쥐며 욕을 뇌까린다. 어지간히 충격이 심했는지 다시 일어서서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무흠이와 가방을 던진 놈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걷기 괜찮으면 빨리 가자! 연무흠, 너도 넘어져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대랑 싸우는 건 재미없을 것 아냐. 가자!!” 자헌은 부지런히 녀석들을 재촉했다. 이 말을 들었는지 노란머리가 또 다시 ‘너 이 자식 죽여 버린다. 너 이름이 뭐야!?’라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무흠이의 사정 봐주지 않는 주먹을 맞고 그대로 뒤로 뻗어버렸다. “시시하게.” 시작도 하기 전에 쓰러져 버린 상대를 앞에 두고 무흠이 투덜거렸다. 간만에 몸 좀 풀까 했는데 계획이 틀어진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다친 사람 두들겨 패서 기절시킨 주제에 뭐라는 거야?” 자헌은 빈정거리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무흠의 등을 밀었다. “가방 던져서 쓰러뜨린 넌.” “어쨌든…. 재영이 너 괜찮아? 이쪽은 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은데.” 무흠이 사납게 노려보는 것을 모르는 척 하며 자헌은 재영이와 한중이 쪽으로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처음 한번은 한중에게 손을 내 밀었지만 쳐내졌다. 여전히 자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어떻게든 자기 발로 일어선다. 그리고 재영은 두 사람이 여길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 했다. “그나저나 우리 여기서 당하는지 어떻게 알고 찾았어?” “잠깐, 재영이 너 아직 그 팸플릿 가지고 있지? 그거 좀 줘봐!” 자헌은 재영의 말을 막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재영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팸플릿을 찾아냈다. 상대편 녀석들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더 싸울 생각은 없는 듯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녀석들을 챙긴다. 되도록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자헌은 노란머리 근처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가방을 주워들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독기품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노란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녀석이다. 자헌이 피식 웃자, 그렇지 않아도 위로 확 찢어진 눈초리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혹시 오토바이 찾고 계십니까? 그것 저 친구들 짓 아닙니다. 자, 받으세요. 그 번호로 전화해 보시면 찾고 계시는 것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찾고 못 찾고는 지금부터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자헌은 재영이 가지고 있던 팸플릿을 노란머리의 가슴위로 던져 놓고 돌아섰다. 그리고 저만치 골목 어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가자!” 묵직한 가방을 고쳐 맨 뒤 자헌은 그렇게 말하고 앞장섰다. 노란머리는 잃어버린 오토바이를 찾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우연히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자, 그간의 반목에 의해 자연스럽게 싸움이 붙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의심일 수도 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서로 싸워 왔을 테니까. 자헌은 탁하고 재영의 앞에 주스를 내려놓고 마주앉았다. 울긋불긋한 생채기를 달고도 재영은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자헌을 외면한다. 이미 집에 돌아오면서 사건의 전말은 자세히 전해들은 뒤이다. “천재영.” “….” 조용한 부름에 움찔하고 어깨가 튀어 올랐지만 대꾸는 하지 않는다. 자헌은 한숨을 쉬며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않아 재영의 퉁퉁 부어오른 입가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마주 앉아 위압감을 주면 재영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츠려드는 것을 잘 아는 자헌은 가끔 녀석을 꼼짝 못하게 만들 일이 생길 때마다 일부러 거만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지금처럼. “지금 우리끼리 해결할까? 아니면 재희 누나한테까지 올라가야할까?” 말하자마자 계속 비껴나가던 시선이 찌릿하고 와서 박혔다.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재영을 쳐다보았다. 천재희는 재영이들 보다 세살 많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재영은 아버지 누나인 재희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한지 5년이 훨씬 넘었다. 따로 살고 있지만, 재희는 자주 재영이를 보러왔고, 재영이 또한 누나가 하는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깜빡 넘어간다. 자헌이 시스터 콤플렉스를 의심할 정도니 오죽할까. 그런 재영이에게 있어 재희에게 이런 일들-싸우고 돌아다니는 것들-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을 일이다. 재희 성격에 재영이 놀고 다닌다는 것을 알면 가만두지도 않겠지만, 어찌되었든 자헌은 재영의 주의를 끄는 일에 확실히 성공을 했다. “누나한테 말하면 넌 죽는다.” 재영이 주먹을 휘두르며 협박을 하자 자헌은 한마디 할 때마다 목에 힘을 준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우리끼리 잘 해결해 보자는 거잖아? 너 아직 재희누나한테 면허 땄다는 얘기도 안했지?” “그걸 어떻게 하냐? 당장 면허증부터 가위로 잘려 나갈 텐데.” 재영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한 순으로 자헌이 재영의 말을 받으며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다. “맞아. 그 다음엔 다리가 부러질 테고.” “너…. 지금 나 놀리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벌컥 화를 내며 재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자헌을 노려보았다. “그러게 나나 아저씨랑 같이 가자니까. 왜 혼자 간다고 우겨? 혹시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 오토바이 샀어봐라. 그 나이에 벌써부터 장물에 손댔다가 경찰서 들락거리고 싶어? 그랬으면 아저씨 당장 뒤집어엎었을 걸” “나도 봤으면 그게 그 놈 건지 알았을 거야.” 재영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불퉁거렸다. 물론 평소 같으면 금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은 단정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싸게 살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을 때는 누구라도 눈에 콩깍지가 쓰이기 마련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헌은 물끄러미 재영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재영은 그런 자헌의 태도에 울컥했지만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너 애들한테 돈 빌렸지? 얼마나 빌렸어?” 또 다시 자헌의 추궁이 시작되었다. 재영은 넌더리나는 얼굴로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남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쏘다 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당장 자신의 모든 만행이 재희누나에게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재영은 얌전히 자헌이 하는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돼. 한 삼 십 만원쯤?” 자헌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인다. 재영은 뻔뻔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뒤따라올 불호령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심 움츠려든다. “너 그 돈 어떻게 갚을 생각이었지? 대책도 없이 그런 큰 돈을 빌려서 어떻게 할 생각이었냐? 어디 가서 몸이라도 팔 생각이었어?” “썅!! 누가 그런데? 그냥 한달쯤 편의점 같은데서라도 아르바이트 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그래?” 못 믿는 투다. 재영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자헌이 저 자식은 항상 사람 기분 나쁜 말을 골라서 한다. 남이 당하는 것을 볼 때는 무지 재미있었는데, 정작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을 정도로 배알이 꼴렸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재영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순간 자헌이 재영의 앞에 있는 주스 잔을 쓰러지지 않게 붙든다. 그것을 본 재영은 더 열을 받았다. “아니, 너라면 잘 할 거야.” 자헌은 씩씩거리고 있는 재영을 치켜세웠다. 그래봤자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이였지만. “그런데, 왜 시비야!?” 어쩐지 이런 상대 앞에서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워진 재영이 한풀 꺾인 채 중얼거렸다. “시비라니 내가 너한테 시비를 걸 리 없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너 가지고 있는 돈 내에서 오토바이 사면 안 될까? 인터넷 찾아보니까 오십만원 내외로 괜찮은 것 많던데.” “안타고 말지.” 자헌의 말에 재영은 확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왕 타는 것 본새 좋은 걸로 타고 싶었다. 괜히 면허까지 땄겠는가. “그러니까! 네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은 중고라도 백만원이 넘어가는데, 어떻게 하려고? 또 오늘처럼 싸게 준다고 갔다가 이번에야 말로 정말 장물 사고 싶어?” 막무가내인 재영을 보며 자헌은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 모르는 것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재영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쁜 재영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자헌이 앞에서 고집을 부리지만 얼마안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한참을 말도 없이 앉아 있는 재영을 응시하던 자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은근하고 낮은 목소리에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자헌을 돌아보았다. 순간 자헌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직감적으로 뭔가 있다고 여긴 재영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앉자, 자헌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씩 웃는다. “둘 중에 하나 골라 봐. 네가 가지고 있는 돈 내에서 중고를 사든지 내가 빌려주는 돈으로 새것을 사든지.” “너…. 무슨 꿍꿍이냐?” 의심이 가득 들어찬 재영의 눈빛에 자헌은 시치미를 떼는 얼굴로 ‘꿍꿍이라니?’하고 반문한다. “네 녀석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또 뭘 꾸미고 있는지 빨리 불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재영은 자헌을 추궁했다. 재영에게 자헌은 가족 같은 존재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보다 더한 녀석이다. “말 그대로야. 너 한번 오토바이 산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때려죽인다고 해도 어쨌든 살 거잖아? 그렇다면 네 돈으로 그냥저냥 한 걸로 한대사서 연습한다 생각하고 타고 다니든지, 내가 빌려주는 돈으로 네가 원하는 회사의 원하는 제품으로 구입해서 튜닝까지 싹 새로 하고, 보험도 들고, 세금도 낸 뒤 끌고 다니든지. 둘 중에 하나 택일해.” 재영은 말없이 손을 뻗어 자헌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자헌은 재영의 손을 걷어내며 쓴웃음을 짓는다. “걱정 마. 나 안 미쳤어. 그냥 준다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조건도 달 거고….” “자헌이 너 내가 사고 싶어 하는 게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재영이 재빨리 자헌의 말을 가로채며 목소리를 경직시켰다. 다만 얼마라도 빌려 볼까 하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헌이네가 잘 산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 돈이지 자헌이 돈은 아닌 것이다. 자헌이 용돈을 남들보다 많이 받는다 해도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주는 돈이야 재영이와 비교해 얼마 차이 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천만원이 넘어가는 오토바이를 사주겠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저걸 다 하려면 이천쯤 있으면 될 것 같지?” 참 태평하게도 물어본다. 재영은 기가 막힌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돌아앉았다. “네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 돈 다 어디서 나서!?” 농담도 이정도 하면 수준급이다. 재영은 자헌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질리게 만든 뒤에 얌전하게 평범한 중고 오토바이를 사게 만들려는 고도의 수법이라고 이해했다. 역시, 용의주도한 놈. “적금 깨고, 할아버지 따라 다니며 재미로 사놓은 주식이 엄청나게 올랐더라. 그거 팔지 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헌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주식시장이나 투전 경마장에 그 분을 쫓아다닌 것은 재영도 익히 알던 일이지만, 투자까지 한 것은 몰랐다. 자헌은 재영이 멍하니 쳐다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장난으로 했던 건데….’하고 말끝을 흐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증스럽던지 재영은 또 다시 발끈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 응? 예자헌!?” 재영의 흥분과는 다르게 자헌은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린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봐야 쓸데도 없는데. 잘 됐지 뭐!” “미친 거야! 네 놈이 기어이 미친 것이야!!” 경악에 입을 벌리고 역시 부자 놈의 감각은 따라갈 수 없다며 재영이 소릴 질렀다. “그냥 준다는 것 아냐. 벌어서 다 갚아. 이자까지 쳐서 확실히. 그리고 오토바이 사러갈 때 같이 가야하는 것은 물론, 비 오거나 눈 오는 날에는 타면 안 돼. 밤에도 되도록이면 나가지 말고 헬멧 없이 타도 안 돼. 안전장치를 더 한다면 모를까 괜히 소리 요란하게 고치는 것도 안 되고 익숙해질 때까지는 속도도 줄여 타고 다녀. 학교 갈 때도 지금처럼 버스 통학 해.” 기다렸다는 듯이 억양도 없이 읊조리는 말에 재영은 탈진 한 듯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너 지금 오토바이 사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완전히 힘이 빠져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재영을 무시하고 손을 꼽아 보더니 자헌은 한마디 더 덧붙인다. “아, 괜히 멋있게 보이려고 묘기 부리는 것도 안돼!” “….”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재영이 동의 하든 안하든 자헌은 자신이 말 한대로 할 것이다. 두 사람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헌은 평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억지로 재영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아저씨하고 재희 누나 눈 있으니까 주차는 우리 집에다 시키고 스페어 키도 내가 갖고 있으마. 마지막으로 소유권도 처음엔 내 앞으로 해 놓고 너 하는 것 봐서 이전 해 줄게. 참, 잊어버리기 전에 계약서 작성하자!” 이렇게 말한 자헌이 종이를 꺼내들고 ‘공증은 변호사 사무실인가?’하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재영은 넌더리를 쳤다. 얼마 뒤 재영은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모두들 부러워마지않은 오토바이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 누구나 -연무흠 조차도- 멋지다고 한마디씩 하는 그것을 몰고 다니면서도 재영은 시종 침울한 안색이었다. “형, 왜 그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크 새로 장만 할 생각에 기분 좋더니? 지금은 왜 다 죽어가는 얼굴이야?” “그런 게 있어. 애들은 몰라도 돼.” 웅크리고 앉아 있는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한중이를 손으로 휘휘저어 쫓아내며 재영이 중얼거렸다. 5교시 수업을 재끼고 옥상에 남은 녀석들은 재영이를 비롯해 세 명이었다. 한중은 재영에게 쫓겨나자 투덜거리며 무흠이 근처로 가 앉는다. 재영이 남는 다기에 남았는데, 저러고 있으면 말 붙이기도 어렵다. 결국 잠이나 자야지 하고 한중은 박스를 펼쳐놓은 곳에 큰 몸을 뉘였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결국 한중은 멀거니 눈을 뜨고 햇볕이 그대로 내려쬐는 땡볕에 앉아 펜스 너머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흠을 쳐다보게 되었다. 패거리들 중에는 무흠의 저 얼굴을 잘생겼다고 하는 놈들이 있는데, 한중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흉악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뼈의 모양에 의한 얼굴 껍데기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중은 이미 무흠의 광폭한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저 안에 감추어진 악마를 보았다. 저 피흘리는 듯한 새빨간 입술을 벌리고 웃는 순간 시커먼 그것이 그 안에 있었다. 웃으며 손목을 부러뜨렸던 그 때 한중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경험했다. 한중이 누군가를 두려워하게 되었던 최초의 순간이었다. 한중이 있는 쪽에서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무흠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 그것을 슬쩍 들추었다. 순간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마치 그 때처럼 무흠이 어딘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가 슬쩍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저 녀석을 어떻게 할까하고 궁리하는 것처럼 어떤 한점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난 뒤 한중은 또 다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무흠이 표정 없는 얼굴로 한중을 돌아본 것이다. 어딘지 몽롱하던 잠기운도 싹 달아나버린 한중은 낮잠 자는 걸 포기하고 일어나 앉았다. 이미 무흠의 시신은 제자리로 돌아간 뒤였지만, 이대로 자면 악몽을 꿀 것 같았다. 한중은 천천히 일어나 무흠이 내려다보고 있는 운동장 쪽 펜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가끔 이런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피를 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깨닫기에 한중은 아직 어렸다. 운동장에는 5교시가 체육시간인 운 좋은 어떤 반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한중은 입맛을 다시며 공을 차는 녀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좀 많다 싶었는데, 체육복을 보니 1, 2학년 각각 한반씩인 듯 했다. ‘쯧’하고 혀를 차며 교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던 한중은 순간 멈칫했다. 누군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섰던 한중은 상대가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봐도 익숙한 형태의 얼굴이 이쪽을 아니, 무흠을 보고 있었다. 한중은 왠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펜스에 한쪽 팔을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무흠과 운동장의 스탠드 계단에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중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자헌은 친구의 부름에 돌아서서 뛰어간다.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한중은 그 순간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뭐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것은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저기 형, 예자헌인가 하는 그 인간.” 한중은 아까부터 미동도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한 얼굴의 재영에게 말을 걸었다. 순간 재영은 눈에 보일 정도로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응? 자헌이? 자헌이가 어디!?” “….” 조금 지나치다싶게 과민반응 하는 재영을 보며 한중은 할 말을 잃었다. “자헌이가 어디 있어? 이 자식 사람 간 떨어지게 왜 거짓말을 하고 지랄이야!?”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중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요즘 쭉 이상태다. 정확히 말해서 그 바이크를 사고 난 뒤로 재영은 눈에 띄게 자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형, 혹시 그 인간한테 뭐 빚진 것 있어요?” “…자헌이가 뭐?” 재영은 한동안 한중이를 쳐다보더니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한중이도 더 이상 따져 묻지는 않고 슬쩍 고갯짓으로 무흠이 쪽을 가리키며 나직하게 묻는다. “예자헌 하고 연무흠 저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인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재영은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사이? 둘이 뭔 짓 했어? 요즘 좀 친해진 것 아니었나?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한중은 답답하다는 듯이 갖은 인상을 쓰며 혹시라도 무흠에게 들릴까 목소리를 낮춘다. “형 요즘 저 두 사람 같이 있을 때 이상한 것 못 느꼈어요? 분위기가 아주….” “너 어디서 이상한 만화책 주어 읽은 것 아니냐?” 재영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 아닌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니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건지 재영은 우선 그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자헌이야 원래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오해받을만한 행동을 곧 잘 한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도….” “저 녀석들이야. 워낙에 눈에 띄니까 같이 있으면 그래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곡해해서 이상한 생각 하는 것은 그만둬! 네 눈에 저 녀석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한중이 너 혹시라도 엉뚱한 소리 하고 다니다가 나한테 걸리면 반 죽는다.” “내가 저 인간들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닐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냥 형도 나처럼 느끼는지 궁금해서 물어 본 것뿐이란 말입니다.” 소리를 최대한 낮춘 한중은 억울함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제야 재영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쩌면 한중이 보다 재영 자신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건지도 몰랐다. 요즘처럼 특히 까딱하면 브레이크를 걸어오는 자헌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던 것 같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서…. 어디 돈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 건수 없냐?” 순순히 사과하며 재영은 튼실한 한중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바이크 산 것 때문에 그래요? 설마, 사채 같은 것 끌어 쓴 건 아니죠?” “그 놈들이 고등학생에게 잘도 돈을 빌려주겠다. 하긴 악랄하기는 이쪽도 그 못지않은 놈이지.” “…에?” 재영의 말에 한중인 정말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영은 그런 한중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시늉을 한다. “농담이야. 임마! 그나저나 아르바이트를 구하긴 구해야겠는데….” 막 5교시가 끝나는 종소리를 들으며 재영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수업에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어쩐지 한번 주저앉자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군가 재영의 뒤를 스쳐지나간다. 힐끔 돌아본 곳에서 무흠이 옥상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헌은 문득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의 기척을 느꼈다.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자헌은 녀석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쉬는 시간 소란스러운 복도 맞은편에서 무흠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폼이 어딘지 모르게 불량스러워 보여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자헌은 곁에 있는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무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며, 심장이 펌프질한다. 무흠은 자헌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려는 듯 날카롭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흠이 지나오는 길은 자연스럽게 길이 열린다. 아이들은 그가 가까이 오자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무흠에게 밀려났다. 자헌은 그 모습을 보고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의를 기울여 무흠의 표정을 살피면서 자헌은 왠지 ‘여어~’하고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친한 친구사이처럼 서로 지나치는 순간 어깨를 두드리고 싶었다. 시선이 부딪혔다. 무흠은 이런 식으로 시선이 마주치면 절대 먼저 눈을 돌리지 않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스쳐지나간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음순간 자헌의 팔이 무흠에게 틀어 잡혔다. 술렁거리는 주변의 동요를 느꼈지만 자헌의 신경은 온통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좁혀진 무흠과의 거리에 쏠려 있었다. “….” “…와.” 팔을 잡았을 때처럼 갑작스레 풀려난 자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힐끔 노려보아진 자헌은 친구들의 걱정스런 말류에도 불구하고 무흠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너무도 당당하게 후문을 통해 멋대로 하교 길에 오른 무흠은 잠자코 자신을 따라 나오는 자헌을 힐끔 돌아보았다. 수업 중에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온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 자헌은 예의 그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헬멧을 받아든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흠은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탄 채 자헌을 쳐다보며 눈짓했다. 뒤에 타라는 말이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무흠은 자헌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하고 있었다. 자헌은 문득 맨 처음 재영이 무흠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떠나던 날의 일을 기억해냈다. 수업을 빠지고 이대로 무흠과 함께 가면 이제 다시는 지금까지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무흠은 그제야 자헌을 돌아보자, 지독히도 불편한 얼굴을 한 자헌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라고 무흠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자 자헌은 쓰게 웃으며 헬멧을 뒤집어쓰고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자헌은 이걸로 두 번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예감을 했다. 무흠은 자헌이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바이크를 몰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적인 것에서나 실제적인 것에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무흠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자헌이 영화에서나 보던 사창가를 지나 러브호텔이 즐비한 골목으로 그리고 어느새 강변로를 달리고 있었다. 스스로 금기시 여겼던 일을 깨고 밖으로 나오자,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누군가가 정해놓은 안전지대 안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로 바이크를 몰고 이런 곳을 달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자유로움에 자헌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돌이킬 수 없다. 자헌은 이미 알아버렸다. 만약 돌아간다 해도 전처럼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제2장. 암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습한 공기가 대지에 꽉 들어차 있다. 래용이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방심한 순간 제대로 와서 박힌 주먹에 입안가득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씨발, 아프잖아! 씹새꺄!!!” 누가 때렸는지도 모른다. 그냥 눈앞의 낯선 얼굴에 주먹을 내지를 뿐이다. 흥분제라도 먹은 사람처럼 온몸의 피가 들끓는다. 미쳐 날뛰는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을 정도로 두들겨 패고 맞는 일 밖에 없었다. 최초에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다. 구역 다툼이나 누구누구의 복수라는 뚜렷한 계기도 없이 다만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끓어오르는 악의를 상대에게 전가하고 있을 뿐이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래용은 갈비뼈와 등줄기에 통증을 느꼈다. 울컥하고 신물이 넘어왔다. 제대로 들어온 발차기에 우선 숨쉬는 것부터가 고통스러웠다. 허리를 구부린 래용의 어깨를 어떤 놈인가가 찍어 눌렀다. 저만치서 다급하게 래용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쓰러지는 순간 손으로 땅을 짚고 그대로 돌진해 앞에 있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래용의 무게를 그대로 받고 뒤로 넘어갔다. 래용은 상대에게 올라탄 채 미친 듯이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느 순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옷이고 주먹이고 할 것 없이 온통 검붉은 색으로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깔고 앉은 놈은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죽은 듯이 쓰려져 있는 녀석에게서 떨어져 막 일어나려던 순간 엄청난 힘에 의해 래용은 저만치 쓰레기 더미위로 메다 꽂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웅얼거리는 소리에 래용은 간신히 눈을 떴다. 사실 죽고 싶을 정도의 통증에 신음을 참는 것만도 힘겨웠지만 누군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래용아? 야, 장래용. 살아 있냐!?” “씹… 그만 불러. 대갈빡이 깨질 것 같아….”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세상이 온통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싸움이 끝났는지 패거리들 대부분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상대하고 있던 놈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여튼 재빠른 것들이다. 래용은 몸을 굴려 쓰레기더미에서 굴러 내려왔다. 그제야 음식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씨팔, 개새끼들.” 입에 고여 있던 피를 뱉어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했다. 차츰 쓰러져 있던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래용은 얻어맞은 갈비뼈를 움켜쥐고 비척거리며 걸었다. “엄살 피우지 말고 빨리빨리 일어나 이 새끼들아!!” 래용은 옆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패거리를 발로 걷어차며 소릴 질렀다. 모두들 죽은 듯이 엎어져 있던 것에 비해서는 가뿐하게 ‘윽’하는 신음성과 함께 꾸역꾸역 일어나 앉는다. 하루하루가 이런 식이다. 의미 없는 싸움으로 점철된 생활에 슬슬 질력 나기 시작했지만, 도대체 다른 식으로 살아 본적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한번 길을 잘 못 들면 그것을 바로잡기란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고치고 싶다든지 변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변이 따라줘야 하는데 지금에 와서 뭔가를 해볼라치면 왠지 더 기분 나쁜 눈초리만 받게 된다. “제길….” 래용은 막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들은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들을 끌고 자리를 뜬다. 투덜투덜 뇌까리는 의미 없는 욕설을 들으며 래용은 다시 한번 침을 탁 뱉었다. 빌어먹을 세상이다. “어이, 앞에 가는 아가씨 같이 좀 갑시다.” 센스 없는 검은 우산으로 상대를 알아본 래용이 놀리는 듯한 어조로 앞서 걷는 녀석에게 농을 걸었다. 움찔하고 멈추어선 우산이 천천히 뒤를 돌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촌스러운 안경을 쓴 남자가 보였다. 래용은 비를 쫄딱 맞으며 말벌처럼 날렵한 자신의 바이크를 끌고 양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전설의 2대 8 가르마를 21세기인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이 남자는 래용의 소꿉친구인 홍양우라는 이름의 괴짜였다. 장래 희망이 아마… 보기만 해도 질질 쌀 것 같은 섹시한 여자가 주인공인 만화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처음 래용이 그 말을 들은 것은 사정의 의미도 모르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꽤나 순진했던 래용은 그게 뭐냐며 역시나 순진했던 친구들과 함께 실컷 양우를 놀려 댔다. 그 당시 놀림을 받으면서도 양우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녀석이 왜 웃는지 짐작조차 못했던 래용이었다. 나름대로 한 순진 했다니까. 고 3인 지금 양우는 자신이 말했던 그 꿈에 한발자국 다가가 있었다. 래용이 장래는커녕 바로 내일 일어날 일도 짐작할 수 없는 오늘을 살고 있을 때, 양우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작년에는 만화 잡지에 데뷔까지 했다. “또 싸웠냐? 얼굴이 말이 아니네. 어? 오토바이 찾은 거냐?” 큰 우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같이 쓰자는 말 한마디 없이 양우는 래용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나열했다. “어떤 겁 없는 개새끼가 팔아먹으려던 걸 현장에서 붙잡아서 다시는 그런 짓 못하도록 팔목을 부러뜨려줬지.” 흩날리는 듯이 뿌려대는 가랑비 때문에 젖어든 얼굴을 훔쳐내며 래용이 소리를 높여 웃었다. 체인도 감아놓지 않고 멋대로 굴리다가 잊어버린 것은 생각도 않고 아주 기고만장이다. 근 며칠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체인을 하지 않는 것을 아는 양우는 한껏 흥분 한 래용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어떻게 찾았는데?” “그게 말야. 그 악마 놈 패거리들 중에 어떤 녀석의 도움을 받았달까. 정보를 얻었달까.” “뭔 소린지 원.” 양우는 횡설수설하는 래용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래용은 팸플릿을 건네주었던 그 패거리 치고는 꽤나 성실해 보이던 녀석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번도 직접 본적은 없지만 양우 역시 연무흠 패에 관해서라면 빠삭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래용과 만나기만 하면 그 녀석들에 대한 험담을 듣게 되니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말만 들어도 상대의 이름정도는 맞출 수 있을 정도이고, 별도의 루트를 통해 그들에 대해 듣고 있기도 했다. 연무흠과 장래용은 앙숙이었지만 양우가 보기에 래용은 연무흠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일일이 적대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평소 래용은 연무흠에 관해서만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과민반응을 했다. 저 두 사람은 친구가 되지 못하면 적이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비슷한 면이 있었고, 서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튀는 상대이기도 했다. “어떤 녀석이라면 …천재영?” 양우는 얼마 전에 새로 연무흠의 패거리에 들어왔다던 녀석의 이름을 거론했다. “아니 그 녀석은 아냐. 덩치 큰 1학년하고 재영이 놈을 밟던 중에 나타났으니까. 그 녀석이 천재영 일리 없지. 뉴 페이스야. 어떻게 봐도 싸움꾼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래용이 알고 있는 악마 녀석들이라면 만약 그 오토바이가 래용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해도 친절하게 그 사실을 본인에게 알려줄 놈들은 아니었다. 대놓고 놀리거나 비웃었으면 비웃었지.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럼 혹시 예자헌!?” “내가 이름 따위 알 리가 없잖아?” 래용은 어떻게 알아내는지 직접 마주친 자신보다 항상 더 많이 알고 있는 양우를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한번 본적도 없는 놈들의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항상 말을 할 때마다 대뜸 이름부터 튀어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래용이었다. “하긴… 네가 알고 있을 리 없지. 자자 우산 씌워 줄 테니까 기분 풀어.” “됐어!! 필요 없어. 짜샤!” 이미 젖을 대로 다 젖은 머리위로 들이미는 우산을 쳐내며 래용은 화를 냈다. 팔팔한 반응에 놀리는 보람을 느낀 양우는 두꺼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유들유들 웃는다. “단순한 게 네 장점이지. 그나저나 오늘도 집에 안 들어 갈 거면 와서 지우개질이라도 하지 그래?” 사람 열 받게 하는 말을 태연히 늘어놓은 양우는 단편 원고 하나가 마감이라며 은근히 래용에게 돕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것이 핑계이고, 래용이 지우개질 하는 것 이외의 좀더 섬세한 작업에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거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래용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슬쩍 도피처를 만들어주려는 양우 나름의 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래용 역시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버팅기곤 한다. “그게 부탁하는 놈의 태도냐.” “재워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갈 데도 없는 녀석이 허세만 늘어서.” 래용의 투덜거림에 양우는 혀를 차며 한껏 빈정댄다. “씹! 쉬지도 못하게 일만 부려 처먹을 거면서 더럽게 생색내기는” 잠들만 하면 커피 끓여 와라, 잠들만 하면 자료 좀 찾아봐라, 래용은 시키는 게 많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리고 있지만, 사실 밤새 깨어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양우라는 사실은 잊은 모양이다. 갈 곳 없는 친구 녀석의 자존심을 생각해주던 양우도 여기까지 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폭력(주먹)에는 폭력(언어)으로 대처하는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래용의 저 말을 그냥 들어 넘길 리 없다. “적어도 그 늙은 마녀한테 잡혀 먹히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설마, 그 유부녀 손이 그리워진 것은 아니겠지?” 신랄하게 말을 하고나서야 표정을 굳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람에게는 건드려지고 싶지 않은 일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는 법이고 래용에게 있어서 저 주제는 금기였다. 항상 양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래용이 정해놓은 선을 넘어온다. 그게 금기라는 것을 알아도 단 한번도 래용의 입으로 사실 확인을 받지 않은 그것을 태연하게 입밖에 꺼내놓았다. 꿈틀거리는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스멀거리는 혐오감에 래용의 표정이 구겨졌다. 오늘은 이상하게 특별히 신경이 날카로운 날이다. 아직도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고 안에 가두어두고 있던 게 터져나갈 것 같이 되었다. 래용은 곪은 종기를 태연하게 손으로 눌러 짜버리는 양우에게 화가 났다. 아니 지금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의 환경에 역겨움을 느꼈다. “씨팔, 너 죽고 싶어!?” 래용은 양우의 우산을 쳐내고 그대로 멱살을 잡아챘다. 눈을 뒤집어 깐 채 으르렁 거렸지만 실상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울분이었다. “…찔리는 게 없다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닐 텐데.”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양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 순간 래용은 소리가 날정도로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어쩌면 이건 말로 내려진 단죄. 피의 고리처럼 끊어지지 않고 연결 된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의 입구였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래용은 어딘지 모르는 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점점 굵어지는 비를 맞으며 웅덩이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돌진했다. 빗줄기가 사정없이 몸을 때렸고 그것은 날카로운 침이 되어 온몸을 아프게 했다. 신경을 찢으며 온몸을 돌고 있는 저주받은 피가 래용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이곳엔 폭주를 막거나 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팅 빈 공간 속으로 질주하다 수많은 골목 중에 어느 골목에서인가 비에 젖은 부드러운 흙에 미끄러졌다. 이윽고 굉음이 멈추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몸속을 달리는 통증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뜨자 슬로우 모션처럼 눈앞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차츰 몸의 감각이 돌아오면서 요란한 빗소리가 들리자, 래용은 힘겹게 눈을 뜨고 기묘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으… 아아아아악!!!” 방금 전 불문명한 사고의 흔적은 시간의 강 속에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슴속 가득 들어찬 격렬하게 회오리치는 상념에서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길 바랬다. 차가운 빗줄기를 얼굴로 맞으며 래용은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의 기억은 배고픔. 살기 위한 순수한 본능이었을까. 아이의 눈앞에는 아무리 불러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기어 다니는 것들… 손을 뻗어 작은 손가락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달아나려는 듯이 아이의 작은 손가락 안에서 꿈틀거렸다.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기에 아이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지만 배고픔이 손안에 잡힌 그것을 입안으로 집어넣게 했다. 허억-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자 누군가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고, 그 너머로 낯선 풍경이 보였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말끔한 얼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연무흠?” 그제야 무흠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뭐야?” 낮게 끌리는 듯한 목소리가 탁하게 흘러나왔다. 자헌은 일단 눈은 떴지만 아직도 정신없어 보이는 무흠을 내려다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얼굴은 괜찮은 거냐고 묻고 있었다. 당혹감이 서린 예리한 눈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는 무흠의 시선을 마주본다. 그제야 무흠은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었는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베고 있었던 것은 자헌의 허벅지였다. “지금 몇시야?” 끝이 갈라진 음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악몽 탓일까 머리를 짓눌리는 듯한 약한 두통이 계속되자 무흠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억… 안 나는 건가?” 몹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자헌이 되물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사람의 인기척 따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멀지 않은 곳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로 보아 어느 주택가근처의 공원인 듯 했다. 겹겹이 둘러싸인 나무와 화단이 사람들의 기척을 막고 있었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나무의자는 그렇지 않아도 차단된 공원에서 더욱 소외되어 있었다. 저만치의 가로등 불빛은 겨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무흠은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자헌의 허벅지로 머리를 내렸다. 자헌의 당황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태연하게 그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아….” “무슨 대답이 그래?” 건성인 대꾸에 자헌은 쓰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어쨌든 오늘 좀 놀랐다. 너 평소에도 누가 시비 걸면 무조건 패고 보냐? 위험해. 오늘처럼 갑자기 떼로 몰려 와서 덤비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감당 못할 텐데.” “걱정해 주는 거냐?” “글쎄… 어떨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말릴 새도 없이 다대일의 패싸움으로 변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자헌은 말끝을 흐렸다. 그 쪽에서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시비를 건 것이니 칼부림이 났다 해도 그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남이야 맞아 죽든 말든 태연하게 구경하고 있었던 주제에.” “그래도 살인은 말려 줬잖아.”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흠의 불만을 일축했다. 정말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자헌이 말리지 않았다면 무흠은 반쯤 미쳐서 들고 있던 각목을 시비가 붙었던 상대의 입안에 찔러 넣을 기세였다. 워낙에 미친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내 놓아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무기를 든 무흠의 팔을 잡은 순간 자헌은 땅바닥에 메다 꽂혔고 시간차도 두지 않고 날아온 주먹을 간신히 막아냈다. 덕분에 아직도 팔이 욱신거린다. 자헌은 그때 무흠이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낙법을 배워두지 않았으면 지금쯤 뼈가 부러진 채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게 분명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이다. “너 때문에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어.” 무흠은 자헌의 그런 곤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아래쪽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평소 미칠 때까지 폭주해 싸움으로 흥분을 풀어버렸던 무흠은 이번 사건의 뒤 책임을 자헌에게 물었던 것이다. 어지간히 뻔뻔스러운 녀석이다. 자헌은 멋대로 자신의 무릎베개를 배고 응시해 오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해줘!” 순간 자헌은 숨쉬는 것도 잊고 무흠의 날카로운 눈을 직시했다. 심장이 펄떡이며 가슴을 두드려대는 것을 느끼며 자헌은 어딘가 냉정한 얼굴로 비릿하게 웃고 있는 무흠을 내려다보았다. “….” “해줘. 너 때문이잖아?” “너 정말…. 평소에도 그리 상식적인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무가내인 말에 자헌은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벌리고 앉은 무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네어귀에서 무흠과 헤어진 자헌은 인적 없는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자헌은 몇 번이나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있었다.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향 냄새가 입 주변과 손가락에 남아있었다. 그럴 때마다 리얼하게 입안을 점령하고 있던 그것과 얼얼하게 아려오는 턱, 그리고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가락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 무른 걸지도….” 자헌은 다시 한번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색다른 자유가 있을 것 같던 무지의 세계는 실상 의미 없는 폭력과 제멋대로의 아집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자헌은 무흠이 뿜어내던 젊음의 혈기가 과히 싫지 않았다. 연무흠의 어딘지 핀트 어긋난 정서에 동조하고 상식 밖의 행동에 맞춰줌으로 해서 자헌은 묘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타인이라기엔 지나치게 가까웠고 친구라기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도는 그런 미묘한 위치말이다. 더불어 자헌이나 무흠은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손안에 사정을 두게 된 것이다. 자헌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올려 다 본 재영의 방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자헌은 걸음을 멈추고 창을 올려다보다가 근처 화단에서 주운 작은 돌로 창문을 노크했다. 「탁탁」몇 번인가 유리창에 부딪혀 소리가 나자 드르륵하고 창문이 열리고 재영의 찌푸린 얼굴이 자헌을 내려다보았다. “예자헌…. 지금이 몇 신줄 알아?” “아직 12시밖에 안된 것 같은데. 웬일로 재영이 네가 이 시간에 자고 있냐?” 잠결에 잔뜩 잠긴 재영의 투덜거림에 자헌은 희미한 불빛에 시계를 비춰본 뒤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제야 재영은 웃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자헌을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기분 탓인지 뭔가 달라보였다. “잠깐, 내려갈 테니까. 기다려!” 재영은 창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현관에 불을 켜고는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구겨진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채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오는 재영의 모습에 자헌이 웃음을 지었다. “어라? 아직도 교복이네? 어디 갔었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재영은 낮에 학교에서 본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자헌을 아래위로 쳐다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소 자헌의 스케줄을 볼라치면 이 시간쯤에는 집에 한번 들렸다가 과외를 하든지 학원을 갔다 오는 시간이니 교복을 입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헌은 재영의 그런 지적을 싹 무시해버리고 조용하기만한 재영 등 뒤의 집 쪽으로 시선을 둔다. “집에 아무도 없냐? 아저씨는?” “이번에 또 무슨 강력사건이 일어났다나 어쨌다나 며칠째 코빼기도 못 봤으니까.” 재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은 뒤 갑자기 인상을 쓰며 자헌에게 다가들었다. 평소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듣는 쪽은 언제나 재영이 쪽이다. 그런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귀찮게 굴던 자헌이 틈을 보인 것이다. 흔치 않은 이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재영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묻는 말은 어디다 팔아먹고 딴 소릴 하게 만드는 거야? 너 지금 들어오는 것 맞지? 네가 뭘 하다가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어슬렁거리는데? 지금까지 누구랑 뭐 했어? 설마…” “아아…” 어설프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자헌을 보며 재영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그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렸다. 순간 어딘지 불편한 움직임으로 손바닥 안에 닿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사이이다. 이 정도의 가벼운 스킨십에 자헌이 몸을 사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재영은 자헌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뭐야? 나한테는 밤늦게 다니지 말라는 둥 시끄럽게 설교나 해대던 녀석이. 그래, 누구랑 어디서 놀다온 거야?” ‘나를 빼고’라는 원망을 잔뜩 집어넣은 추궁에 자헌이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선다. “그게 무흠이랑….” “뭐야? 너 또 무흠이랑 있었냐? 언제 그렇게 친해 진거야? 나야 그 녀석 패거리들하고 어울리면서 싸움을 한다지만 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둘이 뭐하고 돌아다니는데?” 재영의 말대로 요즘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만 따로 행동하는 일이 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특별히 친한 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보면 저 두 사람만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재영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트러블 메이커 덕분에 괜한 싸움에 말려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지만 재영은 그런 자현을 곁눈질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자헌, 그 녀석한테 나 모르는 약점이라도 잡혔냐? 어째 너 답지 않게 이상하다?” 재영의 추궁에 자헌은 픽하니 웃어버린다. 아니 오히려 별 싱거운 소리 다 듣는 다는 듯 혀까지 차며 재영에게 면박을 주었다. “괜한 사람 두고 엉뚱한 상상하지 말고 네 약점이나 잘 추슬러. 너 또 밤에 몰래 오토바이 몰고 나가면 이번에야 말로 키 압수한다.” “자식 깐깐하기는 너 오늘도 나 나갔을까봐 확인하려고 불러낸 거지? 치사한 새끼. 예자헌 너 그렇게 살지 마라.” 바로 얼마 전, 한밤중에 몰래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가 꼬리를 밟힌 재영은 새벽녘까지 잠 안자고 기다리고 있던 자헌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자헌은 그런 재영을 보며 어둠 속에 선채 소리죽여 웃는다. “있는 것 봤으니까 됐다. 들어가서 자라 깨워서 미안하다.” 자헌은 손을 뻗어 엉망으로 삐친 재영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 때문에 잠 다 깼어. 임마! 제길… 어떻게 할래?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들어와. 재워줄 테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재영이 자헌을 청했다. 그런 재영의 말에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그냥…. 지나가다 생각나서 불러낸 거야. 올라가. 나도 들어갈 테니까.” 자헌은 낮게 말이며 어둠에 잠겨 있는 재영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어디까지나 애정 손짓이었고 재영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예자헌, 너무 무리하지 마라.”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고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재영의 말을 일축한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외와는 다른 무관심에서 자라 그것에 익숙해진 자헌은 어른스러운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외로움 따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집안에서 성장했기에 초연해보이지만 그만큼 어느 구석은 한없이 약했다. 철들 무렵부터 그런 자헌을 보고 자란 재영이었으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헌이 품고 있는 생각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는 자헌의 뒷모습을 재영은 한참을 지켜보았다. 재영은 누군가 자헌의 이 빈틈없는 겉모습을 깨부수고 그 안에 감추어진 본 얼굴을 꺼내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미지수였고 재영 자신이 지금의 자헌에게 위로 받고 보호받는 입장이었으니 나서서 깨부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러진 팔목에 깁스를 하고 뻐근한 근육통에 신음을 삼키며 래용은 탈력감에 병원 근처의 시민공원 층계참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다친 것도 다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당분간 오토바이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앞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풀어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특히 뻔뻔스러운 얼굴로 치료비를 내고 가며 집에 좀 들어오라던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신물이 넘어왔다. 이 모든 게 쓸데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 화를 부추긴 양우 그 녀석 탓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사흘을 누워있는 동안 겨우 문병 한번 오고만 그 녀석에게는 원한이 깊었다. 볕 좋은 휴일이라 눈 닿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넘쳐났다. 래용은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탁하니 침을 뱉어냈다. 스멀거리는 듯한 불쾌감이 뭉글뭉글 솟아났다. 멀쩡한 한손을 뒤로 짚으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얼굴을 들어올렸다. 얼굴 구석구석 닿아오는 따사로운 느낌에 등 뒤로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 순간 긴 그림자가 따갑게 내려 꽂히던 햇볕을 가로막고 선다. 눈을 뜨고 상대를 쳐다보자 어딘지 낯이 익은 남자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래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바이크는 찾았습니까?” 오토바이 이야기가 나오자 래용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아아….” 단정한 얼굴이 아니더라도 묘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잃어버렸던 오토바이를 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녀석이니 잊을 리 없지 않은가. 적이 분명할 텐데도 왠지 자신들의 반목과는 무관하다는 얼굴을 하고 태연하게 다가오자 시비를 걸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래용은 나른하게 붕대가 감기지 않은 손을 들어보였다. “덕분에.”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웃는 얼굴 어느 구석에도 숨겨진 사심 따위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못내 미심쩍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요즘 연무흠과 함께 있는 것을 몇 번인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직 실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연무흠과 함께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녀석은 여러 패거리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조만간 연무흠에게 적대적인 패거리들과 얽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래용이 속해있는 그룹도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래용은 충동적으로 상대에게 이름을 물었다. 알고 싶다기보다는 아무런 말도 없는 상태가 왠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자헌입니다. 그쪽은?” “장래용.” 사납게 치켜뜬 눈을 세모꼴로 뜨고 쳐다보는 대도 예자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녀석은 쪼는 기색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무서움을 모르는 건지 래용 정도는 무섭지 않다는 건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반갑습니다.” 짧게 아래위로 팔을 흔든 뒤 타이밍 좋게 쥐었던 손을 놓아준다. 오랜만에 옛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자헌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게 이렇듯 자연스러운 것 같다. 태연하게 얼굴만 한번 본 상대에게 말을 걸고 딱 그만큼만 들어오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색함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래용은 빛을 등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헌을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보았다. 교복을 입지 않은 것만으로도 묘하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다.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래용은 결국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자헌 역시 아무 말 없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며 래용에게 다시 볕을 돌려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신경이 온통 곁에 서 있는 자헌에게 향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저만치서 낯이 익은 오토바이가 달려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래용은 자신도 모르게 입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렇게나 기른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과 희멀건 한 얼굴 그리고 은색의 혼다. 연무흠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굳히는 무흠과 마찬가지로 래용 역시 좋은 얼굴은 하고 있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슥 하고 자헌이 연무흠에게 다가가며 시선을 차단한다.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타이밍 하나는 죽여주게 좋은 녀석이다. “헬멧 쓰라고 했지.” 바람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무흠의 머리카락을 보며 자헌은 항상 하던 대로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무흠이 던진 헬멧은 받아들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귀찮게시리.” 무흠은 곧은 다리로 오토바이를 지탱하고 선채 거만하게 툭 내뱉는다. 험악한 시선이 아니라도 뒤쪽에 앉아 있는 래용을 유난히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흠이나 래용이나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거슬려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패거리들 간의 분쟁이외에도 둘은 어딘가 반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닮아서 일까. “저건 뭐야?” 무흠은 사나운 시선을 자헌의 뒤쪽으로 보내며 이를 드러낸 채 이죽거렸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선객이야. 설마, 다친 사람하고 싸우려는 것은 아니겠지?” 평소의 패턴으로 보아 그대로 두면 한 두 마디 욕설이 오간 후에 금세 폭력을 휘두를 게 분명했다.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연무흠이 다리로 버티고 있는 바이크 뒷좌석에 올라타며 자헌은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렸다. “출발하자.” “귀찮은데 재껴버릴까.” 시큰둥한 어조로 무흠이 뒤에 올라탄 자헌을 힐끔 돌아본다. 얼마 전부터 재영이 뒤 배경이 의심스러운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극구 반대하는 자헌의 멱살을 부여잡고 한중이 반 협박조로 재영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일 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중이 잘 아는 곳이었고 재영의 근무 타임이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끝나는 것을 이유로 고집을 꺾긴 했지만, 그래도 노심초사하는 자헌의 닦달에 질린 재영이 한가한 시간을 골라 한번 왔다가라고 한 것이다. “웃기지마. 너 때문에 영화 보다말고 중간에 나왔어.” 자헌은 무릎으로 밀착되어 있던 무흠의 다리를 힘주어 조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이상하게 번번이 무흠에게 영화보기를 방해 받고 있었다. 특히 며칠 전에 무흠에게 강제로 건네받은 작은 핸드폰은 자헌에게 있어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다. 건네주며 했던 말도 ‘연락 받으면 바로 튀어나와!’였으니 더 말 할 것도 없다. 나오란다고 족족 달려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용건은 무시하고 자시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 막 출발하는 순간 자헌은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인상 사나운 녀석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무흠의 오토바이는 한순간 중앙선을 넘어갔다가 사고 직전에 본 차선으로 되돌아왔다. 무흠이 자헌을 돌아보며 뭔가 험악하게 소리쳤지만, 헬멧을 쓴 덕분에 웅얼거리는 소리 밖에 들을 수 없었던 자헌은 자동인형처럼 뒤를 돌아보는 무흠의 고개를 계속해서 앞으로 돌려놓았다. 뭐가 불만스러운지 잔뜩 인상을 긋고 있는 무흠을 끌고 자헌은 재영이 아르바이트하는 클럽에 들어섰다.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한쪽 벽면을 따라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었고, 노래방 기계와 포켓다이까지 아주 골고루 갖추어놓은 개념 없는 클럽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상당히 장사가 되는 곳이라던데 이래서야 무슨 장사를 어떻게 하는지 의심스럽다. “어? 왔네.” 바(bar)에 붙은 쪽문으로 재영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나타나자 그 뒤로 덩치 큰 남자가 맥주박스를 들고 들어선다. “무흠이 오랜만이다. 그동안 왜 뜸했냐? 아, 옆이 그 유명한 재영이 친구? 반갑다. 한중이 사촌형 되는 한계춘이라고 한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사교적인 인물인지 남자는 박스를 내려놓고 반갑게 그들을 맞는다. “안녕하세요.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재영이 친구 예자헌입니다. 그런데 저 친구도 이 곳에 자주 옵니까?” 자헌 역시 사교적인 얼굴로 말을 받으며 고갯짓으로 무흠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때 죽돌이였지. 그때가 벌써 이년 전인가? 아, 세월 참 빠르구나.” 이년 전이면 고 1때가 아닌가. 자헌은 단꿈에 젖어 있는 개념 없는 듯한 주인 남자는 내버려두고, 그 나이 때부터 이미 술집 출입을 해왔던 게 분명한 무흠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프리.” 귀찮은 얼굴로 자헌의 눈초리를 무시해버린 무흠은 재영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들 어떻게 생겨먹은 신경을 가지고 있는 건지. 하긴 네 녀석들이 미성년자라는 자각이 있을 리 없지만.” “알면서 뭘 물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무흠은 재영이 내 놓은 병맥주를 입가로 가져다 댄다. 자헌은 스툴에 걸터앉아 어두운 조명 탓에 더 깊어 보이는 무흠의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무흠 역시 다리를 꼰 채 흐트러진 폼으로 반쯤 바에 몸을 기댄 채 자헌의 시선을 즐긴다. 무흠과 자헌의 사이는 딱히 어떻게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엄밀히 말해 자헌은 친구라고 할 수도 없고 무흠을 쫓아다니는 패거리에도 속해 있지 않아 공중에 붕 떠있는 상태였다. 그런대도 무흠은 막무가내로 어딜 가든지 자헌을 달고 다니려고 했고, 그것은 자헌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도 이상한 일인 듯 몇 번인가 받은 질문을 되새기며 자헌은 무흠을 곁눈질 했다. 얼마 전 그 일이 있고부터 무흠의 안에서 자헌이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예속된 어떤 것이라고 정해진 듯 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곤란한 요구를 받고 있었지만, 그것에 어떤 사심이나 끈적거림도 없었기 때문에 자헌은 또 그 나름대로 납득하고 만 것이다. “마셔!” 자헌은 사양하지 않고 재영이 짓궂게 웃으며 내준 맥주를 끌어당겼다. “뭔가 뒤가 구릴 것 같은 이런 곳에서 일해도 괜찮아? …변제해줄까?” 뒤가 구린 것 아니냐는 말에 커다란 물색의 잔을 닦고 있던 계춘이 헛기침을 해댔지만, 자헌이나 재영 두 사람 다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잇는다. “말리지마. 나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자헌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아저씨한테 걸리진 마라.” “걱정 마. 그 인간 요즘 바빠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아.” 재영이 히죽 웃으며 말하고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으러 자리를 떴다. 자헌은 경쾌하게 걸어가는 재영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스치듯이 무흠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대로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자헌이 손을 털면서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무흠이 한 떼의 인상 고약한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또 언제나의 패턴인가 싶어 혀를 차며 재빨리 무흠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당장 주먹을 휘두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남의 영업집에서 싸우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볼 일이다. “무슨 일이야?” 자헌이 다가서자 무흠을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 중 한 놈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헌을 훑어보았다.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그 눈초리를 받고서야 자헌은 그들이 간혹 무흠과 시비가 붙곤 했던 그냥저냥 한 양아치들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차리고 순간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긴장했다. “일행이냐?” 그들이 자헌에게 흥미를 보이며 다가들자, 그때까지 느긋하게 바에 팔꿈치를 대고 늘어져 있던 무흠이 무의식중에 자헌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자헌에게 되돌려졌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불쾌한 눈초리로 자헌을 훑어보던 패거리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뒤 나직하게 혀를 차는 무흠을 향해 이죽거렸다. “웬일이냐. 연무흠이 친구씩이나 달고 다니고?” 둘러서 있던 무리 중 누군가가 떠보는 게 분명한 은근한 어조로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곱지 않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무흠이 녀석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험악한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자헌은 잠자코 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헌뿐만 아니라 클럽안의 누구도 그들의 시비에 끼어들지 않았다. 무흠이나 상대 패거리들 중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 곳에서는 제 삼자는 개입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치고받는 싸움 역시 금지였다. 그것이 이 클럽의 유일한 불문율이었다. 평소의 무흠을 잘 알고 있는 자헌은 용케도 참고 있는 녀석을 보며 쓰게 웃었다. 분명 있는 대로 난동을 부리고 싶을 테지만 녀석에게도 최후의 보루는 있는 모양이다. 물론, 참으면 참을수록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사나운 얼굴에서는 심상치 않은 뭔가가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짓 하면 죽인다.” 이 갈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딱딱 끊어지는 말투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욱 악랄하게 들렸다. 하지만 뺀질거리게 생긴 상대는 그런 무흠에게 익숙한 듯 쪼는 기색도 없이 곁에 서 있던 자헌의 어깨위로 태연하게 팔을 걸치고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도발한다. “호오~ 역시 이 쪽이 요즘 데리고 다닌다는 그 친구인건가?” “….” 자헌은 부담스러울 만치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을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상대방은 위축되지도 않고 태연히 서 있는 자헌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희미하게 눈썹을 꿈틀댔다. “경고했을 텐데, 연무흠. 누군가 곁에 둘 때는 조심하라고. 그게 누구든지 네 놈 눈에 든 상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 기억할 테지?” 그때 이제까지 팔짱을 낀 채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시멘트 바닥을 곡괭이로 긁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팽팽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굵은 목 중앙의 흉터로 보아 성대를 다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남자는 두 손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패거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위압적인 덩치도 그렇지만 어딘지 쓸쓸한 인상의 차가운 눈동자가 무흠과 마주치자 위험하게 빛났다. 파릇하게 깍은 짧은 머리카락 속과 잘생긴 얼굴 여기저기를 작은 생채들이 덮고 있었다. “안형진.” 남자의 출연에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무흠의 표정이 일변했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하게 변했다. 짧은 순간 모든 감정이 안으로 갈무리 되어 그 곳에 있는 연무흠은 더 이상 자헌이 알던 그 무흠이 아니었다. “이런이런 연무흠. 그때와는 반응이 다른 걸? 여전히 연기가 서툴러. 하지만 좋은 현상이야. 곁에서 누가 죽어나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 너무 재미없잖아!?” 안형진은 탁하게 웃으며 친근한 척 어깨위로 손을 올리자 무흠은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며 말없이 손을 쳐낸다. “그런 짓을 했다간 이번에야 말로 그 쓸모없는 눈깔을 파내주지.” “나만 이라면 불공평하잖아. 너 역시 네 것을 잃어야지 않겠어? 잃는다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네게도 느끼게 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무흠의 협박을 어깨 한번 으쓱거리는 것으로 받아넘긴 안형진은 그 쏘는 듯한 시선을 자헌에게 돌린 채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이, 그만 하면 됐어. 더 하고 싶으면 따로 밖에 나가서 너희들끼리 해.” 이들의 과거를 짐작케 하는 심상치 않은 대화가 나오자 그제야 느긋하게 담배 꼬나물고 있던 한계춘 사장이 끼어들었다. 잡아 죽일 듯이 서로에게 털을 곤두세우던 두 사람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그도 그럴 것이 계춘의 경고를 무시하는 녀석들에겐 ‘조직의 쓴맛’이라는 것을 직접 맛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무흠과 안형진이 간단히 물러서자 자헌을 둘러싸고 있던 패거리들 역시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자유롭다면 자유롭고 방종하다면 또 그런 분위기를 풍기며 클럽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끌어안고 난잡한 춤을 추는 사람들로 사실 클럽 안은 소란의 도가니 같은 상태였다. “괜찮냐고 묻는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뚱한 얼굴로 바(Bar)에 팔꿈치를 대고 앉아 있는 무흠의 옆자리에 앉으며 자헌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제야 무흠은 힐끔 자헌을 곁눈질 하더니 앞의 소동 탓에 김이 다 빠진 맥주 맛에 인상을 쓰며 투덜댄다. “멀쩡하구만.” “물론 멀쩡하지. 다만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안부를 묻는 정도의 예의를 좀 가르쳐 주고 싶었을 뿐.” 있는 대로 기분 나빠 있는 무흠에게 과거에 안형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자 대답 안할게 뻔했기에 자헌은 시간을 확인한 뒤 바쁘게 움직이는 재영을 향해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가지마. 옆에 있어.” 그 와중에도 무흠은 민감하게 자헌의 기척을 눈치 채고 나직이 중얼거린다. 완전히 제멋대로인 요구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헌은 다시 스툴 위로 엉덩이를 내렸다. “언제 왔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금방이라도 녹을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자헌은 시야 한구석으로 하얗고 긴 팔이 나긋나긋하게 무흠의 목을 감기는 것을 보았다. 시선을 들었을 때 그곳에서는 진한 키스신이 연출되고 있었다.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흠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과장되게 혀를 얽는 여자를 지켜보았다. 무흠과 관련된 일에 한해 자헌은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결코 놀라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 사이의 관계의 도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의미였는데 두 사람의 역할 관계에서 자헌은 지켜보는 쪽이었다. 조명 탓인지 원래 그런 건지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거의 걸쳤다고 볼 수 없는 야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옅은 갈색의 짧은 파마머리가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분명 그럴 의도를 가지고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로 춥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유혹하곤 달라붙어 있던 무흠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관객이 된 자헌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구?” 다른 사람이 했다면 천박해 보였을 행동이 그녀가 하자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헌은 천진하게 웃는 여자에게 미소를 되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예자헌.” “어울리는 이름이네. 맘에 들어.” 여자는 가늘고 긴 팔을 뻗어 자헌의 까만 머리카락을 몇 가닥 쥐었다. “유혹하지 마. 그 녀석은 안돼.” 여자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고 무흠은 자헌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하얀 손을 저지하며 낮게 말했다. “왜, 안돼? 혹시, 네 것이야?” 아이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묻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무흠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무흠은 자헌을 힐끔 한번 곁눈질 했을 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답이 되었는지 여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헌을 쳐다본다. 그녀의 그런 백치미마저 느껴지는 기묘한 아름다움에 자헌은 스툴에 앉아 손발을 늘어뜨린 채 손가락 깍지를 낀 느긋한 자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두 사람의 관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섹스와 파트너를 공유하는 사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서로를 구속하지도 않고 거리낌도 없는 묘한 감각의 소유자들이 분명했다. “….” 무릎에 올라앉아 음악에 맞춰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며 여자는 무흠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 속삭인다. 그러자 무흠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며 눈을 치켜뜬 채 자헌을 마주보았다. 그 지나치게 노골적인 키스신을 당연하게 지켜보면서도 자헌은 별달리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지켜보는 자’ 특유의 마음가짐으로 자헌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신을 완전히 분리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섹스 하러 갈 건데.” “아아….” 익히 예상했던 말에 자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 속으로 지금 출발하면 마지막 상영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무흠은 그런 자헌의 생각을 아는지 손을 뻗어 팔을 움켜쥐며 말한다. “너도 가는 거야.” 무흠이 그 미형의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민 채 새빨간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는 모습에 자헌은 현기증을 느꼈다. 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고 생각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무흠의 그런 무리한 요구를 웃으며 들어주고 마는 자헌 자신이었다. “…설마, 그런 프라이빗 한 행위까지 보게 할 셈이냐?” “봐줘.” 어이없어 하는 자헌을 아랑곳 하지 않고 팔을 잡아끈다. 아무래도 그 동안 예자헌의 포용력이 지나치게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가끔 네 머리를 갈라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건 언제든지 네가 원할 때….” 무흠은 한숨을 내쉬는 자헌의 어깨를 밀어 앞장세우며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셋이 해도 좋아.” “그건 안돼.” 무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귀여운 머리를 어깨에 기댄 여자가 물기어린 눈동자를 자헌에게로 향하며 말했지만, 그 위험한 제안은 무흠에 의해 즉각 거부당했다. “욕심쟁이.” “저건 내거다.” “맛만 보는 것도 안돼?” “그래놓고 빼앗아 가려는 것 모를 줄 알고.” 자헌은 본인을 앞에 두고 잘도 멋대로 떠들어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으로 재영을 찾았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자의 곤욕스러운 심정을 모르는 재영은 자헌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자헌은 다른 일에서는 그렇지 않으면서 유독 이런 쪽으로만 눈치가 둔한 재영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클럽을 나섰다. 두 사람의 벗은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로 유난히 잘빠진 몸이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여자와 비교하자 무흠 역시 입었을 때 말라 보이는 것과 다르게 멋지게 근육이 잡혀 있었다. 둘은 있는 대로 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 뒤엉켜 있었다. 포르노에서 보이는 것 같은 과장된 신음이 아닌 나직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를 흘린다. 자헌은 침대 정면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들의 정사를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비주얼 적으로 과도한 흥분을 유발시킬만한 장면을 보면서도 자헌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본인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땠어?” 섹스 후 아름다운 몸에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여자가 자헌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예쁜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자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녀의 몸은 상당히 예뻤다. 잡지에 나오는 것 같은 부담스러운 육체가 아니라, 평소 자헌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던 길고 늘씬한 팔다리와 품에 쏙 들어올 것처럼 가녀리면서도 적당히 볼륨감 있는 그런 몸매였다. “아아… 상당히 자극적이었어.” 자헌은 그녀의 봉긋 솟은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자랑스럽게 웃으며 ‘만져 볼래?’하고 청해온다. 그리고 자헌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어주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굽혀 자헌의 다리사이로 손을 뻗으며 속삭인다. “너도 꽤 매력적이야. 금욕적인 면이 왠지 더럽혀주고 싶어.” 그리고 자헌이 전혀 발기 하지 않은 것을 안 그녀는 놀라서 침대에 늘어져 있는 무흠을 돌아보았다. “대단해. 전혀 흥분하지 않았어. 이런 걸 보고도 반응하지 않은 남자는 처음이야.” “내가 그랬잖아 내 것이라고.” 놀라워하는 여자의 반응에 무흠은 나른하게 일어나 앉으며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식으로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였던 거야?” 그녀는 얄밉다는 듯 무흠을 노려보고는 허리를 숙여 자헌에게 눈을 맞추었다. “너 게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자헌은 여전히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는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쓴 웃음을 짓고 연한 갈색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그 눈에 거짓이 없음을 보고 그녀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동정?” “그렇다 해도 너에게 차례가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 관심 꺼!” 어느새 다가온 무흠은 아직까지 자헌에게 달라붙어 있는 여자를 떼어내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자헌이 그들의 정사를 보고도 흥분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행위에서 금기를 범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보이곤 하는 꺼림직 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네 섹스 라이프까지 감정 없이 볼 수 있을만한 사람을 원한 거라면 이제 만족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제 적당히 이유를 털어 놓지 그래. 내게 진짜 원하는 게 뭐야?” 그녀가 욕실로 사라지자 자헌은 무흠을 올려다보며 추궁했다. “원하는 것이라… 넌 쓸데없는 말 말고 이대로 내 옆에 있으면 돼. 그런데 너 정말 흥분 안했어?” “할 말이 겨우 그것밖에 없냐? 하여튼 내가 네 억지에는 두 손 두 발 다 든다. 솔직히 말하면 너희 두 사람 굉장했어. 섹스 인형처럼 너무 완벽해서 반응 할 수 없었던 것뿐이지. 결코 네 테크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까지 억지로 보게 하지는 마라.” “…흠.” 무흠은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를 내며 일인용 소파의 팔걸이에 손을 짚고 자헌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목덜미에 와 닿은 상기된 체온과 휘감는 듯한 정사후의 색향에 자헌은 무의식중에 몸을 뒤로 물리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눈가에 느껴지는 젖은 입술의 감촉에 자헌은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너 너무 제멋대로 인 것 아냐?” “네가 지나치게 태연자약하니 딱 좋지 않아?” 무흠은 희미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자헌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고 몸을 딱 붙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놀리고 있음을 눈치 챈 자헌이 쓴웃음을 지으며 무흠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처음에는 입술 끝이 살짝 닿았을 뿐이다. 그리고 맛을 보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일임에도 금방 몰두한 무흠은 달아나지 못하도록 자헌의 목 뒤를 움켜쥔 채 이를 드러냈다. 혀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서로의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도망가 버리고 말아.”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폭력적이기까지 한 둘의 입맞춤을 갈라놓았다. 돌아보자 어느새 샤워를 마친 여자는 초승달처럼 눈을 휜 채 무흠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자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은 자헌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는 것을 보며 무흠은 씨익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 녀석은 도망 따위 치지 않아.” “아아…. 알 것 같아. 하지만 그 사람이 보면 바로 망가트리고 싶어 할 타입이야.” 어느새 벗어 두었던 옷을 챙겨 입은 그녀의 말에 엄지손가락으로 피 묻은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던 무흠이 심각하게 말을 받는다. “그렇잖아도 아까 너 오기 전에 핑크에서 안형진 만났어.” “벌써 만난거야? 재미없게….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돼.”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있던 그녀는 짐짓 심각한 표정의 무흠을 무시하고 자헌이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본다. “조심해. 그 사람 분명 너를 죽이려 들 거야.” “….” 마주한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한 말이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었고, 그와는 별도로 마주친 시야 가득 들어찬 자헌에 대한 순수한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자헌은 아이에게 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심어린 미소를 되돌렸다. “어이,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윽!! 제길.” 무흠이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그녀에게 말하던 중 섹스 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던 콘돔을 밟고 마구 화를 내며 욕실로 향했다. “너를 먼저 발견하다니 저 녀석 운이 좋았어.” 그녀는 거칠게 욕실 문을 닫고 사라지는 무흠을 곁눈질 하며 특유의 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오히려 내 쪽이 고마운 걸.” 상당히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분위기나 차림새로 보아 그녀 쪽이 연상이 분명했는데도 자헌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나라면 꼭꼭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텐데. 특히 우리 같은 녀석들에게는 더욱…. 빼앗아가고 싶어지잖아. 녀석이 제멋대로 휘두르게 두진 말아 아마 끝이 없을 테니까.” 그녀는 자헌의 다리위로 상체를 기댄 채 뽀얀 얼굴 가득 알 수 없는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은 대화의 내용과는 별도로 누가 봐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는 연인들처럼 보였다. “아직 이름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자헌이 웃는 얼굴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묻자,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에 와 닿는 부드러운 손놀림에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딸깍하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자헌의 목에 팔을 휘감아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인다. “향, 김이향.” 이향이 택시를 타고 사라진 뒤에도 무흠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양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채 길가는 사람들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던 행인 몇이 무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거리며 저만치 빙 돌아간다.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빠 있는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얼마동안 대수롭지 않게 그걸 보아 넘기던 자헌은 담벼락에 기댄 채 언제까지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무흠의 고집스러운 옆모습에 질렸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기분 안 나빠.” 예상했던 대로 무흠은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고 자헌을 향해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광선을 쏘아댄다. 자헌은 무음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어렴풋이 짐작 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엄청 기분 나빠 보이지?”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고개를 치켜든 자헌이 무흠을 깔아보며 이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무흠은 그 능청스러운 표정에 발끈해서 기대고 있던 담벼락에서 몸을 떼고 자헌의 앞에 마주서서 이를 드러냈다. “네 놈이 빌어먹게 말이 많아서 귀가 따가워 죽을 것 같아.” 무흠은 자헌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 뒤, 일부러 인 게 분명한 태도로 어깨를 부딪쳐 두어 걸음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의 무흠은 그런 자헌을 코끝으로 무시하며 곁을 지나쳐 세워두었던 바이크에 올라타고 자헌이 반응도 보이기전에 벌써 저만치 튀어나갔다. 무흠의 이런 어이없는 만행에 멀어지는 오토바이 꽁무니를 지켜보며 자헌이 혀를 찼다. “연무흠. 이 자식 그런다고 버려두고 가냐.”;;; 엉뚱하게 화풀이를 당한 자헌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아직까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헬멧을 내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제멋대로 휘두른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무흠은 생판 모르는 곳에 자헌을 버려두고 가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오늘의 일정을 훌륭하게 망쳐 놓았다. “어이, 네가 예자헌이냐?” 쉬는 시간 자헌이 바로 뒷자리에 앉은 이장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신나게 떠들고 있던 장원과 조용히 듣고 있던 자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너… 네가 공부 좀 잘 한다고 마구 놀고 다니는 모양인데 언젠간 후회하게 될 걸. 1등이라고 젠체해봤자 일진들이랑 어울리는 것 모를 줄 알고?” 얼굴이 마주치자마자 묘하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까지 더듬으며 버벅대는 상대의 모습에 자헌과 장원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 저… 누구?” 일단 이름이 호명된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갖춰 자헌은 상대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무안함에 얼굴을 붉히며 한껏 인상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얼굴은 아니다. 1, 2학년 때 같은 반도 아니었고 스쳐가며 본 기억도 없다. “이재문이다!! …그런데 너 영어 문제지는 뭐 보냐? 학원 다니지? 누구한테 배워?” “…응!?” 거의 광분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기세에 넋이 나갔던 두 사람은 다음에 이어진 말에 적응을 못하고 멍해졌다. “저거 뭐냐!? 너 아는 녀석이냐?” 기어이 자헌의 가방 속에 있던 문제지 이름을 알아낸 뒤, 걸음도 당당하게 남의 교실 문을 부서져라 닫고 사라지는 이재문의 뒷모습을 보며 장원이 자헌에게 물었다. “몰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두 사람은 완전히 황당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전체 등수로 말할 것 같으면 자헌이나 장원이나 비슷비슷했다. 운 좋게 맨 처음 시험에서 자헌이 눈에 띄는 등수를 차지했고 그 뒤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1등은 예자헌이란 공식이 성립되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다음 시험부터 부동의 1위는 이장원이었다. 두 사람 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자헌이나 장원이나 기를 쓰고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등수에 그리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 일로 자헌은 과도한 관심을 싫어장원이 머리를 써서 일부러 맨 처음 시험에서 1등을 놓친 게 아닌지 아직도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내 데이터에는 전교 10등 안에 저런 얼굴은 없어.”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일은 다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분’답게 장원은 손가락으로 잘생긴 이마를 톡톡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또 상담실에 있는 학생 기록부 훔쳐본 거냐?” “훔쳐보다니 무슨 그런 험한 말을… 펼쳐져 있기에 본 것뿐이야.” 어이없어하는 자헌의 말에도 이장원은 어디까지나 당당했고, 수업종이 울리는 순간 이재문군은 그렇게 잊혀졌다. “자헌이 너 도전받았다며?” 점심시간 식당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재영이 자헌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들어갔냐? 도전이랄까. …글쎄. 그냥 문제지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헌이 재영을 어깨에 매단 채 말하고 있을 때 점심 먹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졌던 장원이 자헌을 부르며 다가왔다. “야, 자헌아. 아까 그 녀석이 누군지 알아냈어. 어라? 천재영. 너 여전히 자헌이한테 달라붙어 있냐?” 3학년이 되어 반이 갈리긴 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재영과 장원은 같은 반이었고 이런 놀림 역시 하루 이틀 된 게 아니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시지.” “흥. 아직도 어릴 적 친구한테 매달려 응석이나 부리는 녀석을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안 살고 말지.” “다 늙은 여자 치마폭에 싸여 허우적대는 네 놈보다야 백배 낫지.” “늙었다니 여섯 살밖에 차이 안나 임마!” “제비족!” “이 애새끼가!” “…항상 생각하는 건데, 너희들 사실 사이좋은 거 아냐?” 얼굴 마주치자마자 시작된 유치한 공방전을 지켜보던 자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양쪽 귓가에서 터진 똑같은 불만의 소리에 자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에게서 물러선다. “윽, 소리 지르지 마 나 귀 안 먹었어. 그리고 사실 그렇잖아? 너희들 가끔 보면 남들이 모르는 치부라든지 어떻게 봐도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것들까지 꿰고 있잖아?” 자헌의 지적에 재영과 장원은 뜨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것 뿐이야.” “맞아. 재수가 없었던 거지.” 드물게 의견일치를 본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자헌은 역시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이재문군의 화제는 까맣게 잊혀졌고 자헌은 재영과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 뒤로 무흠이랑 그 여자랑 같이 어디 갔었냐?” 층계참을 올라가며 묻는 재영의 질문에 자헌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잠시 갈등했다. “어디랄 것도 없이 잠시 같이 있다가 각자 헤어졌어.” 있는 대로 기분이 상한 무흠에 의해 생판 모르는 동네에 떨어뜨리어져 결국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했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자헌은 옥상 문을 비틀어 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익히 예상했던 대로 선객들이 있었다. 그림자진 펜스 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무흠과 흔히 생각하는 일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쪼그려 앉아 빵을 먹고 있는 한중이었다. “아, 어서오… 콜록콜록 윽!!!” 급하게 먹던 중에 재영을 보고 아는 척을 하려던 한중이 갑자기 목이 매여 가슴을 두드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재영은 그런 한중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혀를 찬 뒤 누군가에게 받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음료수를 꺼내 건넸다. “있다가 똑 같은 걸로 사와! 그런데 두 사람 뿐이냐? …어라, 무흠이 네가 웬일로 상처투성이냐?” 인정머리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재영은 그제야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저만치 늘어져 있는 무흠의 엉망인 차림새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무흠은 완전히 뻗어 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덜너덜한 교복 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상처 또한 상당했다. 한쪽 광대뼈와 입가의 까진 상처, 새파란 멍 자국 그리고 눈 주위의 다크서클은 그렇지 않아도 살벌한 외모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었다. “연무흠, 또 어디 가서 무슨 사고를 친 거냐?” 재영이 겁 없이 신발 끝으로 무흠의 발치를 살짝 건들며 물었지만 묵묵부답. 팔 다리 할 것 없이 내던져 둔 그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마, 누굴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반쯤은 진담으로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말했지만 한번 움찔 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재영은 무흠의 무반응으로 보아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음료수 한 캔을 아작 낸 뒤에도 여전히 빵 봉지를 부스럭대고 있는 한중에게 관심을 돌린다. 자헌은 방금 밥을 먹고 온 주제에 이미 마셔 없앤 음료수 이야기를 들먹이며 한중의 빵을 빼앗아 먹으려는 재영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흠에게 가까이 갔다. “무슨 일이야?” 자헌은 치료는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 같은 무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자헌의 목덜미께에 와서 꽂혔다. 재영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것에 비해 낫지만 그렇다 해도 당장 달려들어 목을 따놓으려는 듯한 살기어린 눈빛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로서 오늘 이곳에 연무흠과 한중 두 사람만 있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었다. 이런 살벌한 시선을 받고 피하지 않을 녀석이라야 한중 외에는 있을 리 없었다. 비록 무흠에게 상납하려 들고 왔던 빵을 ‘니가 먹어.’란 한마디로 그 자신이 꾸역꾸역 먹다가 목이 매긴 했지만 말이다. “상당히 아파 보이는데, 약이라도 발라 줄까?” 자헌은 사지를 쫙 펼치고 반쯤 누워있는 무흠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험악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무흠은 터진 입가를 아랑곳 하지 않고 한쪽 입 끝을 비웃듯이 비틀어 올린다. “웃기고 있네. 깝죽대지 말고 가라.” 오늘 처음 드는 무흠의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있었고 불쾌감과 짜증이 가득했다. “….” “꺼져!” 그렇지 않아도 살벌한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이를 간다. 아무리 봐도 무흠의 분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헌에게로 향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자헌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화풀이에 불과했다. “…웃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라는 항의의 의미로 들리는데?” “알긴 아는군!” 자헌의 조심스런 물음에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무흠은 희미하게 푸른 멍이 든 한쪽 눈가를 찡그린다. “…무슨 소리야? 어제 나랑 헤어질 때만 해도 멀쩡했잖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말도 안 되는 누명에 자헌은 기막힌 얼굴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 녀석이 내 눈앞에서 멋대로 그런 짓을 하니까 재수가 옴 붙어서 이렇게 된 거다.” 여기서 말한 ‘그런 짓’이라는 것은 어제 무흠이 욕실에서 나오는 순간을 노린 이향의 기습키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 사건의 주체는 자헌이 아니었고, 만약 그렇다 해도 자헌이 누구와 키스하건 그것은 무흠과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 이 불량소년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 했다. “닭살 돋을 정도로 남 챙기는 일은 네게만 하라는 것으로 접수됐지만, 거기에 ‘그런 짓’까지 포함되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자헌은 재영과 한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들을 쳐다보자 그 시선에 부담을 느끼고 목소리를 낮췄지만,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는 다는 말이 있듯이 무흠으로서는 남이 들던 말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럼, 이제 알았으니 명심해두시지.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딴 놈하고 키스하면 죽여 버린다.” 마디가 다 까져 피딱지 앉은 손으로 자헌의 멱살을 틀어쥔 무흠이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억지를….” 멱살을 잡혀 반쯤 무흠을 덮쳐누르는 것 같은 무리한 자세를 땅바닥에 손을 짚고 버티며 자헌이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냈다. “억지라니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게 억지라 아니라면 또 뭐가 억지라는 것이냐.” “시팔, 아니라니까!!” 자헌이 상처투성이의 손을 풀어내며 반박하자 무흠이 빽 소리를 질렀다. “….” “….” “…그래. 억지는 아니다.”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잡혀 있는 팔과 무흠의 구겨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뒤 한숨을 폭 내쉬며 마지못해 인정했다. 이건 억지라기보다는 생떼에 가까웠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하던 양우는 학교 앞 대로변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래용을 발견했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지저분한 몰골에 촌스러운 추리닝을 걸친 채 지나가는 학생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 앞에서 기다릴 거, 학교는 왜 안 나오냐?” 양우는 팔짱을 낀 채 막 길거리에 엉거주춤한 포즈로 주저앉는 래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어? 기다렸잖아. 임마.” “하긴 등교를 해봤자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니….” 긴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꼼지락대며 불평하는 래용의 모습에 양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래용을 우악스럽게 끌어 일으켜 앞장 세웠다.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또 집을 나온 모양이다. “배고프다. 집에 밥 있냐?” “라면 있으니까 알아서 끓여먹든지 말든지.” “아, 새끼 더럽게 야박하네. 하여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사람 알기를 발가락 때만큼도 치지 않으니.” 래용은 땀 냄새 나는 몸으로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궁시렁 댔다. “야, 임마! 좀 씻고 다녀라.” “의종이 그 개새끼가 지 깔치 데려온다고 나가라잖아.” 양우가 무안을 주자 래용은 괜한 사람을 끄집어내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하지만 사실 두 사람 다 몸에서 땀 냄새 좀 나는 일로 신경전을 벌일 만큼 깔끔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너 퇴원하고 계속 그 형 집에 있었던 거냐?” 병원에 입원했던 기간은 사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래용은 거의 일주일 이상 남의 집을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니 거기 한 삼일쯤 있다가 나왔어. 너한테 갈까 했는데 내가 워낙 한 인기 하잖냐.” 몸에 맞지도 않아 발목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체육복을 입고 잘난 척 해봤자 꼴불견일 뿐이다. 양우는 래용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못마땅한 투로 나무란다. “웃기고 있네. 갈 데 없으면 기어들어 올 것이지. 뭐, 잘났다고 뻐팅기냐?” “윽!! 살살 좀 해. 새꺄!! 확 딴 데로 새버리는 수가 있어.” “이게 아직도 정신 못 차렸고만. 잔말말고 기어들어와! 또 전번처럼 괜히 폼 잡다가 사고나 당하지 말고.” 가당치도 않은 협박에 양우는 코방귀를 뀌며 래용의 귓불을 잡아 흔들었다. 반시간 뒤에 양우 혼자 살고 있는 방 2개 짜리 낡은 공동 주택에 도착해 5층까지 걸어 올라가게 되자 래용은 끊임없이 투덜댔다. 하지만 양우는 귀를 후비는 것으로 래용의 소소한 불평 따위 깨끗이 무시해버렸다. “배고파 뒈지겠는데 겨우 라면 세 개냐? 이걸로 우리 둘이 먹자고?” 래용은 양우가 식탁위로 가져다 놓은 냄비를 들여다보며 불평했다. 하지만 당장 냄비를 치우려고 하자 간사한 미소를 띠며 양우의 팔목을 붙든다. “아, 자식. 말도 못하게 해요. 자자, 어서 먹자!!” 그리고 양우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지 방금 끓은 라면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장래용. 안 빼앗아 먹을 테니. 천천히 좀 먹어라.” 걸귀 들린 듯한 래용의 형상에 식사할 마음도 사라졌는지 양우는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리고 래용이 어느 정도 먹기를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학교는 어쩔 거냐? 이대로 때려치울 거야?” “때려 치긴 뭘 때려 쳐? 이미 잘린 거나 마찬가진데. 나 그때 상담실 뒤집어엎은 뒤로 계속 안나갔어. 아마 선생들도 좋아할걸.” 래용은 마지막 남은 라면 줄기를 신중하게 건져 먹으며 왠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는 양우를 힐끔 거렸다. 분명 속으로 양우 이 녀석이 이렇게 나오면 골치 아파지는데 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중이리라. “무슨 계획 있어? 학교 그만두고 일을 한다든지.” “내가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냄비 국물까지 마시고 있던 래용은 눈을 치켜 뜨고 뻔한 걸 왜 묻느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양우는 눈앞에 앉아 있는 대책 안서는 친구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네 녀석이 학교 다니고 안 다니는 것이야 네 일이니 내가 신경 쓸 일 아니지만, 그 다음은 어쩔 건데? 잠은 여기서 잔다 해도 먹고 입고 쓰는 건?” “뭐, 어떻게 되겠지.” 아쉬운 얼굴로 냄비 바닥을 긁는 지금 래용의 모습은 딱 날건달 그것이었다. 양우는 그런 래용의 모습에서 여자 집에 얹혀 살다가 치정사건으로 살해당하는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무슨 헛소리야!?” 양우의 뜬금없는 소리에 래용은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고 눈앞의 친구에게 집중했다. “아니. 어느 날 갑자기 실수로 애가 생겨서 의외로 정신 차리고 개과천선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야!! 홍양우!? 너 괜찮냐?” 래용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워프 해버린 양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댔다. 혹시라도 이 녀석에게 문제가 생기면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서도 패거리들에게만큼은 신세지고 싶지 않은 래용이었다. 그 녀석들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뭐… 너 하나쯤은 멋대로 하고 살아도 되겠지.” “너 왜 그래? 사람 간 떨리게 영문모를 소리하지 말고 평소대로 해. 임마!” 항상 신랄하던 양우가 엷게 미소까지 짓자 래용은 완전히 졸아붙었다. 그리고 녀석이 갑자기 죽으면 시체를 유기하고 여기서 얼마정도 더 눌러 살 수 있을지 계산하며, 자신들의 관계가 상당히 실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침울해지는 래용이었다. 이번에도 래용은 자신과 알고 지낸다 해서 양우에게 전혀 이익이 없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안형진 그 사람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옛날 그 일이 있기 전 래용이 ‘형, 형’ 하며 따라다니던 남자의 안부를 물었다. 성준이 그렇게 죽고 나서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한 뒤로 래용과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래용이 은근히 그쪽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걸 양우는 알고 있었다. “몰라. 의종이 그 새끼 꼬리에 불붙은 개새끼 마냥 싸돌아다니는 것 보면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는 것 같아.” 래용은 양우가 꺼낸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벌떡 일어나며 신경질을 부렸다. 래용이 결정적으로 안형진에게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기의종에게 있었다. 그 본인은 여전히 안형진의 심복노릇을 하고 있지만 래용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특히 의종의 눈을 실명직전까지 만들어 놓은 일로 대들다 죽기 직전까지 맞고 그대로 안형진과 결별했다. 양우도 안형진이나 기의종 같은 사람들과는 일면식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래용을 따라 나갔다가 만난 안형진은 당시 비리비리한 중학생이었던 양우가 납죽납죽 말대답을 하며 입바른 소리를 해대자 그것을 상당히 재미있어하며 귀여워했었다. 이미 모두 지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봐! 장래용. 의종이 형 집에서 왜 나온 거야?” 양우는 래용과 의종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래용이 말한 것 같은 이유로 그가 의종의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녔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아까도 말했잖아. 그 자식한테 내쫓겼다니까.” “여기서도 내쫓기고 싶은가 보군.” 양우는 초조한 듯 방안을 서성대는 래용의 움직임을 그대로 눈으로 쫓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래용은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양우의 맞은편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날 잠깐 밖에 나왔다가 들어가 보니 그 자식 패거리가 떼로 몰라와 있잖아.” 짜증 섞인 투로 말을 뱉어내던 래용은 그대로 식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한숨을 내쉰다. “열 받아서 그대로 나와 버렸는데, 갈 데가 없잖아. 그렇다고 의종이 그 개자식이 날 찾을 리도 없고, 완전히 좆 된 거지.” 혼잣말처럼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래용의 뒤통수를 건너다보며 양우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친구가 의기소침해 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새삼스레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래용의 현재 상황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잔 것 같은데, 씻고 안방에 들어가서 자라.” 끽해야 양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나머지는 래용이 풀어가야 할 숙제였다. 심화반 수업이 끝나자 거의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친구들과는 집이 정반대방향이었기 때문에 자헌은 그들과 헤어져 혼자 건널목을 건너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무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재영은 여전히 아르바이트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심화반 수업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 본 수업을 빼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억지로 붙잡아 놓는다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게 재영에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자헌은 문득 자신을 쫓는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려니 했지만 자헌이 걸음을 빨리 하면 그들도 스피드를 올렸고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 또 그것에 맞춰 걷는다.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을 따라 걷는 이유야 뻔한 일이라 자헌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앞의 버스 정류장 쪽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서 있었지만 그들이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자헌이 이대로 택시를 타는 게 나을지, 찻길을 건너 도망치는 쪽이 나을지 재고 있는 동안 서서히 그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막 마음을 정하고 움직이려는 순간 앞이 가로막혔다. “어이, 너. 무흠이 그 자식하고 친구지?” 뒤만 신경 쓰고 걷다가 갑자기 진로를 가로막히자 자헌은 일단 자리에 멈춰 섰다. 학교 앞에서 그것도 혼자가 되는 것을 기다려 붙잡은 걸 보면 노리고 기다렸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상대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재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를 삐죽이 세우고 한쪽 눈가에 작은 상처가 있는 족제비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우리 얼마 전에 클럽 『핑크』에서 만났는데, 기억하나?” 왠지 친근한 말투가 아니라도 그날 일이라면 무엇하나 잊지 않고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재영이 아르바이트하는 클럽에서 만나 무흠과 시비가 붙었던 상대 중 한 명이다. “…제게 무슨 일이시죠?” 몸을 사리며 묻는 말에 상대는 영광인 줄 알라는 듯 말한다. “우리 형님이 너 좀 보자신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따라오던 녀석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얌전히 따라가지 않으면 끌고 가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자헌은 앞뒤를 막아선 남자들을 훑어보며 두 손을 늘어뜨렸다. 얼마 전에 이향이 경고했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자 막연하기만 했던 무흠의 과거에 대한 윤곽이 잡히는 듯 했다. 지금 이들과 같이 간다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한번 끌려 다니기 시작하면 상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튼 생각은 말라고.” 상대는 자헌의 미묘한 움직임을 읽고 어깨를 틀어쥐며 낮게 말했다. 그 순간 그들의 곁에 차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자헌은 그대로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자헌이 일생일대(!)의 대위기(?)를 맞고 있을 때 한편 무흠은 자신의 패거리들과 같이 식품위생법을 위반해 영업정지를 먹은 술집을 독차지 한 채 놀고 있었다. 하지만 무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더러웠다. 전에 자헌이 지켜보는 앞에서 섹스 한 뒤로 곁에 그녀석이 없으면 서지 않는 것을 막 깨달은 후라 더 그랬다. 아니 사실은 며칠동안 피해 다닌 덕분에 얼굴을 볼 수 없어서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연무흠은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기분 나쁜 오라를 내뿜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무흠의 곁으로 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의 무흠에게 괜히 한마디했다가 개 박살난 놈을 몇 본 뒤로 이들 중 아무도 무모한 용기를 자랑하려는 녀석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저, 무흠이 형. 이제 그 형님은 안 오시는 겁니까?” 쭈뼛거리며 와서 주체가 생략된 아리송한 질문을 하고, 자신이 먼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녀석은 피부가 새까맣고 키가 작다고 해서 별명이 ‘검은 콩’인 신응환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패거리 내에서의 서열도 낮은 그로서는 이런 식으로 무흠에게 말을 거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 다른 때 같으면 무흠이 아닌 재영에게 물었겠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재영이나 한중 두 사람 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 기분 나쁜 목소리와 함께 예리한 시선이 와서 박히자 응환인 왠지 울고 싶어졌다. 눈앞의 이 남자는 악마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잘생겼지만, 또 그 못지않게 단지 사납다는 말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포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뼈마디가 시큰거릴 듯한 눈을 보면 왜 저런 별명이 붙은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 말이 나오지 않아 버벅대고 있자 무흠은 탁자위로 한발을 탁 올려놓으며 똑바로 응환일 응시한다. 이미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은 두 사람에게 와 박혀 있었다.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응환인 자신이 대답 할 때까지 무흠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울상을 지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재영이 형의 치…친구라는 그분이요. 이, 이름이 예…ㅈ… 이었던가 하는….” 그 순간 무흠은 자신이 딛고 있던 테이블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술병들이 깨져 주위가 엉망이 되었다. 더듬더듬 말을 하고 있던 응환이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무흠에게서 눈도 돌리지 못했다. 무흠은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눈앞의 꼬맹이가 예자헌을 찾자 그대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꺼져!” “윽….” 원하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사지 멀쩡하게 무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떨리는 다리로 재빨리 도망쳤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무모한 용기를 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었다. 응환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돌아서는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고 패거리들 모두 그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제 술집 안은 음악소리 외에 누구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핸드폰으로 전화 넣어.” 불쾌한 표정을 감추려고도 않고 무흠은 가까이 앉아 있는 녀석에게 명령했다. 잔뜩 쫄아서 눈치를 살피던 녀석은 무흠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에? 짱 핸드폰으로 말씀이십니까?” 눈앞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라니, 심술도 이 정도면 보통 심술이 아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무흠의 폭주를 막아줄만한 나이 많은 선배들은 한 사람도 이곳에 없었다. 어쩌면 알면서 내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녀석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빨리 전화나 해.” 무흠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일일이 질문이 많은 여드름투성이의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네, 넷!!” 호통이 날아오자 하마터면 간신히 꺼내든 핸드폰을 술과 깨진 병 조각으로 가득한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옆에 앉은 친구 녀석에게 눈치해서 알아낸 무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들리는 김양이누나의 안내 멘트. “저기… 꺼져있는데요.”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말하는 순간 무흠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게 안에 있던 패거리들 모두가 얼어붙었지만 무흠은 날듯이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그곳의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이렇게 무흠이 한번씩 핀트 나갈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그들이었다. 자헌은 앞뒤로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뒷문을 통해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안내된 곳은 이층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원형 테이블 앞이었다. 아래층의 흥겨운 분위기와는 별도로 이 곳은 어딘지 은밀함을 풍기고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시야를 가로막고 섰던 남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자헌은 정면에 위치한 안형진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헌과 눈이 마주치자 거만하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자헌은 순식간에 양옆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반강제로 안형진의 맞은편에 앉혀졌다. “그 녀석 친구치고는 성실하더군.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고 말이야.” 안형진은 양주잔을 손에 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헌으로서는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초대 감사드립니다.” 단정한 얼굴에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헌은 마치 정식 초대라도 받은 사람처럼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잡혀 온 녀석답지 않은 태도에 안형진은 호오, 이것 봐라. 라는 표정으로 새삼스레 자헌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전에 봤을 때는 무흠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눈앞의 상대에 대해 살피는 게 소홀했는데, 오늘 보니 이 녀석도 한 인물 하는 물건이지 않은가. “너, 이름이 뭐지?” 안형진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자, 잡아다가 잔뜩 겁이나 주어 쫓아 보내려던 계획을 조금 변경했다. “예자헌입니다. 그쪽 분 성함은 안형진씨죠?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긴 해도 남에 일에 참견하지는 않는 자헌이지만, 그게 자신의 일이 되면 (무흠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무엇에든지 확실한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네가 연무흠의 친구라면 나를 몰라서는 안 되지. 그 녀석 내게 아주 큰 빚을 졌거든.” 말을 하며 안형진은 자헌의 표정이나 반응을 유심히 살핀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떡대들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도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침착한 자헌을 보며, 안형진은 오랜만에 흥미를 자극하는 대상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 친구의 빚을 제가 대신 갚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헌은 안형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명확하게 못을 박았다. 어물거리다가 이상한 협박이라도 받게 되면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할 일이다. “아니. 네가 소문대로 그 녀석의 ‘특별’한 친구라면 너 밖에 갚을 수 없는 빚이 있지.” 안형진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고양이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어딘지 음산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헌은 그런 안형진을 보며 배가 부를 때에는 먹이를 먹지 않고 여유롭게 상처투성이로 만들며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잔인함을 떠올렸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선 자헌의 의지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모든 것은 안형진의 기분에 달린 문제였지만 놀리면 놀리는 대로 당하고 있는 것 또한 서로에게 재미없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저는 녀석의 특별한 친구 따위가 아닙니다.” “네 생각은 중요치 않아.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자헌의 부정에도 아랑곳 않고 안형진은 유쾌한 듯이 말을 잇는다. “사실 넌 아무리 봐도 그 녀석이 친구 삼을 만한 타입은 아니야. 이렇게 되면 억지로라도 곁에 두는 이유를 알아내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이 남자는 분명 남의 치부 따위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즐거워할 타입이다. “그 녀석이 안형진씨에게 지었다는 빚이 정확히 뭐죠?” “왜? 갚아줄 텐가?” 양팔을 소파 등 걸이에 걸치며 느긋하게 기대앉은 안형진은 한쪽 입가를 끌어 올렸다. “제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안형진씨께서 저를 수취인으로 지목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그 빚이라는 게 정말 그 녀석이 갚아야 할 빚인지 정도는 저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네가 녀석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정작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안형진은 어딘지 묘하게 거슬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얼굴을 마주 대며 은밀하게 속삭인다. “그 녀석이 악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고 있나?” “….” 뜬금없는 화제의 전환에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딘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형진을 주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편한 자리는 아니었기에 안형진의 의도가 불분명한 말은 자헌을 더욱 긴장시켰다. “흔히들 그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은 녀석이 골육상잔의 패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지. 물론,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으니 단지 소문일 뿐이지만.” 안형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었지만, 진위가 확실하지 않은 말을 일부러 하는 이유는 자헌의 동요를 부추기려는 의도일 수 있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런 소문을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시종 차분하게 자신을 상대하던 자헌의 긴장된 어조에 안형진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말이야. 몇 사람인가는 왜 그런 소문이 나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 가령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든가. 그 사람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녀석이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를 먹었다든지 하는 식의….” 이로서 그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안형진은 자헌에게 무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은 듯 했다.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자연히 생기게 되는 심리적인 거리감. 그 작은 틈은 의외로 크다. 신뢰가 사라진 순간 두 사람은 이미 그 전과 같은 관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재미없는 소문이군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넘기는 자헌을 보며 안형진은 잘생긴 눈썹을 반토막내고 있는 이마 위 상처를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린다. “왜, 믿기지 않나?”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나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의 진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알아야 할 빚이라는 게 설마 말씀하신 것 같은 ‘소문’에 의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아까부터 제 질문에 대한 답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걸로 압니다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헌 역시 안형진의 도발에 넘어가는 법 없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안형진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어린 녀석의 되바라진 시선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큭…핫핫핫핫핫!! …글쎄. 과연 어느 쪽이 더 능청스러운가 하는 문제라면 네 쪽도 만만치 않은 걸. 넌 자신에게 자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네가 마주보아야할 진실은 영화에서처럼 멋진 게 아니야. 빈말로라도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을 테지. 그러니 넌 그쪽세계에서 조금 더 꿈을 꾸도록 해. 그 후엔 싫어도 현실로 끌려나오게 될 테니까.” 여기까지 말한 안형진은 이제까지의 진중한 태도를 집어치우고, 자헌을 향해 윙크를 하며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봐, 잘 좀 해봐! 그런 테크닉으로는 서지 않는다고.” 그리고 테이블로 아래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을 때에는 천하의 자헌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형진의 손에 끌려나온 상대는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이 숨을 헐떡거리며 지친 듯 멍한 시선을 자헌 쪽으로 돌렸다. 살짝 벌어진 입 주위로 붉게 번진 립스틱이라는 선정적인 모습에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어린애한테는 너무 자극적인 장면인가?” 이렇게 말하며 안형진은 꽤 오랜 시간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던 여자의 번들거리는 입술에 망설임도 없이 입을 맞췄다. 자헌은 그 장면을 보며 무심코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것은 무흠과 이향이 서로에게 하던 달콤한 키스와 다른 것이었다. 더 나아가 무흠과 자헌이 금기를 범한다는 설렘을 품고 나누던 그것과도 달랐다. 어딘지 농염하고 끈적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진득함이 묻어나는 은밀한 키스였다. “예자헌이라고 했던가. 어때? 원한다면 즐기게 해주지.” 어딘지 거슬린다고 느껴지던 안형진의 탁한 목소리가 이때만큼은 등줄기가 싸늘해질 만큼 섹시한 음색을 띄었다. 그런 식으로 자헌의 넋을 빼놓은 안형진은 여자에게서 옮겨 묻은 립스틱을 핥으며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자헌이 오늘의 두 번째 위기를 맞고 있을 때, 무흠은 클럽 『핑크』의 문을 거칠게 열어제쳤다. “예자헌 어디 있어?” 무흠은 카운터를 뛰어 넘어 다짜고짜 재영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쳤다. 재영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얼떨결에 쥐고 있던 맥주병을 휘두를 뻔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이 녀석의 머리통을 갈겨야 하는 게 아닌 가 갈등하고 있었다. “윽…. 숨 막혀, 자식아. 이거 못 놔!?” 목이 졸린 소리를 내며 재영이 간신히 말을 했다. 무흠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손을 약간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준 것은 아니라 재영은 까치발을 들고 무흠에게 매달려 있었다. “예자헌!” “켁켁!! 나도 몰라 임마, 자헌이를 왜 여기서 찾아?” “씹!!!” 무흠은 욕을 하며 간신히 재영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소란에 손님과 대화 중이던 한계춘 사장은 두 사람을 힐끔 보더니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재영은 구겨진 옷을 탁탁 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던 손님에게 맥주를 건넸다. 그리고 곁에서 짜증을 부리고 있는 무흠에게 시선을 던진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 자헌이가 뭐?” “그 자식 찾아내.” 역시, 자헌이가 없으니 당장 말이 짧아진다. 모르는 놈들은 이걸 카리스마라고 하지만 재영이 보기에는 단지 사회성 부족이다.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우선 이유라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 자헌이가 돈 떼먹고 도망이라도 쳤냐?” 농 짓거리를 하며 재영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무흠을 훑어보았다. 바람에 날린 듯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겨진 셔츠에 흙먼지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급하긴 급했던가 보다. 무흠은 느긋하게 담배까지 피워 무는 재영을 보며 이를 갈았다. 찾지 않을 때는 그렇게나 눈앞을 얼쩡거리던 녀석이 막상 찾으려니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죽. 인. 다.” “뭐, 그러시든지. 나 죽인 뒤에 너 혼자 자헌이 찾기 어려울 걸. 방금 전처럼 다짜고짜 쳐들어가기에는 자헌이네 집 문턱이 좀 높지 아마?” “…빌어먹을!” 뜻대로 되지 않자 아주 죽으려고 한다. 재영은 무흠이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은 싸움판에서 외엔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자헌이와 관련된 일이 되자 재영이도 오랫동안 뻗대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심화반 수업도 끝났을 테고, 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학교에는 없다는 거겠지? 그럼, 집으로 해보는 수밖에 없나?” 재영이 시간을 확인하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무흠은 드디어 움직일 생각이 든 것 같은 재영을 노려본 뒤 바로 옆에 버티고 섰다. 무흠이 그 안에서 있는 대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 덕분에 아무도 카운터 바 쪽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자헌의 방으로 전화하기 시작했을 때는 느긋하기까지 하던 재영은 몇 통의 전화를 더 하면서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흠은 무표정 한 얼굴로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바를 두드리는 재영을 말없이 쳐다볼 뿐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 대장, 그 안에서 뭐해요?” 때마침 한중이 친구들 몇이랑 함께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에게 예를 표한다. 무흠은 평소처럼 녀석들의 인사치레 따위 깨끗이 무시해버렸지만, 재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게 한중의 패들을 맞았다. “중이 왔구나? 마침 잘됐다. 너 잠깐 카운터 좀 봐라.” 재영은 카운터 아래에 있던 행주를 한중의 손에 쥐어주며 재빨리 바를 벗어났다. 그리고 사장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뒤 말릴 새도 없이 뒤돌아 섰다. “에… 형!?” “잠깐이면 돼. 부탁한다.” 그렇게 소리치며 재영은 무흠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한중은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그의 사촌형에게 붙잡혀 꼼짝없이 재영을 대신해서 일을 해야 했다. “뭐?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뭐라고? 이장원 너 두고 보자!!” 클럽 밖으로 나오자마자 드디어 자헌의 행방을 알아냈는지 재영은 상대에게 거칠게 소리친 뒤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와 다르게 침착한 모습으로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 있는 무흠을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학교 앞에서야. 그 녀석 질이 안 좋아 보이는 놈들하고 같이 차 타고 사라졌다는데. 문제는 누가 데려간 줄 알고 찾느냐 이 말이지.” 자헌이야 트러블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거의 없는 녀석이니 원한을 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돈 때문이라면 건장하고 다루기 힘든 남학생보다는 여자나 어린애로 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납치범에 대한 것은 오리무중일 뿐이었다. 그때 무흠이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재영을 보며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 순간 재영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무흠의 귀신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네가 자헌일 데려간 놈들을 어떻게 알아?” “…재영이 넌 그냥 여기 있어라.” 그리고 휙 뒤돌아 서더니 성큼성큼 멀어진다. 재영은 그런 무흠의 태도에 화가 났다.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자헌이를 내놓으라질 않나, 이제 행방을 알게 되자 또 제멋대로 휘릭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자헌에 대한 걱정은 저놈보다는 자신이 더하다고 생각하는 재영이었다. “자헌이가 생판 모르는 새끼들한테 끌려갔다는데, 그냥 여기 있으라고? 웃기지마, 이 자식아.” 재영은 길길이 날뛰며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한 자신의 『길순』이에게 뛰어가 시동을 걸고, 벌써 저만치 튀어 나가고 있는 무흠의 이름 없는 혼다를 쫓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떠맡게 된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중은 입이 댓 발은 내밀고 있었다. 같이 왔던 친구놈들은 한중이 한계춘 사장에게 붙잡히자마자 의리 없이 내빼고 없었다. 특히 더 기분 나쁜 것은 이 곳에 오는 녀석치고 한중의 불친절에 꿈쩍하는 놈들이 없다는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며 마른 행주로 잔을 닦던 한중은 바로 맞은편 스툴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들리자 이를 갈았다. “뭐줘?” “….” 대꾸 없는 것에 발끈해서 고개를 들자 눈앞에 새하얀 미인이 앉아 한중을 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한중은 현기증을 느끼며 눈앞의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향이 누나!!” 그러자 이향은 그 가녀린 몸을 앞으로 내밀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한다. 한중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한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에도 이향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한중을 놀리곤 했다. 그게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한중은 그녀 앞에만 서면 기를 펼 수 없게 된 것이다. “중이가 바텐을 하다니 왠지 안 어울려. 술 안 팔고 자기가 다 마셔버릴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오년이 지나도록 전혀 늙지 않을 수 있는지 한중에게는 그게 수수께끼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향은 보이는 것 보다 배는 나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형한테 살해당해 생매장될걸요.” “하긴, 계춘씨라면….” 한중이 클럽 한구석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사촌형을 눈짓해 보이자 이향이 화사하게 웃으며 어깨를 웅크린다. 이향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로 보아 과거 계춘이 비슷한 짓을 저질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리기만 하는걸. 분명 몇 대 맞고 끝날 테니까. 마음놓고 마셔도 돼. 저래 봬도 중이 널 얼마나 예뻐한다고.” 이향이 나긋하게 한중이 내놓은 오렌지 주스 잔을 집어 들며 하는 말에 한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향의 바로 뒤에 한계춘이 인왕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뒤에서 감싸안듯이 두 팔로 카운터 바를 짚어 이향을 그 안에 가둔 한계춘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완전히 미녀와 양수 같은 두 사람의 대치 상태에 한중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향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뜬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사촌 형이라도 콘크리트에 묻혀 한강 같은 곳에 수장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컷 흉을 보고 있을 때, 등뒤에서 나타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잖아? 그리고 장난은 그쯤 해둬. 당신 귀여운 사촌동생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됐어.”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잔뜩 얼어있는 한중을 쳐다보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졸지에 놀림을 받은 한중은 무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사람에게서 획 돌아섰다. “오늘은 웬 행차야? 무흠이라면 이미 왔다 갔는데, 그 녀석 데리고 노는 것도 적당히 해. 그러다가 주흠이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또 저번처럼 아수라장 만들면 아무리 너라도 출입금지야.” “그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리고 걱정 마. 이제 무흠이한테서는 손뗐으니까. 사실 그 사람 나보다는 자기 동생을 더 사랑하는 걸. 애석하게도 본인에게 외면당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애석한 표정이 아니다. 이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잇는다. “뭐, 나야 그게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더 좋지만.” “너희는 아직도냐.” 어이없어하는 한계춘을 보며 이향은 최고로 예쁜 표정을 지으며 빙긋 웃는다. 결코 편한 생활은 아닐 터였다. 처해있는 상황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흠의 밑에 녀석들에게 형수님 소리 듣는 것도 진력이 나기 시작했을 테지만, 계춘으로서는 이향을 도울 길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웃는 얼굴이 서글퍼 보인다고 해도 참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자 무흠은 거침이 없었다. 몇 군데 클럽과 바를 뒤져가며 만난 녀석들 중에 몇을 추궁하자 당장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나불나불 불어버린다. 재영은 나설 필요조차 없이 그냥 그림자처럼 무흠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어디 잡혀 있을지 모를 자헌을 찾는 입장으로서는 좋았지만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무흠을 꺼려했다. 평소 패싸움 할 때 피 칠갑한 무흠과 정면으로 마주친 상대 녀석들이 가끔 저런 증상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겁먹지는 않았다. 재영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눈앞에서 도깨비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는 연무흠 보다는 그의 형에게 있었다. 이들이 보기에 연무흠은 멋모르는 어린 싸움꾼이지만 연주흠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겐 폭력 조직 한신을 적으로 돌릴 용기 따위는 없었다. “안형진이 누구야? 자헌이 찾는다면서 왜 이상한 이름만 들먹이는 거냐!?” 재영은 무흠이 들리는 곳마다 몇 번이나 ‘안형진’이라는 놈을 찾아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재영으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 석자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놈들이 예자헌을 알리 없으니 잡고 있는 놈을 찾는 게 빠르지 않겠어?” 그리고 이어지는 무흠의 말에 재영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야? 너 아는 녀석이 자헌일 납치해간거야? 어떻게 된 일이야!?” “따라와.” “야, 이 자식 같이 가!!” 무흠은 재영이 귀찮게 추궁해오자 대꾸도 없이 그대로 내달려 버린다. 황당한 얼굴로 무흠을 쳐다보던 재영은 악다구니를 쓰며 녀석을 쫓았다. 그 시각 자헌은 한 시간 여전에 반강제로 끌려들어갔던 클럽을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 자헌은 길게 숨을 내쉬며 대로변으로 나와 방금 전까지 붙잡혀 있던 건물을 뒤돌아보았다. 오늘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다시 한번 그와 마주쳤을 때는 그렇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자헌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에 본 안형진의 반응은 잡았던 물고기를 한번은 놓아준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연무흠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차린 사람들과 현란한 네온 불빛, 소란스러움, 그리고 교복을 입고 이런 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음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 자헌이 그런 거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로 나서자 커다란 소음과 함께 바이크 두 대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자헌은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 그 낯이 익은 오토바이를 확인했다. 그것은 그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두 대의 바이크가 반원을 돌며 멈춰 섰다. “이런….” 낮게 혀를 차며 자헌은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동시에 재영은 평소 애지중지하던 오토바이를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자헌에게로 뛰어왔다. 자헌은 재영을 거의 껴안다시피 멈춰 세우고 물었다. “두 사람이 여긴 웬일이야? 재영이 너 그 동안 일 안하고 이런 곳으로 놀러 다녔던 거냐.” “그건 우리가 할 소리다. 예자헌!!” 누가 보던 말든 재영은 자헌을 움켜쥐고 빽 소릴 질렀다. 걱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태평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자헌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괘씸함에 재영은 자헌의 멱살을 움켜쥐고 짤짤 흔들었다. “무슨 짓이야!?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미안, 미안.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주라.” 자헌은 마구 흔들리며 상황을 장난스럽게 만드는 말을 했다. 재영은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야 싹싹 빌고 살살 달래주면 되는 일이었고, 그런 일은 자헌의 특기였다. “도대체 어떤 놈들에게 끌려갔던 거야? 장원이가 멀리서 보긴 봤다는데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잖아. 그 자식!!” 부지런히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재영은 자헌이 끌려가 얻어맞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더듬어 보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헌은 쓴웃음을 짓고는 재영의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워주고 밤송이처럼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프터가 엉망인 사람에게 초대를 받았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어. 사람을 착각 했나 보더라고, 덕분에 무사히 풀려났지. 그나저나 너 여기 있다가 순찰대에 걸리면 바로 아저씨한테 보고 올라간다.” 은근한 협박까지 덧붙여 재영을 안심시키며 자헌은 저만치에 말없이 서있는 무흠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새까만 눈자위가 번뜩거린다. 무흠의 험악한 반응이 아니라도 두 사람만 따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걱정 시켜서 정말 미안하다. 그런데, 재영이 너 일하는 중에 무턱대고 튀어나온 것은 아니겠지?” “그게…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말이지. 마침 옆에 한중이도 있고 해서 맡기고 왔는데.” 멋쩍어 하는 재영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꾸욱 밀며 자헌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거 한중이한테도 미안한 일을 했잖아. 난 무흠이한테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할 테니까. 넌 일단 가게로 들어가라. “뭐야, 싱겁게.” “무사해서 미안하다. 천재영.” ‘오랜만에 한건 올릴 수 있나 했더니’ 라며 짐짓 아쉬운 척을 하는 재영의 태도에 자헌은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윽….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자헌과 재영이 떠들썩하게 해후의 기쁨을 나누는 사이 무흠은 저 두 사람에게 떨어져 선 채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헌은 그런 무흠의 반응을 살피다가 그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재영을 보내고 가까이 다가왔다. “찾아 다녔다며?” 순간 무흠은 태연하게 어깨에 닿아오는 자헌의 손을 탁 쳐냈다. 그리고 잡아먹을 듯이 험악한 얼굴을 자헌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가 빠드득 이를 간 뒤에 휙 돌아섰다. 정신없이 자헌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무흠을 기분을 땅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이다. “연무흠. 넌 알고 있겠지? 내가 뭣 때문에 잡혀 왔었는지.” 자헌은 그대로 자신을 남겨두고 가려는 듯한 무흠에게 한마디 했다. 막 시동을 걸던 무흠은 고개를 돌려 욕이 나올 정도로 태평한 자헌을 노려보았다. “멀쩡한 걸 보니,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무흠의 무뚝뚝한 말에 자헌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영이에게는 보이지 않던 쓴물을 삼킨 듯한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 사람은 네 빚을 내게서 받아 내고 싶어 했어.” “만약 그랬다면 그 남자가 널 그대로 놓아주었을 리 없어.” 자헌의 말에 무흠이 한순간 표정을 굳혔지만 곧 그럴 리 없다는 듯 단정적으로 말했다. “과연… 그럴까?” 고집스러운 표정의 무흠을 보며 자헌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문제였으니 자헌이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조금은 서운한 게 사실이다. 지금 무흠은 짧은 동안 나누었던 자헌과의 교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너에게 있어 나는 어떤 존재지?” 세워두었던 바이크에 올라탄 채 어딘지 초조해 하는 무흠에게 자헌이 물었다. 만약 안형진의 말이 사실이고 무흠에게 자헌 자신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상대라면 확인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 무흠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멀거니 자헌을 건네다 보았다.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무흠은 답할 말이 없었다. 그로서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무흠이 지나온 삶은 순전히 생존 경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되는 세계에서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모두 적(敵)일 뿐이었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무흠의 모습에 자헌은 질문의 내용을 바꾸었다. “나는 네게 …특별한 사람이냐?” 순간적으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특별한’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무흠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자헌은 무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흠은 안형진에게 잡히고도 사지 멀쩡하게 풀려난 자헌을 보며, 어떤 의미로는 이 녀석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헌이 던진 질문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닐 터였다. “…넌 아무것도 아냐.” 한참만에야 무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냉정한 대꾸에 자헌은 그 단정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쓰게 웃는다. 그 순간 무흠은 가슴 어딘가가 따끔하고 쓰려왔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네 말대로 나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자헌은 어딘지 납득하지 못한 채 대답도 듣지 않고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는 바이크를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그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묻는 듯한 맑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무흠을 뒤쫓는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자헌의 그 눈이 무흠을 따라다녔다. 자헌이 안형진에게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정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열을 받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정도로 멀쩡하게 눈앞에 나타난 예자헌이라는 존재가 불쾌했다. 자헌이 누구에게 잡혔다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여야 했다. 그런데 혼비백산해서 달려가다니 그것이야 말로 안형진의 의도가 아닌가. 물론 자헌은 그 동안 무흠이 알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고, 얼굴도 성격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외에 다른 의미는 필요치 않았다. 독점욕을 부릴 정도로 ‘내 것’이라는 종속감이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헌이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어야 했다. 한순간 상처받은 듯 미간을 찌푸리던 자헌을 생각할 때마다 무흠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그에게 있어 특별함이란 곧 귀찮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 날 이후로 무흠은 내내 심기가 언짢았다. 어차피 들어봐야 알아먹지도 못할 놈의 수업을 젖힌 무흠이 어찌된 일인지 귀찮게 뒤를 따르는 한중을 달고 어슬렁거리며 옥상위로 올라갔을 때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자헌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내어준 채 책을 읽고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자 얼굴을 들었다. 며칠 만에 보는 자헌의 모습에 무흠은 머쓱하니 시선을 피하며, 자헌의 무릎을 베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교복재킷까지 덮고 누워있는 염치없는 녀석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하지만 자헌은 무흠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삐죽이 나와 있는 낯 모를 상대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쓸어 넘기며, 다른 쪽의 세워진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느긋하게 말아 쥔 책으로 눈을 돌려버린다. 무흠을 뒤따라 들어오던 한중은 자헌의 그런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범생이들이 어쩌다 한두 번 수업을 빼먹더니 이제 아주 막나가기로 했는지 하는 행동에 거침들이 없다. 2년 동안 잘하다가 하필 3학년이 되자마자 삐뚤게 나가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같이 땡땡이를 쳐도 저쪽과 이쪽은 보는 눈부터가 다르다며 툴툴거리던 한중은 하마터면 갑자기 멈춰선 무흠의 경직한 등에 부딪힐 뻔했다. 순식간에 저쪽으로 날아간 무흠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자헌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앗’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자헌은 물론 한중 역시 ‘끙’ 하고 신음하며 일어서려는 상대를 거만하게 깔아보고 있는 무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제야 한중은 예자헌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잘만한 간 큰 인간은 천재영이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혀를 찼다. 나직한 욕설이 들리고 걷어차인 곳을 문지르며 재영이 머리를 흔들어 잠을 떨쳐낸다. “선배 괜찮으세요?” 끙끙거리는 것을 부축해 일으키며 묻자 재영은 거칠게 그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며 욕을 한다. “연무흠. 이… 개잡놈의 새끼!!” 어디서 욕을 배워오는지 날이 갈수록 입이 거칠어지는 재영이 아슬아슬하게 등허리에 덮여 있던 자헌의 교복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저 녀석 돌보는 건 그만 두라고 했을 텐데.” 흥분한 채 멱살을 잡아 올리는 재영을 코끝으로 무시하며 무흠은 자헌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순간 재영이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헌이가 네 거야? 내가 무릎을 베든 끌어안고 자든 네 놈이 무슨 상관인데!? 알고 지낸 기간으로 따지나, 같이 밥을 먹은 횟수로 보나, 함께 잠을 잔 것으로 쳐도 내가 네 놈 보다는 훨씬 더 무릎베개를 할 권리가 있다는 걸 모르겠냐!!” 어째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재영은 인왕처럼 서서 당당하게 외쳤다. 순간 자헌은 고개를 흔들며 엄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가져다댔고, 무흠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그 와중에도 한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 “….” “….” “선배. 점심 아직 안 드셨으면 제가 한턱 낼 테니 가시죠.” 분위기가 싸하니 가라앉자 한중은 눈치 빠르게 아직도 열이 받아 씩씩거리고 있는 재영을 잡아끌고 옥상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연무흠 어디 두고 보라는 둥 하는 재영의 고함소리가 닫힌 문틈으로 점점 멀어진다. “연무흠.” 나직하게 울린 목소리에 무흠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굳혔다. 따지고 보면 무흠은 그 날 자헌을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특권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무흠은 재영이 자헌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무흠으로서는 멋쩍을 수밖에 없었다. 자헌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모르는 척 딴전을 피우는 무흠을 올려다보며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너 좀 전에 사력을 다해서 찼지?” 이번 달에 들어와 시작된 무흠의 기행에-정말 기행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거리들도 옥상출입을 기피하게 된 이 시점에서 무흠이 오늘 또 다시 일을 벌인 것이다. “그냥 살짝 걷어낸 거야.” 자못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마음먹고 찼으면 어디 한군데 부러뜨렸지. 라며 오히려 불만을 토로한다. “아무리 그러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발로 찰 것까진 없지 않아?”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하는 말에 무흠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자헌을 노려본다. 하지만 무흠은 자헌의 타박에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재영이 팽개쳐 두었던 재킷을 주어 자헌의 발치에 떨어뜨린다. 나름대로의 호의인 모양이다. “살짝 경고만 한 거다. 다시는 그런 짓 못하도록…. 너는 내 것이라고 했을 텐데.” “억지 그만 부려. 연무흠. 너 네 입으로 한 말도 잊은 거냐. 그게 아니라도 이제 네 그 억지에 장단 맞춰줄 생각 없다.” 자헌이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던 무흠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거의 허공을 한바퀴 돌듯이 회전하는 몸의 반동을 이용해 무흠은 그대로 자헌을 깔고 올라탔다.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한참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헌은 얼결에 급습 당해 딱딱한 바닥을 구른 데다 가슴 위에 올라타고 앉은 무게에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내보였고, 무흠은 무흠대로 시건방진 말을 하며 자신을 밀어내는 자헌을 내려다보며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놔!” “….”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연무흠.” 자헌이 자신의 멱살을 올려붙인 채 숨통을 조이고 있는 무흠의 팔을 움켜쥐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무흠은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내가 놓아줄 것 같냐.” 어딘지 상당히 삐딱한 표정을 하고 무흠은 자헌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거스르면 아무리 너라도 안 봐 준다.” “나 역시 바라는 바다. 누가 너 따위한테….” 순간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정확하게 치고 빠지는 재빠른 주먹질에 눈앞이 핑 돌고 숨조차 쉴 수 없었지만, 자헌은 신음성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주먹을 움켜쥔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흠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래도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냐? 내 옆에 있는 친구조차 보아 넘길 수 없으면서 말은 아주 잘도 하는구나. 연무흠.” 자헌은 이를 드러내고 빈정거리며 무흠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펀치는 확실히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긴 했지만 그 동안 무흠의 행적으로 보아 이 정도면 봐줘도 많이 봐준 것이다. “그렇게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줄 수도 있어.” 조금 긴 듯한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무흠의 사나운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분명 어딘지 모르게 악랄함이 느껴지는 눈초리였지만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헌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세상 천지에 너한테 의미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냐.” 서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맞붙이고 두 사람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없어.” 무흠 역시 자헌의 얼굴을 구석구석 훑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변함이 없었다. 그 고집스러운 대꾸에 자헌은 팔을 들어올려 무흠의 목을 감아 내리며 속삭였다. “친구든 연인이든 아니면 네 부하든 이번 기회에 조금 특별한 존재를 하나 만들어 주지!” Fatboy Slim의 정신없는 음악이 불도 켜지 않은 지하 카페를 가득 채웠고 곧 음악 소리에 사이사이로 작은 신음이 섞였다. “하….” 어둑한 카페의 한쪽 벽에서 사람의 인기척과 함께 검은 실루엣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벽을 향해 돌아서서 등 뒤에서 밀어 붙이는 대로 움직이던 이가 상체를 틀고 상대의 목에 팔을 감아 당기며 키스를 했다. 정신없이 키스를 되돌리던 뒤쪽의 남자는 이어진 부분이 빠지지 않도록 그렇지 않아도 잡고 있던 허리를 고쳐 쥐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래… 윽! 그만….” “웃기지마 한껏 열이 올라 있는 주제에.” 엉덩이 골짜기를 엄지손가락으로 벌리고 잘게 찔러 올리며 뒤쪽의 남자가 비웃듯이 말했다. 바지만 끌어 내린 채 당하고 있었지만 얼핏 비슷한 체급이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폭력이든 뭐로든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으로 한껏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장래용. 죽인다.” 명백한 협박의 말임에도 래용은 의종의 목소리에 흥분했다. 삽입당한 상태인 의종은 더욱 거칠어진 래용의 움직임에 이를 갈았다. 전립선 사정이라는 것에 익숙해진 몸은 가끔 이런 관계를 원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은 이 어린놈에게 깔보일 남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이 녀석이 이쪽으로는 유일한 상대라 해도 말이다. “윽… 의ㅈ… 형!” 래용은 의종을 벽에 밀어붙인 채 몸을 떨며 사정했다. 그리고 천천히 뜨거운 살 속에 파묻혀 있던 성기를 끄집어내며 래용은 잘게 경련하는 의종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끝났으면 떨어져.” 하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의종은 자신이 남자인 그것도 어린 녀석과 이런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끔찍이 싫어했다. 거의 반 장난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처음에는 술김이라는 것도 있어 웃고 넘길 셈이었는데, 이 녀석이 찰싹 달라붙어 웬일인지 지지부진 하게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그래서 의종은 래용에 대해서만은 더욱 냉정하게 대하곤 했다. “빌어먹을 새끼. 장화 끼고 하랬잖아!” 의종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래용의 흔적에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언제나 만나면 다짜고짜 달려들어 정신없이 삽입하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종은 일부러 역정을 냈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뻗어오는 손을 쳐내고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간다. 래용은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그런 의종을 씁쓰름하게 지켜보았다. 그렇게 혼자 뒤처리를 하고 나올 때쯤에는 완벽하게 평소의 그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래용이었다. 좋은 점을 찾기보다는 비열하고 나쁜 점을 찾는 게 쉬운 남자다. 자신들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게이커플이라도 보게 되면 기의종은 사내 녀석들끼리 붙어먹다니 더럽다며 태연히 침을 뱉을 정도로 완벽하게 이중적이었다. 래용이 자신 때문에 안형진과 싸우고 패거리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걸로 안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은 정말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후레자식임에도 래용은 왜 자신이 그에게 반해 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일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일 시켜 달라며. 청소 시작해.” 급한 정사의 흔적 따위 깨끗이 지워 없앤 의종은 아직도 벽에 기대 서있는 래용에게 명령했다. 래용은 그런 의종을 물끄러미 쳐다본 뒤 말 없이 일어나 방금 전의 자신들의 흔적을 치우고 대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의종은 담배를 피워 물고 그런 래용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너, 연무흠 잘 알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래용은 걸레질을 멈추고 걸대 끝에 팔을 올린 채 기의종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웬일인가 했더니 오늘 또 그 일 때문인가 하고 래용은 의종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곤란한 일을 시킬 때마다 의종은 래용과 그 짓을 하곤 했다. 분명 래용과의 섹스를 비즈니스의 하나로 생각하는 게 편했던 것이다. “…안다라기 보다는 자주 부딪히지.” 래용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의종의 안색을 살폈다. 약삭빠르게 생긴 얼굴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있지 않지만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래용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바닥에서 안형진이 언젠가 연무흠을 잡을 것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몇 년 동안 뜸을 들이고 있지만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럼 연무흠이 요즘 데리고 다닌다는 예자헌이란 녀석도 알겠군.” 의종의 말에 래용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아닌가. “뭐, 본적은 있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지만 인상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때?” 하지만 의종은 래용의 반응 따위 관심도 없는 듯 했다. “…어떻냐니? 나는 그냥 몇 번 얼굴을 봤을 뿐인데.” “그 녀석에 대해서 좀 알아봐! 특히 연무흠 그 자식하고 어떤 관계인지. 친한지 어떤지.” 의종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하고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하지만 래용은 이번 일이 그냥 그저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연무흠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의종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곧 안형진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안형진과 연무흠의 악연을 생각했을 때 조용히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연무흠 뿐만이 아니라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해 달고 다닌다는 예자헌이란 친구의 이름까지 나오자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쉽게 짐작이 되었다. 아무래도 타깃은 연무흠이 아니라 예자헌인 듯 했다. “글쎄…. 가능할지 어떨지. 우선 난 그 녀석들한테는 적(敵)이나 마찬가지라.” 단 한번도 의종의 부탁을 거절한 적 없던 래용은 어찌된 일인지 이번 일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싫으면 빨리 말해. 딴 놈 시킬 테니까.” 그러자 의종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정하게 말을 잘라냈다. 이렇게 되면 그와 좀더 오래있고 싶은 래용은 자연히 벌떡 일어서는 의종을 잡아 앉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확히 뭘 알아다 주면 되는 거야? 그 놈들이 친하냐고 묻는 거라면 꽤 친해 보이던데.” 래용은 의종의 살벌한 시선에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며, 두 사람이 같이 있던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의종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는지 눈가의 상처를 못마땅하게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무흠이 그 자식한테 예자헌이 특별한 존재인지 아닌지 그것만 알아와.” ‘특별함’이란 단어에 래용은 순간적으로 자신들을 떠올렸고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입에 담았다. “어떤 특별함? 우리 같은 사이를 말하는 거라면….” 순간 주먹이 날아와 래용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래용은 익숙한 듯 약간 뒤로 젖혀진 고개를 바로하며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헛소리 지껄이지 마!” 방금 전까지 몸을 섞고 있었던 주제에 의종은 누가 들을까 겁이라도 나는지 버럭 화를 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당할 때마다 래용은 입맛이 썼다. 이빨에 찢겼는지 금세 입안에 고인 피를 억지로 삼키며 의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의종은 래용의 그 강한 시선을 슬쩍 비켜가며 말을 잇는다. “너는 그냥 예자헌이 어떻게 됐을 때 연무흠 그 개새끼한테 데미지가 얼마나 갈지 그것만 알아내면 돼.” 래용은 이런 의종의 약삭빠름이 불쾌했지만, 반한 입장 상 뻔히 알면서도 이용당하고 마는 것이다. 막 어두워져 가는 시각 공원 입구에는 이미 녀석들이 몰려 와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자헌은 그들을 한번 둘러본 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자신의 오토바이 앞에 쪼그리고 앉은 무흠을 내려다보았다. 버젓이 교복을 입은 채로 버티고 서 있는데도 자헌에게서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안형진씨와는 어떻게 된 관계냐?” “하루 종일 쫑알쫑알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무흠은 다 타 들어간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내며 귀찮아 죽겠는 얼굴을 하고 빈정댔다. 하지만 어떻게 물어도 명확하게 답을 하지 않으니 자헌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받는 사람이 당연하게 받지 않으니 문제였지만. “그 사람 내가 너랑 알고 지낸다는 이유만으로도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왜 그러는지 알아야 무슨 대처를 할 거 아니겠냐.” “그 인간한테 잡히고도 멀쩡하게 살아나온 주제에 무슨 소리야?” 코웃음을 친 무흠은 갑자기 자헌의 무릎 뒤쪽을 쳐서 주저앉힌 뒤 키득거린다. 자헌은 완전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무흠을 돌아보았다. 그때 저만치서 여자들의 비명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을 때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애들이 그들 패거리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바이크를 태워달라고 조르는 중인 듯 했다. 여자애들 태우고 기분 내다가 사고 내는 것은 순간이다. 종종 있는 일인지라 무흠은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 저 오빠 알아!!’라는 소리와 함께 둘러싸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멀찍이 둘러서서 조잘대기 시작하자 무흠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진다. 자헌은 그런 무흠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흠의 성격으로 보아 언짢은 심기를 말로 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줄 공산이 컸다. “야들아, 그 오빠는 꼬셔봤자다. 수 틀리면 여자들도 두들겨 패는 인간 말종이니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걸.” 막 자헌이 그녀들을 향해 말을 하려는 순간 바이크 한대가 여자애들을 반으로 가르며 그들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짧게 자른 노란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잘생긴 남자의 등장에 또 자신들끼리 시시덕거린다. 래용은 그녀들을 향해 윙크까지 하며 쇼맨십을 뽐낸 뒤 자헌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한다. “헤이, 오랜만!” 시끄럽던 여자아이들은 더 손쉬운 상대를 찾아 떠났지만 갑자기 끼어든 래용 탓에 이 곳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무흠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놀고 있던 녀석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다. 평소 두 패거리 사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래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뻔뻔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민감하게 주변의 반응을 알아차린 자헌이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래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냥 말 놓지 그래. 너 3학년이지?” “무슨 일이냐? 장래용. 너희들이 모이는 곳은 이 쪽이 아닐 텐데?” 자헌 대신 조용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재균이 나섰다. 그는 무흠들보다 연상으로 이제 모임이나 싸움에 그 전처럼 자주 참석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패거리 내에서의 발언권은 컸다. “이런이런 이쪽이야 말로 오랜만이군요. 어째 못 본 사이에 점잖아지신 것 같습니다그려. 오늘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저 친구에게 볼일이 있는 것뿐이니 좀 봐주시죠.” 능청스럽게 말은 잘한다. 하지만 래용이 가리킨 상대가 자헌이 되자 가까이에 있던 패거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자헌은 그들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무흠의 친구였던 것이다. 그러니 무흠의 허락이 없이는 래용이 멋대로 데려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나한테 볼 일이라니?” 내버려두면 더 험악해질 것 같은 분위기에 자헌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무흠 패들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어느새 이 건을 자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무흠이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 딱히 아무런 말도 없었기 때문에 더 했다. “저 친구에게 가기 전에 너는 우리부터 상대해야 할 걸.” 재균이 앞을 막아서자 래용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어버린다. 별 일도 아닌 것으로 괜히 소란피우기 좋아하는 패거리들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거 너무 몸 사리는 것 아닙니까? 그냥 뭐 좀 물어보려는 것뿐인데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네 녀석 속셈을 모를 줄 알고!?” 느물대는 래용의 말투에 재균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둘러서 있던 녀석들도 각자 한마디씩 한다. “괜히 딴전 피우지마 너 사실 정탐하러 온 거 아냐?” “전에 그 싸움도 네 놈들이 먼저 걸어온 거였을 텐데? 설마, 또 우리 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장래용,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마라.” 그들 모두 이미 래용이 이 곳에 온 본래의 목적은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아예 각자 떠드는 분위기이다. 전에 싸움이 났을 때 어떤 놈이 이러저러한 비겁한 짓거리를 했다는 등의 한심한 이야기로까지 화제가 옮겨가고 있었다. 래용은 무흠 패들이 지껄이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재균을 쳐다보며 씨익하고 웃는다. “하여튼 재미있다니까. 어떻게 이런 녀석들이 싸움만 시작되면 미쳐 날뛰는지. 이래서 전통이 중요하다는 건가.” “장래용. 지금 비꼬는 거냐?” “설마, 이래봬도 칭찬하는 겁니다.” 넉살 좋은 녀석답게 단신으로 적진에 와서도 기죽는 법이 없다. 재균은 래용의 그런 싱글거리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쓰며 한마디 하려는데, 이제까지 잠자코 앉아만 있던 무흠이 슥하니 일어섰다. 순간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던 녀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기괴한 정적에 근처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던 녀석들이 싸움이라도 나려나 하는 기대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힐끔거린다. 무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헬멧을 집어 자헌에게 던져주고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뜻이 전달이 되었는지 자헌 역시 별 말없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패거리들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해보인 뒤 무흠의 뒷자리에 올라타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래용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멀어져가는 녀석들을 쳐다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래용은 더욱 더 기가 막혔다. 보통은 아무리 짱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리거나 하면 맨 처음 튀어나오는 말은 욕지거리이게 마련이다. 적어도 ‘더럽게 폼 재네.’ 정도는 나와 줘야 정상일 텐데, 여기 이 녀석들은 연무흠이 저러는 이유가 자신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기 때문이라고 완전히 믿고 있는 듯 했다. “당신들 꼭 저런 녀석한테 뒤를 물려줬어야 했나?” 래용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흠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는 재균에게 물었다. “그런 의견도 있긴 했지만 아무도 저 녀석에게 뒤를 물러주거나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보니 모두들 저 놈을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더군. 완전히 낮도깨비 같은 놈이야.” 의외라고 할 만큼 재균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들 패거리 내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금기도 멋도 아닌 듯 했다. “그 인간이 알아오라는 게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저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그래.” 래용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오토바이의 궤적을 눈으로 쫓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래용은 이 패들처럼 무흠이 사라진 원인이 단지 시끄러웠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평소 성격으로 보아 저 연무흠이 굳이 예자헌을 달고 갈리는 없다. 녀석은 분명 예자헌을 래용과 같이 남겨두는 걸 꺼렸던 것이다. 제3장. 흑우 칠흑같이 어두운 밤. 불길한 일을 예시라도 하듯 조용한 도로 위로 에일 듯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빗소리에 섞여 거친 기계음이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빗길에 아랑곳 않고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헤드라이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빛이 가까워짐에 따라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매복하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비에 젖은 담배를 버리고 세워 놓았던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푹 젖은 늘씬한 그림자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쇠파이프를 손안에서 굴리며 어둠 속에서 숨죽여 웃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 무색할 만치 잔혹한 미소였다. 곧 어둠의 장막을 찢고 싸구려 튠업으로 소리만 요란한 그들의 오토바이가 이 쪽을 향해 다가왔다. 빗길에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텐데 그들 중 누구도 속력을 줄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치기 어린 행동의 결과 따윈 그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가까워졌던 오토바이들은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기다리던 그림자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대략 십여 대의 바이크가 지나가고 나자 그림자는 비로소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일행의 맨 뒤에 달리던 소년은 곧 자신들을 좇고 있는 존재를 깨달았다. 하지만 쏟아 붓는 빗줄기로 인해 시야 확보도 어려운 판에 뒤쪽까지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룹의 막내로 면허도 없이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소년에겐 이런 날씨에 도로를 달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흥분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바짝 따라붙는 존재를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상대가 자신의 옆으로 나란히 치고 나왔을 때였다. 빗줄기와 무관하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상대의 존재감에 밀려 언제 미끄러질까 순간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룹의 막내로 일행의 맨 뒤에 달리던 소년은 면허도 없이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소년에겐 이런 날씨에 도로를 달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흥분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쏟아 붓는 빗줄기로 인해 시야 확보도 어려운 판에 뒤쪽까지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덕분에 뒤에 바짝 따라붙는 존재를 눈치챈 것은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상대가 자신의 옆으로 나란히 치고 나왔을 때였다. 빗줄기와 무관하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상대의 존재감에 밀려 언제 미끄러질까 순간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낯선 인물의 출현에 경찰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별다른 제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자신들과 같은 폭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옆을 달리던 오토바이가 어느 순간 하얀 몸체를 빛내며 소년의 눈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소년은 어두운 빗줄기 속에서 헬멧도 없이 달리던 상대를 알아보았다. 상대는 까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년은 갑자기 뱃속이 싸해지며 등줄기로 오싹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읏!!!” 자신도 모르게 ‘악마’라는 말을 입 밖에 냈지만 미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챈 순간의 동요로 인해 소년은 속력을 줄일 새도 없이 밸런스를 무너트리며 그대로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죽음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며 소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저만치 멀어지는 그 유명한 악마 연무흠을 태운 새하얀 오토바이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불꽃을 일으키며 미끄러지는 궤적을 알아챈 몇몇 아이들이 오토바이의 속력을 줄이는 순간 혼다가 묘기를 하듯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리고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이를 간다. “씹!! 저 새끼, 연무흠이잖아?!” “저 미친놈 파이프 들었어!” “너희들은 연성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봐!” 목청이 다 닳도록 소리를 지르며 그들 중 몇은 쓰러진 동료에게 향했고, 나머지는 혼다를 좇았다. 연무흠의 목표는 한성준이 분명했다. 그들 사이에서 연무흠과 안형진의 반목은 유명한 것이었다. 시작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이미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연무흠은 지금 며칠 전의 습격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안형진이 없을 때 그와 각별한 사이인 한성준을 노리고. 맨 앞에서 달리던 한성준은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연무흠의 존재를 눈치 채고 속력을 올렸다. 어느새 거센 빗줄기는 잠잠해졌지만 두 대의 오토바이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비에 젖은 도로 위를 질주하자 물안개가 날렸다. 성준은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바이크를 운전하며 자신을 바짝 뒤쫓는 혼다를 재빨리 돌아보았다. 연무흠이 자신을 쫒는 이유는 뻔했다. 형진이가 부숴버린 녀석의 가와사키에 대한 복수임이 분명했다. 어느 순간 휙-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무흠이 휘두른 쇠파이프가 카울을 깨부수자 한성준은 이것이 단순한 복수의 개념을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인가 봉이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자, 한성준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빨리 했다. 저 악마 녀석은 자신을 죽일 생각인 게 분명했다. 평소 기분 나쁠 정도로 예쁘장한 모습을 한 연무흠에 대한 악랄한 소문을 듣곤 했지만 모두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로등 빛에 비치는 연무흠의 그 악명 높은 얼굴에 걸린 잔인한 미소는 한성준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얼굴 주변에 착 달라붙어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그리고 사나운 눈초리와 치켜 올라간 입 꼬리는 소문 그대로 악귀 같았다. 두 대의 오토바이 엔진 소음 속에서 「드르륵」하고 연무흠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가 땅을 끌리며 불꽃을 일으킨다. 피부를 찌를 듯이 와서 박히는 빗방울이 한층 민감해진 감각을 일깨웠다. 순간적으로 형진에 대한 생각이 성준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검고 음울한 눈빛의 악마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잊혀졌다. 『죽어』 입 모양만으로는 들릴 리가 없는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준은 연무흠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자신의 오토바이 바퀴 사이로 찔러 넣는 것을 보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성준의 바이크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사방에 불꽃을 뿌리며 성준의 오토바이가 거꾸로 처박힌 채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그 사이 연무흠의 하얀 혼다는 까만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고, 뒤쫒아 오던 패거리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박살 난 오토바이만이 파편과 함께 빗물에 섞인 피웅덩이 속에 남아 있었다. “…연무흠.” 막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젖어든 담배꽁초를 도로 위로 튕기며 안형진은 이 사이로 악마의 이름을 되뇌었다. 오늘이 바로 한성준의 세번째 기일이다. 매년 그렇듯이 성준의 기일마다 비가 내렸고 더불어 형진의 기분 또한 최악이었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모두들 연무흠이 한성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의종이 형진과 성준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었다. 비록 성은 다르지만 한성준은 안형진의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형진이 뒤늦게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와 완전히 미쳐버린 것도 당연했다. 특히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의종은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성준의 눈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건 의종이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많은 친구들이 떠났지만, 의종은 반쯤 미친 채 광기어린 얼굴로 돌아다니는 안형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늘은 화내지 마십시오. 성준이 녀석, 형님이 화내시는 걸 싫어했잖습니까.” 기의종은 침착하게 형진의 너른 등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사고가 있었던 도로를 마주하고 서 있는 안형진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성준의 환영이라도 보이는지 형진은 미동도 하지 않고 눈앞의 어느 곳에 시선을 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제법 쏟아질 것 같은데요.” 의종은 우중충하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쏟아져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들었을 때쯤 안형진의 단호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의종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원망도 분노도 스며있지 않은 자조 어린 어조에 의종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안형진은 굳은 얼굴로 가드레일에 기대 서 있는 기의종을 돌아보았다. “전의 그 친구, 확실한 것 같으면 다음주 내로 잡아들여.” 비에 젖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명령했다. 의종은 대답대신 형진의 음울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햇수로 사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린 뒤에야 그들은 한성준의 복수를 하게 된 것이다. 똑같이 보복해주겠다던 맹세 그대로 안형진은 연무흠에게 자신이 느껴야 했던 그 절망감을 고스란히 되돌려줄 심산이었다. 사랑하는 자를 잃는 상실감과 그 자리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자책, 원망과 끝없는 회한을 이제는 돌려줄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인간적인 마음이 아예 없다는 연무흠이 감정을 품은 상대가 생길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려온 형진이었다. “예자헌이라….” 형진은 비에 젖어 검게 빛나는 도로를 쳐다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어젯밤 쏟아져 내린 빗줄기의 영향인지 온 몸이 끈적거렸다. 아니, 이건 습기 탓이 아니라 꿈 때문이다. 온몸을 덮쳐오는 나른한 기운이 묘하게 근질거리는 다리 사이의 열을 높였다. 벌거벗은 몸을 침대 시트에 문지르며 무흠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도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섹스를 하는 꿈을…. 눈을 감자 적당한 근육이 잡힌 등허리가 보였다.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닌 부드러운 근육이었다. 이쪽에 등을 돌린 채 엎드려 있는 상대의 몸이 구겨진 시트 안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팔꿈치를 세우고 어깨를 움츠리자 견갑골이 튀어나온다. 그 밑으로 매끄러운 등줄기가 그 어떤 동작을 연상시키듯 긴장한다. 시선을 내리자 허리와 꽉 조여진 엉덩이가 유혹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아…’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며 살짝 무흠을 뒤돌아본다. 찰랑이며 가라앉은 앞머리 사이로 눈에 익은 콧마루가 얼핏 스친다. 귓가에 시트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무흠은 어느새 고여 있던 침을 힘겹게 삼켰다. 문득 손을 뻗어 등을 쓸어 내렸다. 순간 ‘핫!’하고 상대의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느끼고 있다. 무흠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 확실히 느끼는 몸짓을 한다. 다시 한번 침을 참키며 무흠은 손바닥을 최대한 펼쳤다.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등, 그리고 허리까지 쓸어 내렸다. 순간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였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리멍덩했지만 무흠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도수 높은 술을 들이마신 것처럼 목덜미에서부터 가슴 속까지 뜨겁게 타올랐다. 취기가 올라와 무흠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녀석은 계속해서 사타구니를 시트에 문지르며 무흠을 유혹했다. 현기증이 나고 목이 탔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무흠은 상대의 발꿈치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은 다리를 벌렸다. 쭉 뻗은 모양 좋은 다리가 벌어지며 다리 사이의 고간을 내비쳤다. ‘흐…’ 조르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눈두덩에 열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저 몸을 어떻게 하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른다. 무흠은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로 상대의 몸을 쓸어 올리며 그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었다. 다리가 좀 더 벌어지며 시트에 닿아 있던 허리가 살짝 들린다. 순간 무흠은 상대의 발기한 성기를 한손으로 움켜쥐었다. ‘흠!!’ 사지가 굳어지는 것을 보며 무흠은 비릿하게 웃었다. 기분이 고양되었다. 이대로 얌전히 갖기에는 아까운 몸이었다. 온 몸에 자신의 잇자국을 내고 눈물을 흘릴 때까지 천천히 괴롭히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대로 쑤셔 넣어 피를 보고 싶기도 했다. 광폭한 충동이 무흠의 몸 안에서 날뛰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오싹한 쾌감이 일었다. 무흠은 욕심대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작은 구멍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몸이 시키는 대로 작은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꽂아 벌린 채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순간 엄청난 압박감에 숨이 막히고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허-억!!” 목이 조여 오는 듯한 숨막힘에 힘겹게 공기를 들이 키던 무흠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귓가에는 자신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멍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정신없이 땀에 젖은 얼굴을 문지르고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다른 사람이 침입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마치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숨이 찼다. 무흠은 눈을 찌르는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묘하게 무거운 허리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프도록 발기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들은 소문의 여파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재영은 지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자신은 타지도 못하는 오토바이를 기천만원을 들여 샀을 때부터 자헌의 정신상태를 의심해 봤어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고 의도대로 행동하는 녀석치고는 이상하게 충동적이었다. 재영은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서 입맛이 썼다. 처음 자신의 입으로 ‘망가져 버려’라고 말을 꺼냈을 때만해도 꽉 막힌 일상에서 벗어나 긴장을 좀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연무흠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무시할 수 없는 소문까지 달고 다닌다. 저 예자헌이 연무흠의 패거리에 들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거기에 그 패거리 내에서는 자헌을 무흠이 녀석의 깔치라고까지 말하는 놈이 생겼다. 이 모든 소동을 오늘에야 알게 된 재영은 기가 막혔다. 그냥 잠시 눈을 뗐을 뿐이다. 그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헌은 돌변했다. 정기수업이 끝나고 있는 심화반 수업도 잘 들어가지 않는 듯 했고, 전처럼 재영을 싸고돌지도 않았다. 아니 두 사람이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재영이 마지막으로 자헌의 얼굴을 본 것이 저번 주 토요일이었다. 재희 누나가 집에 왔던 게 그날이었으니. 그때도 자헌은 재희 누나 얼굴만 보고 휭 하니 가버렸다. 누나는 청춘사업이 바쁜 모양이라고 웃어 넘겼지만 재영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예자헌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물론, 녀석을 붙잡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이, 자헌 있냐?” 재영은 정규 수업이 끝나 어수선한 교실 문을 열고 눈앞의 상대에게 물었다. “예자헌 면회다!” 의자에 늘어져 있던 녀석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재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교실 안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교실 한가운데서 ‘자헌이 찾는데?’, ‘간 거 아냐?’ 등등의 말이 오간 뒤 누군가 한명이 “없어!” 하고 맞고함을 지른다. 그러는 와중에 멀리 맞은편 창가에 기대 서 있던 이장원이 재영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온다. “자헌이 찾냐?” 평소 같으면 절대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반가운 게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 반에서 예자헌과 가장 친한 인종이라면 이 인물일 테니. “이장원.” 꼭 뭐 씹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아는 척을 하자, 이장원은 빙그레 웃으며 유치한 반응에 아랑곳 않고 복도 쪽 창가로 재영을 이끌었다. “자헌이 찾는 거리면 한 발 늦었어. 그 녀석 아까 가는 것 같던데.” 재영의 심각한 표정 탓인지 아니면 스스로도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장원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리고 재영의 어깨를 끌어 당겨 귀엣말을 속삭인다. “어떻게 된 거야? 자헌이 요즘 이상하던데.” 당연히 너는 알고 있겠지? 하고 물어오는 장원의 말에 재영은 얼굴을 굳혔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영은 예자헌이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자헌이 자신에게 마음을 터놓고 있고,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알 수 있으며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이해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재영은 이해는커녕 자헌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재영은 그런 현실에 화가 났다. “…글쎄. 모르니까 묻지. 그런데 자헌이나 너, 수업 더 있지 않냐?” “있기야 있지만…. 그 녀석 심화반 수업 안 들어 온지 꽤 됐어. 난 계속 너랑 같이 다니는 줄 알았는데?” ‘네가 아니면 누구와?’ 라는 의문이 담긴 눈이 재영을 쳐다본다. 이장원의 머릿속엔 예자헌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천재영의 탓이란 공식이라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재영은 태연하게 네 탓이 아니냐는 투로 이야기를 하는 이장원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못 본지 꽤 됐어.” “죽고 못 살던 놈들이 웬일?!” 놀라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며 이장원이 이죽거렸다. “비꼬지 말고 인마. …수업 시간엔 어때?” “뭐, 별로…. 옛날하고 똑같다고 해야 할까. 수업은 잘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대신 수업 끝나면 재빨리 사라지지. 난 계속 너한테 가는 줄 알았다니까.” 재영의 말에 ‘흐음’하고 턱을 어루만지며 이장원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재영은 이장원이 빤히 쳐다보자 조바심이 난 듯 입속으로 투덜댔다. 그러자 방관자처럼 느긋하게 창틀에 기대서 있던 이장원은 팔짱을 바꿔 끼며 심각하게 읊조렸다.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서울대 갈 놈이 계속 그러고 다니면 선생들 난리난다. 벌써 담임한테 한 소리 들었을 텐데도 무시하는 건지 어쩐지…. 더 귀찮아지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 거다.” 본인에게 뿐 아니라 조금 친하다고 인식이 된 장원 자신도 불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느냐는 추궁 비슷한 것을 당했다. 이런 일로 귀찮게 불려 다니며 공부에 지장을 받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다. 딴엔 삼년간 꽤 친한 사이였으니 녀석의 일탈이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집으로 연락 간 것은 아니겠지?” 문득 안 좋은 예감에 재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 그래도 계속 이런 식으로 보충 빼먹고 다음 시험에 점수까지 떨어지면…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재영은 장원이의 말을 들으며 미간에 세로 주름을 새긴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장원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심각한 듯 했다. 연무흠 패거리 어쩌고 하는 소문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 좋아하던 공부-그렇다 예자헌의 취미는 영화와 공부였다-도 내팽개치고 무엇을 하고 다니는 건지, 재영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단 몇 주,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자헌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제길.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재영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뻔히 알면서도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뒀을 자헌을 향해 투덜거렸다. 물론, 본인이야 들을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가슴이 답답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 재영이 무흠이와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 따위 다 잊은 모양이다. 그 녀석은. “너는 전 선도부장 겸 친구로서 그대로 가게 내버려뒀냐?!” 재영은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장원에게 트집을 잡았다. “그래 인마.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라이벌을 또 하나 제거하는 건데, 의리 따위가 문제겠냐.” 재영의 엉뚱한 화풀이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장원이는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말을 받아 넘겼다. 하긴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식의 놀림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선도 당해야 마땅한 생활태도를 가진 이장원이 단지 내신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선도부에 들어 간 일은 두고두고 놀림감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자식. 하긴 네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었지.” 어딘지 힘이 빠진 어조로 재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여기서 이장원을 닦달한다 해서 자헌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도 없어 마냥 허탈하기만 했다. 재영의 그런 투덜거림에 맞춰 수업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장원이는 쓰게 웃으며 교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뒤는 맡길 테니까 해결 잘 해라.” “그래, 인마. 너 혼자 어디 얼마나 공부 잘 할지 두고 보자. 이장원, 이 나쁜 자식아.” 재영이는 자신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쥔 뒤 지나쳐가는 장원이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너 거기서 그렇게 떠들다가는 붙잡힌다? 설마하니 자신이 심화 B반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천재영?” 막 교실로 들어가던 장원은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는 재영을 뒤돌아보며 느긋하게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만치 복도를 달려가는 재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헌이 이상하게 변한 것은 얼마 전 납치사건이 있은 후부터였다고 기억한다. 아니, 자헌이 뿐만이 아니라 저 연무흠까지 어딘지 평소 같지 않았다. 지난 뒤에 생각하면 이렇게 뻔한 것을 자신은 왜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었을까. 재영은 간신히 한중이와 연락이 닿아 오게 된 커피숍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군데군데 다른 교복과 사복이 섞여있긴 했지만 이곳은 지금 상문고 학생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물을 것도 없이 연무흠 패거리들이었다. 익숙하게 아는 척을 해오는 아이들 사이에 재영이 찾던 상대는 없었다. “형,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중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이 정도로 고민 있다고 광고를 하면 누구라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순간 혼자 괴로워하던 재영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중이 너 오늘 자헌이 못 봤다고 했지? 그럼, 무흠이는 어때? 봤냐?” 묘한 박력에 재영을 보고 있던 한중이 움찔 뒤로 물러앉는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로 자신보다 훨씬 작은 재영의 기백에 밀린 것이 쪽팔렸는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아이스티 잔을 들고 후루룩 소리 내어 음료를 마신다. 그러고도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늘 대장 학교 안 나온 것 같던데…. 왜요? 대장한테 볼 일 있으면 핸드폰 해보시지.” 결국 모른다는 얘기다. 한중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 재영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분명 연무흠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예자헌이었다. 그 당황스러움이란…. 특히 한밤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스릴만점의 상황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했던 전화라 더 했다. 무흠이 전화를 왜 네가 받느냐는 이유를 추궁할 새도 없이 자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이 막혀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한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한 번 더 걸리면 길순이의 키를 빼앗는다는 협박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흠의 전화기까지 빌려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예자헌이 연무흠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설마하니, 두 사람이 핸드폰을 교환-이 경우에는 자헌이 일방적으로 무흠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할 정도의 사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 할 수 있을까. 뒤늦게 이런 식으로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는 것 자체가 예자헌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인하고 있는 재영에게는 불쾌한 일이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별로 친한 친구를 빼앗겼다고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기분이 묘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무흠에게 자헌이를 빼앗기다니…. 아니, 아니 이게 아니고. “어이, 이중에 오늘 대장 본 사람?!”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감정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하고 있는 재영이 보기 안 됐던지, 한중이 좁은 커피숍 안이 다 들리도록 크게 소리를 질렀다. 딴엔 도와준다고 한 일일 텐데 재영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평소 연무흠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덩치 큰 후배였다. 그러니 한중이 못 봤다면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웅성대던 녀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못 봤다며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중은 무안함에 멍해 있는 재영에게 ‘다들 못 봤다는데요.’라고 뻔히 아는 보고까지 올렸다. 한숨이 나왔다. “하아….” “형, 정말 괜찮아요? 혹시 오토바이 사느라고 빌렸던 돈 때문이면 제가 어떻게 해볼까요?” 답지 않게 한숨까지 내쉬는 재영이를 보고 한중은 그렇지 않아도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상을 팍 구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중은 아직도 재영이 사채를 빌려 오토바이를 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중이 너, 전에 말했지.” 재영은 한중의 그런 조심스러운 태도를 무시하고 생각에 잠긴 채 말을 했다. “…네?” “네가 그랬잖아. 그 두 사람 이상하지 않느냐고.” 한중의 반문에 재영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재영의 머릿속에는 몇 주 전 한중이 조심스럽게 물어오던 그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녀석은 재영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라니, 누굴…?” 반면 한중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재영의 상태가 몹시 수상스러웠다. 생판 모르는 사이 같았으면 이 사람이 약을 했나하고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고…. “으이그! 자헌이랑 무흠이 말야. 너 얼마 전에 그 두 녀석 뭔가 이상하지 않냐고 나한테 물었잖아?!”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코앞에 들이미는 재영의 말에 한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일 말이죠?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형이 아니라면서요.” 그 화제는 껄끄럽다는 듯 한중은 재영과 시선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 재영은 아예 자리를 한중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행여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낮춰 추궁한다. “내 의견 따위는 잊고 네 생각을 말해 보란 말이다.” 이렇게 재영이 생으로 한중을 고문하고 있을 때, 문제의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해 바이크에서 내려서던 참이었다. 자헌은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일단 머리에 뒤덮고 있던 것이 없어지니 숨쉬기가 편했다. 이래서 무흠이나 재영이 헬멧을 쓰지 않으려고 그 난리를 폈던 모양이다. “후….” 무흠이 노상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우는 동안 자헌은 볼을 부풀려 길게 숨을 내쉬며 눈앞의 고급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 무흠이 핸드폰을 건넬 때 확실히 거절을 했어야 했다. 그것을 받아 든 순간 예자헌은 연무흠에게 붙들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중요한 시기에 부르면 부르는 대로 시간과 장소, 상황을 고려치 않고 달려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핸드폰은 단순히 연무흠이 원할 때 그가 원하는 곳에 예자헌이 존재하기 위한 도구였다. 아마 거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헌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며 무흠의 말을 들어줘야만 하는 순간 약간의 갈등을 느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흠의 부름을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헌의 사정 따위는 전혀 아랑곳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끌어당기는 무흠의 제멋대로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헌은 무흠의 자기 본위적인 성격이, 주변의 시선 따위 깨끗이 무시할 수 있는 그 지독한 이기심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헌은 상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한 그 상대가 어떤 짓을 하든지 그를 버릴 수 없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한 사랑스러움, 그게 지난 십여 년간 자헌이 천재영에게 느꼈던 감정의 실체였고, 이제 연무흠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었다. 물론 재영이와 연무흠은 달랐다. 자헌이 재영에게 느꼈던 것은 친애의 정이었다. 자헌은 재영이에게 그것을 구했다. 자헌은 어린 남동생을 대하듯 재영을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자헌이 무흠에게 느끼는 감정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자헌의 동생이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연무흠에게서는 위험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헌은 자신이 연무흠의 독기에 끌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이나 공포는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예자헌이라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극히 미비했다. 그에게 그것은 단지 스크린 안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무흠을 만났고 자헌은 그 극렬한 색상에 잠식당했다. 실제 연무흠의 외모는 색다운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창백한 피부, 까만 머리카락, 심지어 입술까지 핏기가 없었다. 하지만 자헌에게 연무흠이라는 존재는 선명한 붉은 빛으로 다가왔다. 어딘지 굶주린 듯한 맹수의 눈과 허기진 듯한 시선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그토록 강렬한 색채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녀석에게서 풍기는 그 비릿한 내음이 향기롭기까지 했다. 그러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무흠의 그 폭풍 같은 격렬함에 순응하고 있었다. 연무흠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수업을 제끼는 것 정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헌은 ‘하자!’라는 의미 불명의 한마디와 함께 무흠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이곳으로 끌려왔다. 덕분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자헌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예자헌,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냐.” 무흠은 어느새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자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헌이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다. 아파트 창에 반사되는 햇살 탓에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무흠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쓰게 웃으며 이곳에 오면서 쭉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갈 때 가더라도 말이다, 연무흠. 어디를, 왜, 가는 지나 알고 가자?” 부드러운 채근에 무흠은 자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섹스 하는 꿈을 꿨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깔리는 무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헌은 무흠의 그 꿈과 자신이 이 곳에 와 있는 이유의 상관관계를 여전히 알 수 없어 한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무흠을 마주보았다. “…너와.” 순간, 자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흠의 사나운 시선에 숨을 멈췄다. 기묘한 침묵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두 사람의 머리위로 가라앉았다. 자헌은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주홍색 햇볕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막 무흠이 자헌을 향해 팔을 뻗어 왔을 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듯한 경적 소리와 함께 새까맣게 썬팅 된 벤츠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자, 무흠은 어딘지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자헌 역시 무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움찔 놀란다. 죽은 사람 같은 창백한 피부, 냉철한 표정, 무테안경, 훤칠한 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값비싼 양복, 이십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두 사람을 향해 서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연무흠과 닮아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 또한 비슷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두 사람이 같은 핏줄임을 알 수 있는 특징들이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들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 지나고 멈춰서 있던 시간은 남자의 한 마디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이다.” 남자의 말에도 무흠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무흠이 어떻게 반응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무표정한 입매 끝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요즘 묘한 소문이 돌더구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직하니 왠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느긋한 목소리였다. 남자의 말에 무흠의 어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흠칫 굳는다. “소문?” 하지만 무흠에게서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문 따위 알게 뭐냐는 듯이 코웃음을 치는 무흠을 보며 남자, 연주흠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려고도 않는 어린 동생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동생의 뒤에 서 있는 낯선 소년 아니, 청년을 보았다. 순간 무흠이 뜻밖의 행동을 했다. 시선을 차단한 것이다. 주흠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새겨졌다. 형의 그런 표정을 볼 것도 없이 무흠은 ‘아차’ 하고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헌을 형의 시야에서 가리려고 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내 알 바 아냐.” 자신의 실수를 자각해서일까 무흠은 평소보다 훨씬 더 퉁명스레 말을 끊었다. 그리고 “빨리 꺼지시지.” 라는 건방진 말도 잊지 않는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이들 형제에게는 서로 간에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갭이 있었다. 이 틈을 두 사람 다 메우거나 좁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주흠은 무흠을 살피곤 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무흠의 동향은 어떤 경로로든 주흠의 귀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 해도 두 사람은 형제였고 연주흠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주친 동생은 어딘가 달라보였다. 지금 동생이 등 뒤로 숨기고 있는 저 친구 때문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예감에 주흠은 동생을 향해 오랜만에 형다운 대사를 날렸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주마.” “필요 없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흠은 일언지하에 주흠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 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헌의 팔을 잡아끌었다. 등 뒤로 남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흠은 살짝 진저리를 치며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형님이냐.” 아까부터 무흠은 계속해서 자헌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헌은 그런 무흠에게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눈이 말이다.” 어딘지 즐거운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약간은 들뜬 듯한 목소리에 무흠은 모로 돌리고 있던 고개를 슬쩍 움직인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헌의 입가가 슬며시 풀어진다. “너랑 닮았어. 눈이 마주친 순간 오싹했는데 정말 등골이 시원해지더라.” “너….”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무흠의 시선이 자헌에게로 와 닿았다. 무흠은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헌은 이와 비슷한 말을 하면서 무흠의 눈빛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두 형제는 꽤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헌이 자신의 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무흠은 몹시 불쾌해졌다. 왠지 안타까운 것 같으면서도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흠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껄끄러운 감정이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그 남자와 마주치다니 어지간히 재수가 없는 날이다. 무흠은 미간에 세로줄을 새긴 채 눈앞의 한점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오늘 이 녀석과 섹스를 하려고 했다. 하루 종일, 예자헌과 그 짓을 하면 꿈속에서처럼 그렇게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황홀할지 그것이 궁금했었다. 그 몸을 느껴보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을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참을 수 없었던 무흠은 결국, 종일 뒹굴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헌을 이곳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뭐, 예자헌은 무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형은 몇 살이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것 같던데.” 지금처럼 말이다. 태연하게 웃으며 잘도 말한다. 무흠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놀리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한 표정의 자헌을 노려보았다. “그 남자는 그만 둬.” 자헌은 무흠의 경고를 들으며 내심 쓰게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움켜쥐고 있던 자헌의 팔을 내팽개친 뒤부터 무흠은 계속 뚱한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뭘 물어도 대답도 않고 자헌이 뒤따라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결정적으로 무흠이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휙 하고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는 아무리 자헌이라도 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자헌이 마음을 정하고 뒤돌아섰을 때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문이 열렸다. 무흠은 막 돌아서는 자헌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신발 벗을 틈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끌고 들어간다. 그렇게 끌려들어가며 자헌은 얼핏 무흠의 집을 보게 되었다. 이 집은 어딘가 이상했다. 미처 이삿짐을 다 풀지 않은 것처럼 거실은 텅 비어있는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거나, 식탁도 없이 식탁 의자만 하나 오픈 키친 앞에 놓여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무흠이 자헌을 끌고 온 방도 그랬다. 방 가장자리에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여기저기 다른 물건이 있었던 흔적 또한 역력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이 곳은 무흠 혼자 사는 곳이 분명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은 거의 전부가 남자 고등학생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것들이었고, 청소한 흔적이나 살림을 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이나 집 어느 것 할 것 없이 꽤 오랫동안 방치 되어 있었던 듯 했다. 자헌은 침대에 메고 있던 자신의 크로스백을 던져놓고는 무흠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사람을 끌어다 놓고는 아무 말 없이 베란다 쪽 창틀에 올라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자헌은 무흠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 인간한테 예자헌 너 같은 녀석은 한입거리도 안 될 걸.” 삐딱하게 자헌을 돌아보던 무흠은 피식하고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헌을 향해 한쪽 팔을 내밀고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였다. “너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내가 너랑 섹스 하는 꿈을 꿨다고 했지 않았나?” 가까이 다가가자 무흠은 자헌의 팔목을 움켜쥔 채 이죽거렸다. 그리고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헌과 눈을 맞춘다. 손목을 잡아끌어 가까워진 허리에 팔을 두르자 다가온 몸이 흠칫 긴장한다. 무흠은 자헌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복부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파르르 하는 떨림이 팔 안으로 지나간다. 그와 함께 희미하게 땀 냄새 섞인 달콤한 향이 맡아졌다. “야, 연무흠….” 자헌의 배에 얼굴을 묻고 있기 때문인지 조금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린다. 어딘지 곤란해 하는 자헌의 어조에 무흠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자헌이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무흠은 절대로 그를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어째 하자는데 잘도 따라 온다 했다.” 무흠은 턱을 자헌의 배에 대고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헌 역시 쓴웃음을 머금은 채 무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하자가 이런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라고 말을 이으며 자헌은 손을 올려 무흠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자헌의 이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과연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건지 의아스럽다. 무흠은 자헌이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두피를 마사지하기 시작하자, 그 배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쉰다. “알았다면 안 왔다는 말이냐.”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무흠은 양손으로 자헌의 허리를 감싸 쥐고 밀착 되어 있던 몸을 밀어냈다. 둘 사이에 공간이 생기자 자연히 무흠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자헌의 손이 떨어져 나간다. “…글쎄.” 자헌은 말끝을 흐렸다. 무흠의 의도를 알았다면 자신이 어떻게 했을지 실제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무흠은 자헌의 셔츠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땀이 식어 시원해진 피부에 손가락을 감고 무흠은 긴장으로 굳어진 자헌의 등을 힘주어 끌어당긴 뒤 남은 한 손으로 교복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봐, 네 손이 빠르다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건 좀….” 자헌은 세 번째 단추에 손을 대는 무흠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기가 막힌 듯이 웃음을 짓는데 정말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인 모양이다. “이름.” 무흠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서서 거의 품에 끌어 안기다시피 하고 고민에 빠져있는 자헌을 향해 짧게 말했다. 예전에 재영이에게 그랬듯이 무흠은 자헌이 자신에게 약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비교 대상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을 이용하지 않을 무흠도 아니었다. “응?” 무흠은 틀어 잡힌 팔을 슬며시 빼내며 눈가에 주름을 잡고 있는 자헌을 삐딱하게 올려다본다. “이름 부르라고. 날 부를 때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을 텐데.” 시선이 마주쳤다. 혼란과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헌의 눈을 보며 무흠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거의 딱 달라붙듯이 가까이 서 있던 자헌이 자연스럽게 한발 뒤로 물러선다. 그러자 무흠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헌이 물러서는 만큼 따라잡았다. 균형이 무너지자 자헌은 가까이에 있던 침대에 걸려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상황이 역전 되어 이번에는 자헌이 무흠을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다. 성대하게 한숨까지 쉬며 자헌은 주위를 둘러본다. “…연무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짓은 좀….” 재빨리 어깨를 치자 자헌은 쉽게 침대 위로 누웠다. 아니, 넘어졌다.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무흠은 양쪽 입술을 끌어올린 채 미소 지었다. 순간 자헌이 흠칫하고 굳어지는 듯 했지만 무흠은 상관하지 않고 누워 있는 자헌의 위로 몸을 숙였다. 무흠의 무게가 더해지자 두 사람 아래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부해봐.” 무흠은 눈썹을 찌푸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자헌에게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새 두 사람 다 숨을 죽이고 있었다. “뭐?!” 엎드린 채 양손으로 자헌의 얼굴 옆을 짚고 무흠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헌의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엿보였지만 그 안에 분노만은 없었다. “난 지금부터 너랑 할 생각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하기 싫거든 반항을 하라고. 죽을 각오로 날 때려눕히든지, 그게 불가능 할 것 같으면 그냥 얌전히 대 주고.” 말을 하며 무흠은 자헌의 코끝에 코를 가져다 댔다. 무흠은 살짝 고개를 틀어 피하는 자헌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입술은 입술에 스쳤고 볼에 뺨을 문질렀다. 점점 경직 되어가는 몸을 민감하게 느끼며 무흠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자헌 역시 무흠이 재미있어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평소의 그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굳히고 노려보아 온다. “꿈에 말이다.” 자헌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흠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몸을 밀착시켰다. 한순간 얹혀진 몸무게에 자헌은 날카롭게 숨을 삼킨다. “…윽! 그렇게 밀어 붙이지 마.” 힘겹게 내뱉은 말을 못 들은 척 흘려버리고 무흠은 자헌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네가 옷을 다 벗고 이곳에 누워서 날 유혹했거든.” 점점 목소리가 낮아진다. 말을 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자헌이 그것에 정신을 집중 하고 있을 때 재빨리 옷을 벗기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느새 셔츠 단추가 다 풀어 헤쳐져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물론 네가 그 정도까지 해줄 거라는 생각은 않지만, 잠에서 깬 뒤부터 계속 네 뒤는 어떤 맛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무흠은 입고 있던 티를 재빨리 벗어 던지며 말을 했다. 말 하는 내용도 그렇지만 그 행동 역시 파격적이었다. “허….” 자헌은 무흠이 자신의 티셔츠를 방구석으로 휙 던지며 자신을 향해 악동 같은 미소를 짓자 기가 찼다. 남의 꿈에서 일어난 일까지 책임져야 하다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그러는 사이에도 무흠은 거칠기 짝이 없는 손놀림으로 자헌의 교복 바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자헌은 아직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벌어지고 있는 일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황당했다. 때문에 무흠의 말 했던 것처럼 어떤 타이밍에 거부를 하고 주먹을 휘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런 의욕 자체가 일지 않았다. 도대체가 현실감이 일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무흠의 손가락이 거의 모양만 갖춘 가슴을 문지른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냥 누군가 자신의 살을 만지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무흠은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자헌의 몸을 만져댄다. 무흠의 손이 겨드랑이 아래로 옆구리와 허리를 지나 엉덩이 쪽으로 옮겨 간다. “저기….” 한쪽 엉덩이를 틀어 잡히자 자헌은 불편하게 몸을 뒤틀며 입을 열었다. 순간 흉악하게 번들거리는 무흠의 시선이 자헌의 얼굴로 와 박혔다. 자헌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셔츠는 양쪽으로 벌어져 있고 바지는 무릎께에 사각 케빈 클라인은 골반 중간쯤까지 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자헌은 옷감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거웃 한 털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두 사람은 이보다 더한 일도 한 적이 있었다. 자헌이 무흠에게 오랄을 해준 횟수는 한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고,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을 지켜본 것만 해도 간접 경험으로는 충분했다. 무흠은 섹스를 할 때 자헌이 곁에 있기를 강하게 희망했는데, 심지어 네가 없으면 흥분 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그랬는데도 자헌은 무흠이 자신과 이런 짓을 하고 싶어 하리라는 뻔한 결과를 전혀 예상치 못했다.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 다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이제 와서는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헌은 무흠이 원하면 무슨 짓이든 해왔으니까. “예자헌, 딴 생각 말고 집중해.” 라는 말을 들어도…. “…설마, 정말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자헌은 미심쩍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몸이지만 솔직히 이렇게 재미없는 몸을 정말로 안고 싶은 것인지 자헌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더듬어지고 있지만 자헌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무흠의 꿈에서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지금처럼 멀뚱하니 누워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넣을 거야.” 단호하게 중얼거리며 무흠은 자헌의 허리로 팔을 집어넣었다. “나한테?!” 무흠이 이끄는 대로 몸을 뒤집으며 자헌은 놀란 목소리를 냈다. 풀어헤쳐진 셔츠가 어깨위로 걷어 올려지고 무흠의 손이 등을 헤집는다. 어깨를 지나 견갑골을 타고 내려가는 손놀림에 자헌은 흠칫 목을 움츠렸다. 성적인 자극에 민감하지 않은 몸은 그제야 간신히 어떤 감각을 느꼈다. “야, 그만….” 간지러움에 자헌은 무흠의 손을 피했다. 그런 자헌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무흠의 손바닥은 차분하게 등허리를 지나 엉덩이로 내려간다. 그와 함께 부드러운 어떤 것이 자헌의 목덜미 위로 내려앉는다. “핫!” 자헌은 어깨에 무흠의 키스를 받으며 숨을 삼켰다. 목덜미에 뜨거운 기운이 닿자 눈살을 찌푸렸다. 입술이 탔다. 혀로 침을 발랐지만 금세 말라버린다. 자헌은 미간을 좁힌 채 무흠을 돌아보았다. 무흠이 마치 자헌이 뒤돌아볼 줄 알고 있다는 듯 자헌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묘한 웃음이었다. “연무…ㅎ…” 자헌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무흠은 자헌의 한쪽 어깨를 짓누르며 귓불을 핥아 올렸다. 그리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짓궂게 말한다. “반응이 확실해서 꿈보다 좋은걸~.” “…읏!” 어깨를 깨물렸다. 화끈한 통증에 자헌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픔과 함께 쓰라린 감촉이 이어진다. 녀석은 잔인하게도 자신이 깨문 곳을 혀로 헤집고 있었다. 팔을 움직이려 하자 몸으로 내리누른다. 자헌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거대한 암거미의 거미줄에 묶인 나방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쪽 엉덩이가 아프게 움켜잡혔다. 자헌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였다. 곧 허리께에 무흠의 숨결이 느껴졌다. 야릇한 촉각과 함께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오싹한 쾌감인지 뭔지 모를 것이 몸 안에서 날뛴다. 자헌은 허리와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순간 또 다시 단단한 이가 살을 파고든다. “…!!” 자헌이 흐트러져 있는 이불을 움켜쥐자, 몸 안에서 날뛰던 열이 손가락을 타고 아주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간다. 자헌은 팔을 뒤로 돌려 아픈 장난을 치는 무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하고 싶은 거냐.” 놀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부정하기도 전에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와 닿았다. 그리고 벌어질 리가 없는 그곳에 난폭한 엄지손가락이 서슴없이 파고들었다. 자헌이 놀라 숨을 멈춘 사이 그것은 물기 없는 그곳을 비집어 열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소름끼치는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맺힌다. 허리를 빼려 해도 허벅지에 올라앉아 있는 무흠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던 자헌은 신음이랄 수 없는 묘한 소리를 흘렸다. “…으…” “빌어먹을 못 참겠잖아.” 무흠은 으르렁대며 자헌의 배에 팔을 집어넣고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오한에 이를 악물고 있던 자헌이 무릎을 세우고 엎드리자 그 사이로 꺼림칙한 물건이 와 닿는다. “…윽, 그만 둬.” 자헌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무흠을 돌아보았다. 순간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가 시야가 흐려진다. “예자헌, 너 같으면 그럴 수 있겠냐.” 무흠은 자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당기며 속삭였다. 그리고 무릎으로 다리를 갈라 벌리고는 그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었다. “무흠이 너!” 넓게 벌린 다리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은 채 발기한 페니스를 쥐고 지금이라도 당장 집어넣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다. 이대로 당하면 무사히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다. 묶여 있지도 않은 자헌이 이 정도까지 참고 있었던 이유는 폭행을 당하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무흠에게 손을 대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말로 해서는 의식이 반쯤 다른 세상으로 워프 해버린 듯한 무흠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자신의 등에 성감대가 있다는 획기적인 발견도 했고, 정조의 위험을 당하는 등 초보자에게 오늘 하루치 경험으로 이정도면 충분했다. 자헌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무흠의 허리에 다리를 휘감고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다. 그 뒤엔 순발력이 필요했다. 반격당하기 전에 자헌은 번개처럼 일어나 팔로 무흠의 목을 감고 숨을 쉬지 못하도록 힘을 주었다. 격투기가 아닌 이정도의 접근 전엔 자헌이 유리했다. “연무흠! 아무리 너라도 모든 게 다 용서 되는 건 아냐.” 씩씩거리며 힘자랑을 하는 무흠에게 팔다리를 휘감은 채 착 달라붙어 있던 자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큭!”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숨이 간당간당한 모양이다. 팔을 목에서 떼어내려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무흠의 숨이 먼저 넘어가든지 완력으로 자헌의 팔이 비틀리든지 어느 쪽이 빠를지 모를 일이다. “얌전히 있겠다면 놓아주지.” 무흠이 팔을 비트는 힘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자헌은 감고 있던 팔을 아주 조금 느슨하게 했다. 팔 안에서 무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다시 한번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처럼 그렇게 엉망으로 당하고 싶지는 않아. 유혈 사태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다고, 알아들었어?” 이 말에 무흠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헌은 끌어안고 있던 목을 놓고 재빨리 물러앉았다. 자헌은 팔을 무흠은 목을 문지르며 각자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 다 상대가 언제 다시 달려들지 경계하고 있었다. “…예자헌….” 무흠은 이를 갈며 자헌의 이름을 되뇌었다. 목이 팍 쉬어 있었다. “우리, 말로 하자니까.” 자헌 역시도 온통 상처투성이의 팔을 천천히 움직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뼈가 시큰거렸다. 침대 머리맡과 발치 쪽에 나누어 앉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자헌은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상대 앞에서도 태연하게 몸을 드러내놓고 앉아 있었다. 경계심이 없는 건지 이제 더 이상 무흠이 달려들지 않으리라 믿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아니, 자헌은 원래 그런 성격일 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무흠 앞에서야 몸을 드러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죽이려 드냐.” 여전히 목을 문지르며 무흠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네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자헌은 빨갛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무흠의 목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투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흠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갑자기가 아니면 되는 거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흠의 긴 팔다리가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그렇게 하고 싶었냐고 묻고 싶어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자헌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온 예쁘장한 얼굴을 훑어보았다. 겉모습만 보면 별로 남자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대도 이 녀석은 색을 아주 밝혔다. 그 갭이 지금 자헌에게 두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무흠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여성스러운 부드러움은 전혀 없었다. 눈도 지나치게 사나워 보였고 코도 반듯하기는 했지만 그것뿐이다. 입술도 얇고 웃기라도 하면 송곳니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얼굴은 묘하게 예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게 사람을 방심시키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팔다리는 길쭉길쭉 했다. 지금도 맹렬하게 키가 크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헌이 무흠의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일이 일어난 게 지금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잠깐! 잠깐 기다려 봐. 상황을 한번 짚어보자. 그러니까 이 일이 모두 네가 아까 말했던 그 꿈 때문이라 그거지?” 자헌은 무흠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들어 막으며 물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다른 한손으로는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흠은 자신을 막아서는 자헌의 손바닥을 불만스레 쳐다보며 말했다. 그로서는 자헌과 이런 식으로 실랑이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예자헌은 자신과 자게 되어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말로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지만 자헌은 당당하게 대꾸하는 무흠을 보며 말꼬리를 끌어 올렸다. “…연무흠, 나는 말이다. 네 꿈속에서 일어난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무흠은 이미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건 두들겨 패서 고쳐지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고. 자헌은 한숨을 내쉬며 무흠에게 호소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자헌의 호소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자헌은 호소의 방향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저헌도 여기까지 와서 그만둔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흠이라면 자헌을 기절 시켜 놓고라도 자신이 원하는 걸 할 녀석이었다. “입으로 해줄 테니까, 넣는 건 빼고 하자.” 자헌이 조심스럽게 타협안을 내 놓았다. “아니, 난 뒤로 넣고 싶어.”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자헌은 왜 여기서 자신이 사정을 해야만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아까 무흠의 목을 조르든지 꺾어버려야 했다고 때늦은 후회를 했다. “후-” “그냥 얌전히 대지 그래?” 무흠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자헌에게 친절히 충고했다. 미뤄봤자 어차피 하게 되어 있는데 좀처럼 포기 하지를 않는다. 하긴 남의 눈도 아랑곳 않고 ‘재영이 엄마’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챙기던 녀석이다. 또, 다른 녀석들 같으면 무서워서 접근조차 않을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던 녀석이니, 예자헌의 고집도 한 고집 할 것이다. “…알았어. 그러면 아주 못하게는 안 할 테니까, 갑자기 달려들지 마.” 한참 골똘히 생각을 하던 자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다짐을 받으며 자헌은 눈을 빛내고 있는 무흠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그 모습에 무흠 역시 발목에 휘감겨 있던 바지를 차내며 싱긋 웃었다. 조금 오싹한 미소였다. “-윽!!” 묵직한 것이 뒤로 와서 박히는 감각은 정말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온 몸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자헌은 숨을 쉬기 위해 애썼다. 귀가 멍해져서 무흠이 등 뒤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처음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만해도 배설감에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 끝에 땀방울이 매달려 흔들린다. 어느 순간 숨을 내쉬자 묵직한 질량감이 그 숨구멍만큼 더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 끔찍한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자헌은 숨을 쉬는 게 두려워졌다. 자헌은 무릎을 세워 허리를 높이 들고 뒤로 무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전혀 즐겁지도 않았다. “…고 나를 봐.” 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통증을 뒤로 느끼며 자헌은 힘겹게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흠의 말을 듣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느껴지는 것은 찢어질 듯한 감각, 그저 숨을 뱉어내며 자헌은 일단 움직임을 멈춘 무흠이 자신의 귓가에 키스하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또 다시 웅얼거린다. 그리고 상체가 비틀렸다. 그 충격에 자헌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무흠은 억지로 자헌의 상체를 반쯤 돌리게 한 뒤 시선을 마주했다. 아픔을 참듯이 일그러진 얼굴, 감긴 눈, 미간의 주름. 자헌은 시선을 느낀 듯이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흠은 놀라 숨을 멈추고 자헌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자헌은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무흠이 난폭하게 눈물의 줄기를 닦아 냈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갑자기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무흠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헌 역시 시선을 돌리지 않고 힘겹게 무흠을 마주보아왔다. 무흠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며 자헌의 떨리는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아플 정도로 꽉꽉 조여 오는 감촉에 무흠은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자헌의 한쪽 엉덩이 둔덕을 잡아 벌려 그 몸속에 들어가 있던 자신의 성기를 천천히 잡아 뺀다. 맞춰 붉게 달아오른 속살이 벌름거리자 무흠은 흥분으로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의 행위가 어땠는지는 거의 기억에 없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후두둑 하고 자신의 땀방울이 자헌의 등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무아지경으로 움직이며 무흠은 발가락 끝까지 짜릿한 쾌감에 떨었고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분출하고 있었다. 연무흠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사정이었지만, 자헌과의 섹스는 완벽히 무흠의 예상대로였다. 긴지 짧은지도 알 수 없는 그 시간동안 기력을 다한 무흠은 자헌의 등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황망했다. 그러는 동안 엎드려 있던 자헌에게서 작은 신음소리가 났다. 당황한 나머지 무흠은 아직 자헌의 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을 빼냈다. “윽….” 자헌이 낮게 신음하자 숨을 고르던 무흠이 어쩔 줄 모르겠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자헌에게로 손을 뻗었다가 흠칫 거두어들인다. 이런 적은 없었다. 섹스를 한 뒤 이런 기분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무흠은 왠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댄 사람처럼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자헌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싶은 반면, 이대로 후다닥 도망을 가고 싶기도 했다. “젠장!” 무흠은 입 밖으로 욕설을 내 던졌다. 시선은 엎드려 고개를 팔에 묻고 있는 자헌에게 못 박혀 있었다. 무흠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자헌의 엉덩이에 묻은 핏자국이 아주 잘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 억지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던 흔적도 있었다. 뭉개지기는 했지만 붉은 빛을 띤 엄지손가락 모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무흠은 손을 뻗어 자헌의 무릎 뒤쪽의 오금을 슬며시 잡았다. 미동도 않고 있던 몸이 그 순간 흠칫하고 긴장한다. 그리고 팔 사이로 고개를 묻고 있던 자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무흠을 돌아본다. “….”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다. 굉장히 어색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저기…. 아, 아프냐?” 놀랄 일이다. 계속 같이 다녔어도 연무흠이 자신이 다치게 만든 사람에게 저런 걸 묻는 건 처음 본다.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흠의 얼굴을 보며 자헌이 피식 웃는다. “너도 무서운 게 있냐.” 낮게 잠기긴 했지만 장난스러운 어조이다.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아 무흠은 적이 안심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기분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지금 생긴 것 같아.” 무흠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생소한 기분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래, 축하한다. 드디어 네게도 특별한 게 하나 생긴 것 같구나.” 자헌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야릇한 얼굴로 말했다. 몸에 일어난 일이 아프긴 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상대가 저 연무흠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평소처럼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헌은 무흠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되도록이면 첫 번째이기를 바랬다. 무언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 어제까지의 무흠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연무흠은 강했다. 마음이 약해질 리가 없으니 절대 지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성장할 일도 없었다. 이제 무섭도록 특별한 것이 생겼다는 연무흠은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약점을 지닌다는 것은 파고들 틈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반대로 더 강해질 수도 성장할 수도 있으리라. 삶은 아이러니 하다. 무슨 일에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같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자헌은 무흠의 배웅을 극구 만류하고 콜택시를 불렀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묘한 곳이 불편한 몸으로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자살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무흠은 가지 말라고 붙잡는데도 굳이 옷을 입고 짐을 챙기는 자헌의 태도를 무척이나 불만스러워 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고 시간도 늦었다. 뭔가 더 할 생각은 아무리 연무흠이라 해도 없었다. 그냥 자헌을 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예자헌은 그런 무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태연히 방 밖으로 걸어 나간다. 처음에는 좀 절룩거리더니 그것도 곧 보통 때의 걸음이 되었다. 무흠은 그런 자헌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섹스 후에 아파하는 여자애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는데, 자헌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오히려 그게 더 기분이 나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키스도 아직이다. “예자헌….” 무흠은 현관에서 먼저 신발을 신고 있는 자헌을 불러 세웠다. 그대로 벽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겹쳤다. 막무가내로 혀를 밀어 넣자 자헌이 달래듯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벌린다. 경험도 없는 녀석이 지나치게 여유만만이라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부드럽게 엉키는 혀를 꽈악 물었다가 놓았는데 마치 들으라는 듯이 야한 신음소리를 낸다. 그 순간 무흠은 완벽하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은 알바 아니었다. 자헌이 자신을 마주봐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무흠은 자신에게 있어 예자헌이 얼마나 중요한 인간이고 어떠한 존재인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상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인정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무흠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드리는 자헌의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얼굴 가득 키스를 퍼부었다. 삐딱하게 선채로 죽어라 택시를 노려보던 무흠의 무시무시한 배웅을 받으며 자헌은 슬며시 웃었다. 저만치 멀어져 이제 보이지 않는 무흠을 돌아보던 자헌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있었던 일을 실감했다. 중간에 잠깐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일 외엔 처음치고는 잘 해냈다고 자신들의 정사를 평가한 뒤 자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무흠을 본 것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잘도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다. 자헌으로 말 할 것 같으면 자신이 그런 부분까지 수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상상을 해본 적은 있다. 그런 짓을 하고 나면 자신은 예자헌이 아닌 그 어떤 미지의 생물로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해버리고 난 뒤에도 겉모습이나 마음의 어느 한구석 변한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지금은 피곤에 지쳐 깨닫지 못 한 것 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어느 한 층은 이미 변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자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의식이 멀어지며 몸이 바닥으로 잠겨간다. 그것을 고스란히 인식하면서도 자헌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학생? 학생, 다 왔어. 내려!” 깜빡 잠이 들었던 자헌은 기사아저씨의 말에 벌떡 일어나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그곳이 집 앞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앓는 소리를 냈다. 생각만큼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자헌은 뻐근하게 당겨오는 어깨와 허리를 움직여 본 뒤 가방을 고쳐 메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오냐.” 자헌은 갑작스레 들린 재영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새벽 1시. 혹시라고 생각하지만…. “…재영이?” 자헌은 불쾌한 오라를 풍기며 어둠 속에 서있는 상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굳이 이름을 묻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죄진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이 있고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재영이가 되자 내심 놀랐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보일 수 있지만 천하의 예자헌이라도 그게 재영이가 되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마도 쭉- 진심으로 대해오던 상대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너 학원도 안가고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재영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자헌을 닦달했다. 목소리에는 화를 넘어서 걱정이 묻어있었다. 여기저기 찾아보고 학원에까지 알아본 모양이다. 결국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자 어디로 납치라도 된 게 아닌가 걱정 하고 있었을 터였다. 자헌은 그런 재영이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게… 무흠이랑….” 재영은 자헌의 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저 빌어먹을 녀석들을 엮어주는 게 아니었다. 자헌은 자신과 입장이 달랐다. 자헌이 연무흠 같은 녀석과 어울리는 것을 알게 되면 단순한 경고로 끝나지 않는다. 잠시의 일탈이라면 얼마든지 용인 될 테지만, 자헌의 성격상 누군가를 놀이 상대로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걱정이다.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재영은 짧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미 동네가 잠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재영의 발악을 보고서야 자헌은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가방을 뒤졌다. 원래 자신의 핸드폰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자헌은 간혹 자신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잊곤 했다. “수업할 때 꺼 놓고 안 켰다.” “-죽엇!!” “미안 미안. 그런데 재영아, 지금 좀 피곤하거든? 큰 일 아니면 내일 얘기하자.” 자헌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근자근 달랜다. 하지만 재영은 자헌이 평소처럼 자신을 대하자 ‘탁’하고 그 손을 쳐냈다. 가끔 이렇게 한번씩 자신이 화를 내더라도 이 놈은 기가 막히게 잘 빠져나간다. 생각 같아서는 멱살을 잡고 흔들어 도대체 무흠이 놈과 뭘 하고 다니는 것이며, 왜 쓸데없는 소문을 달고 다니는지 추궁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피곤하다지 않은가. 평소 자헌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 바로 피곤하니 다음에 이야기 하자는 말이었다. 성격적으로 눈앞에 닥친 일을 뒤로 미루는 녀석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무흠이 놈이랑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자헌이 너 앞으로 그 자식이랑 놀지마!!” 기가 막힌 듯 중얼거리던 재영이 기어이 아이들이나 할만한 소릴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이랑 입장이 역전 됐네?” “지금 한가하게 그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냐!” 재영은 부루퉁하니 핀잔을 주며 어둠에 싸여 자신을 마주하고 서있는 자헌의 어깨를 툭 쳤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자헌이 비틀거리자 흠칫 놀라면서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제길! 예자헌, 어떻게 된 거야-!! …어쨌든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보자. 너 내일도 도망치면 죽는다.” “도망 안 갈 테니까, 그렇게 화내지마. …아침에 보자.” 재영은 저금씩 멀어지는 자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름이라 밤바람이 시원하지도 않고 모기에 뜯겨가며 기다렸지만 어째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일단 자헌의 무사함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왠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나을 줄 알았는데, 직접 마주하자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가만히 자헌의 행적을 눈으로 쫓던 재영은 저만치 골목어귀에 뭉쳐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몇이 피워 물고 있는 담뱃불이 빨갛게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재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돌아섰다. 계속 되는 열대야 탓에 밤이면 잠 안자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뒤돌아선 것을 나중에 죽을 정도로 후회하게 되리라고는 그 때의 재영은 물론 알 수 없었다. 자헌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헛기침을 했다. 천재영은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녀석이다.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금세 저렇게 넘어가주니, 오히려 이쪽이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던 간에 오늘만은 재영이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움직이자 몸은 상당히 편해졌지만, 그래도 어서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던 자헌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네가 예자헌이냐?” 묘하게 깔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자헌을 막아섰다. 자헌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헛기침을 했다. 천재영은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녀석이다.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금세 저렇게 넘어가주니, 오히려 이쪽이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던 간에 오늘만은 재영이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움직이자 몸은 상당히 편해졌지만, 어서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린 자헌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이들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네가 예자헌이냐?” 묘하게 깔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자헌을 막아섰다. 자헌은 눈앞을 막아서는 무리들을 보며 설핏 미간을 좁혔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자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시간대나 장소를 봐도 그렇고, 목적이 무엇이든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집은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자헌은 힐끔 전방을 확인한 뒤 이들을 빠져나가 담을 뛰어 넘을 수 있을지 거리를 가늠했다. 그래야 경보기가 작동할 것이다. 그 정도로 하지 않는 한, 자그마한 소란 따위 피워봐야 이 동네에서는 아무도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무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방음이 잘 되어 있어 들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한여름에는 문 꼭꼭 닫아 놓고 에어컨을 틀어놓을 테니 내다볼 일도 없다. 기껏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군가 듣고 경찰에 신고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거의 있을 리 없는 가능성에 매달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자헌이 움직였다. 그 순간 미리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검은 그림자가 자헌을 사방으로 에워쌌다. 자헌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는 미리 주의를 받은 듯 했다. “무슨 일이시죠?” 쉽사리 그들을 따돌릴 수 없을 것 같자 자헌은 눈앞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안형진이라는 사람에게 초대를 받지 않았던가. 자헌은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단순히 금품을 갈취하거나 시빗거리를 찾고 있었다면 이름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하-! 이것 봐라.” 자헌의 침착한 태도에 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사내가 이죽댔다. 남자의 말이 신호가 된 듯 사방으로 둘러서 공간을 좁혀왔다. 담배 냄새에 섞인 그들의 위험스러운 체취가 가까이에서 풍겼다. 척 봐도 둘러서 있는 자들의 덩치가 상당했다. 애들 놀이처럼 단순히 몰려다니는 패거리는 아니었다. “말 들으니까, 너, 대가리 좀 쓴다며? 머리도 좋은 놈이 괜히 도망가려고 용쓰지 마라. 집안사람들까지 다치기 전에.” 자연스럽게 협박까지 마무리 짓는다. 이 분야의 프로가 분명했다. 조사를 했다고 해야 할까. 상대는 자헌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제게 위협하시는 겁니까.” 자헌은 몸을 사리며 남자들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도망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하이고 이 새끼. 말 한 번 버르장머리 없게 하네!” 밉살스럽게 말을 하며 사내는 자헌의 어깨를 장난치듯 툭툭 건드린다. 자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슬며시 서로 간에 기분 나쁜 오라가 피어오른다. “얌전히 따라가 줘야 쓰것는데. 뭐, 그게 싫다면 실컷 반항을 해도 좋고~.” 이왕이면 반항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노골적인 주문이자, 이대로 곱게 끌려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숫자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컨디션 또한 다른 날에 비해 형편없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질 것이 뻔했다. “우리가 말이다. 조금 오래 기다려서 기분이 좋지 않거든? 그러니 화끈하게 한판 뜨자, 스트레스 좀 풀게.” 사내는 목 관절을 꺾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변에 서 있는 그림자들과 함께 낄낄거렸다. 이쯤 되면 이제 그들이 자헌을 끌고 가려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 끌려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터였다. 이렇게 되면 그냥 때리는 대로 맞고 기절을 하든지 맞은 만큼 돌려줘야 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결국 자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얌전히 맞고 끌려가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으니.” 자헌은 거추장스러운 크로스 백을 발치에 벗어 던지고는 주먹을 움켜쥐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럼, 최선을 다해 방어를 해볼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헌은 다리를 뒤로 뻗어 아마도 방심하고 서 있었을 상대를 찼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만한 어떤 아픔에 혀를 차며 자헌은 통증의 원인인 연무흠을 향해 원망을 날렸다.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왔지만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없었다. 공격을 하려면 일단 몸을 내주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들의 주먹은 해머로 온몸을 두들겨 맞는 것 같은 통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쓰러지면 끝장이었다. 인적 드문 거리는 온통 구타소리로 채워졌다. 바로 저기,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집을 몇 발짝 앞에 두고 자헌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팔꿈치로 몸을 숙이고 들어오는 상대의 턱을 쳐올렸다. ‘억!’ 소리를 내며 상대가 물러섰지만 곧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졌다. 끝이 없었다. 이쪽으로 손을 뻗으면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왔다. 계속해서 숨도 쉬기 어려운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에는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을 것이다. 물론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자헌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한 뒤 팔로 상대의 목을 휘둘러 쳤다. 순간 남자는 ‘으웩!’하고 그 자리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욕설이 오가고 전열이 분산 된 틈을 노려 상체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사람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대로 물 흐르듯 상대의 뒤로 돌아 손날을 세워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달렸다. 방향을 잘못 잡아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때부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추격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헌은 큰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자헌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이대로는 얼마 도망치지 못 한다. 다시 잡히면 그들은 아까처럼 적당히 자헌을 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쫓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더 열이 오른 놈들이 무슨 짓이든 할지 모른다. 미처 어떤 방법을 강구하기도 전에 자헌은 멈춰서야 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쫓아오던 남자들 역시 자헌의 몇 미터쯤 앞에 멈춰서며 욕설과 비웃음을 동시에 날렸다. “헉헉… 저 자식 발 졸-라 빠르네.” 그 중 키가 좀 작은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개중 가장 마른 사내가 자헌을 향해 이죽댔다. “씹새끼. 어디 더 뛰어 보시지. 캭-!! 퉤!” “끄윽- 저 새끼 때문에 아직도 속이 부글거려.” “병신 같이 저런 비리비리한 새끼한테 얻어맞기는." “닥쳐! 씨발, 너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 몇몇 사내들이 숨을 고르며 자헌을 향해 으르렁댄다. 그 중 한 남자는 자헌을 쳐다보며 말없이 담배를 피워 문다. 모두들 자헌에게로 한발씩 다가오는 중에도 느긋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대장인 듯 했다. 삭막한,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버려진 공사현장은 붉은 가로등 외엔 불빛이 없어 더욱 을씨년스럽다. 그 아래에서 자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홀로 그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흠과 같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붙잡는 대로 못이기는 척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미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어디 얼마나 더 버티나 보자. 꼬마.”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시작으로 또다시 사람들이 다가들었다. 자헌은 몸을 긴장시키며 발치에 걸리는 각목을 하나 발등으로 차올려 손안에 틀어쥐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결과는 뻔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대로 얌전히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자헌이 무기를 들자 히죽대던 사내들이 일순 긴장한다. 하지만 어차피 상대는 한사람이다. 일대일 대결도 아니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는데 아까처럼 쉽게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담벼락을 등 뒤에 두고 자헌은 그들과 마주섰다. 들고 있는 각목의 길이만큼이 자헌의 공간이었다. 나무 막대기를 휘둘러 접근을 막는다. 하지만 누군가 그 좁은 공간을 뚫고 들어온다면 이 싸움도 끝이었다. 등줄기로 싸-하니 한기가 올라온다. 자헌은 현기증을 느끼고 따갑게 쿡쿡 쓰셔오는 눈을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자헌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건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사방으로 경계하고 있었지만 팔이 계속해서 밑으로 처진다. 일단 대치는 하고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자헌이 불리한 기 싸움이었다.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내가 자헌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공격을 당하자 자헌은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리며 상대의 어깨와 목 사이를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사내가 쓰러지는 순간 자헌에게 아주 약간의 빈틈이 생겼다. 그게 끝이었다. 미처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거구의 사내가 자헌의 멱살을 틀어잡고 무릎으로 배를 찍어 올렸다. “허-억!” 저절로 상체가 수그러들었다. 숨이 틀어 막히고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각목을 놓쳤다. 발밑이 휘청거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허리를 차이고 자헌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번 쓰러지자 구타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무수한 발길질이 이어졌지만 이미 커다란 통증을 느낀 몸은 그것을 단순한 외부자극으로밖에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머리를 발로 찼고 자헌은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발길질 하는 모습이 검은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시야에 잡혔다. 그들의 등 뒤로 붉은 가로등이 사방으로 음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 빛을 보며 자헌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닫았다. 자신이 숨을 쉬는 소리만이 귀울음처럼 크게 들려오다가 멈춘다. 차츰 정신이 들며 맨 처음 느낀 것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어디에 누워있는 것인지 딱딱한 바닥에 닿아있는 온몸이 시렸고 머리가 아팠다. 지독한 두통이 일고 있었다. 이명이 길게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인데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에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갈 것 같다. 자세를 바꾸고 싶어도 몸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ㅇ…”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자헌은 이를 악물고 꽉 감겨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오른쪽 눈만 간신히 열렸다. 처음 본 것은 축축한 빛을 띠고 여기저기 파여 거친 표면을 드러내고 있는 바닥이었다. 저만치 파이프 의자의 다리와 붉은 가죽 소파 그리고 회색빛의 벽이 보인다. 또 누군가의 신발도 보였다.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헌 쪽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녀석 깬 것 같은데?” 가까이서 기척이 느껴지고 누군가의 커다란 발들이 자헌의 가물가물한 시야를 가득 메웠다. 두런두런한 대화 소리가 멎고 자헌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헌은 간신히 열린 한쪽 눈을 깜빡거리며 그들을 보기 위해 도대체 움직일 수 없는 머리를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은 번쩍거리는 빛과 찰칵거리는 소리에 무산됐다. 자헌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밝은 빛을 피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자신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웬 사진이냐.” 사실 확인이라도 해주 듯 누군가 자헌의 머리 위에서 소리쳤다. “형진이 형이 필요하다고 찍어 놓으랬어요.” 어린 목소리가 대답하자 재미있어 하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 이런 취미 있었나?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걸 사진으로까지 남겨 보고 싶을까. …야야, 꼬맹아 그렇게 한쪽으로만 찍지 말고 뒤집어서 골고루 찍어라. 그래야 오래 보고 즐길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며 사내는 자헌의 어깨를 아무렇게나 발로 밀어 눕힌다. “크…ㅅ!” 끔찍한 통증에 자헌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목안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좀 성한 모습으로 데려왔어야지.”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자헌을 내려다보던 누군가가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그러자 사내는 불만스레 중얼거린다. “그래도 뼈도 붙어 있고 이 정도면 멀쩡하잖아?! 날뛰면 손 좀 보라고 한 건 의종이 너다?” “좀 얌전히 시키라고 했지 이 정도까지 만들라고 한 기억은 없어. 아깝네, 꽤 봐줄만한 얼굴이었는데.” 의종이라고 불린 남자는 발로 자헌의 고개를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한 뒤 무감정한 투로 한 마디 했지만, 정말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냐? 어두워서 몰랐다.” 사내는 의종이 상처투성이의 자헌을 내려다보는 냉한 표정을 보고 빈정댔다. 역시 처세에 능한 놈답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지껄인다. 실제로 자신 대신 기의종이 갔다면 예자헌이라는 이 친구에게 성한 뼈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을 터였다. “어쨌든 잡아다 대령했으니 그 남자 오기 전에 이 몸은 갈란다.” 한참을 부어터진 얼굴로 누워있는 자헌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의종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꼬맹이를 붙들어왔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내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안형진과 관련해서 좋게 끝났던 일이 없었다는 과거를 떠올리고 이만 발을 빼기로 한 것이다. “…받아라.” 의종은 품에서 봉투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들건들 걸음을 옮기던 사내는 얼결에 받아든 흰 봉투를 손안에서 굴렸다. “어쭈?! 제법 두툼한데?” 목소리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손 봐 줄 놈이 있으니 대신 좀 잡아 오라는 부탁이야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때마다 수고비조로 용돈을 좀 받아쓰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이 정도를 쥐어 준적은 없었다. 사내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죽은 듯이 누워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꼴이 엉망이긴 했지만 그냥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갑자기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 생각을 끊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의종이 그 약삭빠른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사내의 어깨를 다독인다. “애들 고생 좀 한 것 같던데, 이럴 때 네가 위신을 좀 세워야지 않겠냐.” “뭐…. 여튼 고맙다. 일 있으면 또 불러라.” 사내는 자신의 어깨위에 놓인 의종의 손을 한번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저기 누워있는 녀석이 누구이든 이미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설령 이 돈이 입막음료까지 포함된 금액이 아니라도 자신의 패거리들 중 이 일을 떠들고 다닐 녀석은 없었다. 남자가 나가고 나자 곰팡내 나는 그곳 방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작은 움직임은 있었지만 자헌은 거의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시야가 맑지 않았고 정신도 몽롱했다. 오한과 발열이 번갈아 가며 자헌을 덮쳤다. 간혹 누군가가 자헌을 들여다보고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눈을 뜨면 후다닥 물러났다. 며칠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단지 몇 시간이 지났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시간감각이 엉망이었다. 이렇게 방치되다가 그대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은 아침 공기를 가르며 자헌의 집으로 향했다. 이런 식으로 잡지 않으면 또 어떤 꾀로 도망칠지 알 수 없다. 시간상으로 보아 지금쯤이면 학교 갈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재영은 물방울이 묻어 있는 짧은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노파심에 새벽같이 일어나느라 잠이 부족했다. 거기다 어젯밤 본 심상치 않은 모습도 그렇고, 요즘 계속해서 녀석에 대해 생각해서 그런지 꿈에서까지 자헌이 나왔다. 무슨 꿈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꿈에서 깨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챙겨온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재영은 저만치 보이는 자헌의 집 쪽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이 시간이면 분가하지 않고 같이 살고 있는 자헌의 셋째형인 자운이 형이 운동 하러 갈 시각이다.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덜컹』하고 차고 문이 열린다. 재영은 ‘역시’라는 심정으로 시동이 걸린 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차를 눈여겨보았다. 가족 회사에 다니는 자헌의 셋째형은 시간관념이 아주 분명한 사람이다. 1년 365일 이 시간이면 차를 몰고 회원제 헬스클럽으로 출발한다. 정확히 한 시간 동안 땀을 빼고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출근을 한다. 재영이 알고 있는 한 저 사람은 단 한번도 그 스케줄을 어긴 적이 없다. 재영은 길 가장자리에 붙어 선 채 자운이 형의 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에는 영 관심이 없는 재영이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보자 재영은 『길순이』 생각을 퍼뜩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헌에게 진 빚은 전혀 갚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비는 모두 다 오토바이 유지비로 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재영의 앞에 멈춰선 차창이 스르륵 밑으로 내려간다. 어딘지 자헌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내밀고 재영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재영들과 거의 열 살쯤 나이차이가 나는 이 남자는 분위기가 조금 자헌과 닮았달 뿐 완전히 어른이었다. 평소에 어른스러워 보이는 자헌이도 이 사람과 비교하면 아직 애였다. “안녕하세요. 형? 자헌이는 준비 다 했어요?” 재영은 붙임성 좋게 웃으면서도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헌의 집을 항상 제집처럼 드나들기는 하지만 다른 식구들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간혹 이런 식으로 보게 되면 서먹서먹했던 것이다. “….”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자운이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재영을 본다. “…자헌이, 어제 너희 집에서 잔 거 아냐?” 그 말에 놀란 건 재영이었다. 자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썹을 긁적거렸다. 자헌은 어젯밤 자신의 눈앞에서 돌아서지 않았던가. 재영의 집에서 자헌의 집은 5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아직 안 일어난 것 아닌가요? 어젯밤에 집에 가는 걸 봤는데….” 혼란스러운 듯한 재영의 반응에 자운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낮아진다. “몇 시에?” 자운이 차에서 내려서며 심각하게 물었다. 재영은 그런 자운의 모습에 재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두 사람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겟이 자헌은 아니었지만 저 집안에서는 과거에도 유괴 시도가 있었다. 가족 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 위협이나 협박 사건은 요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TV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그 일들이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납치인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자헌을? “…한시쯤 됐을 겁니다.” 가능성을 생각한 것만으로 목이 조여들었다. 재영은 불안한 얼굴로 자운을 살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검지와 중지를 턱에 댄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잠시 후 자운은 조마조마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재영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재영이 넌 집에 가 있을래?”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줄 테니까’라고 말을 이으며 자운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영은 머릿속의 핏기가 싹 가셨다. 자운은 굳어져 있는 재영을 남겨둔 채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 “…형!” 재영은 막 차를 돌리는 자운을 조급하게 불러 세웠다. 하지만 뒷말은 나오지 않는다. 재영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다만 강하게 자운을 응시했다. “연락하마.” 자운은 표정만으로 재영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집 앞으로 차를 몰아간다. 재영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만 보고 있었다. 뭔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자헌이 정말 없어진 것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않다. 어쩌면 제 방에서 늦잠을 자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제가 아무리 보통 사람 같지 않은 의지력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저도 인간인데 일생에 한번쯤 실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자헌, 이 자식!” 아침부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재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계속해서 괜찮을 것이라 되뇌던 재영도 결국은 알고 있었다. 예자헌은 아파서 죽어간다 해도 제 할 일만은 확실히 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자헌이 저 집안에 있었다면 분명 예자운이 모르고 지나쳤을 리 없다는 것을. “영화도 아니고 정말 납치된 것은 아니겠지….” 재영은 자운이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어딘가로 전화 하면서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능성을 점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납치라고? 그 예자헌을?’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혈기 왕성한 십대 청년을 유괴할만한 바보 같은 납치범이 있을까. “순순히 끌려갈 인간도 아니고….” 말끝을 흐리면서도 재영은 무의식중에 어젯밤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어제의 자헌은 다른 날보다 늦게 들어왔다. 그것부터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특별 과외나 학원에 가도 항상 12시 전에는 들어오던 녀석이다. 거기다 공부를 하다 늦은 것도 아니고 놀다 들어오면서 답지 않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그 녀석의 경우엔 노는 게 더 지치는 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른하게 풀어져서는… 마치, 열탕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붙잡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문득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바심이 날 뿐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곳에 계속 서 있어 봐야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라, 재영은 자운의 말 대로 집으로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헌에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고, 자운이나 재영이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린 꼬마에게조차 ‘우수’할 것이 요구되는 그런 집안에 태어나(다행히 녀석에겐 그런 역할이 어렵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해도 그 녀석 역시 사람이다. 지치거나 싫은 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그만뒀다. 그럴 듯한 가설이지만 상대는 예자헌이 아닌가. 요즘 좀 혼란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지만 도망쳐서 숨거나 할 성격은 아니다. 겉모습이야 달달하니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거야 단순 처세술이고, 그 녀석은 강하다. 그리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무언가 불만이 있다 해도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는 타입은 아니다. ‘그 녀석이 집을 나갔을 리도 없고.’ 재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어진 환경을 이용해 자기 유리한 대로 상황을 이끌어간다면 말이 되지만, 저 예자헌이 가출이라니 말도 안 된다. “아! 맞다. 핸드폰!!” 막 걸음을 옮기던 재영은 그제야 생각난 듯 무의식중에 손바닥 안에서 굴리고 놀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예자헌이 연무흠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하지만 단축번호를 누르기가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는 전파가 닿지 않는다는 안내멘트였다. 재영은 갑자기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제길, 어떻게 된 거냐. 예자헌.”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무흠이 놈이 다짜고짜 자헌을 찾아내라고 난리를 피워댔다. 그때도 놀라서 찾아 나서기가 무섭게 왠지 엉뚱한 곳에서 훌쩍 나타났었다. “설마하니….” 자헌은 재영에게 별 일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을 착각해서 잠시 잡혀있었다고 했지만 그게 진실일까. 보통정도의 분별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군가를 납치하면서 사람을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은 건가.” 가능성 있는 일이다. 자헌이라면 재영에게 걱정 끼치지 않을 생각으로든 얼마든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다. 왜 그때 붙잡고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던 건지 후회가 밀려왔다. 재영은 목으로 넘어오는 쓴 물을 집어 삼키며, 누구에게랄 것 없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예자헌은 재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헌은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능숙하게 재영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면 눈앞에 있는 것에만 몰입하는 습성이 있는 재영은 순식간에 자헌의 의도대로 행동하곤 했다. “병신같이….” 재영은 자갈을 걷어차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때도 분명 연무흠은 자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았을 것이다. 녀석이 먼저 미친 듯이 자헌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았던가. 아까 자운의 태도로 보아 협박전화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고, 이 일이 자헌의 가족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 재영은 숨을 삼키며 자헌의 집 근처 화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그 사람들…. 재영은 새벽에 자헌을 배웅하며 보았던 골목어귀에 모여 있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빨갛게 타들어가던 담배 불빛은 그것을 피우던 이가 숨을 빨아올릴 때마다 환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곤 했었다. 그들은 조용히 저쪽 골목에 모여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는 폼이었다. 재영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대체….”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재영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불길한 예시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핸드폰을 고쳐 쥐고 새로운 번호를 입력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재영은 상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린다. “…한중이냐? 난데. 너, 지금 연무흠이한테 연락할 수 있냐? …아니, 아니. 핸드폰으로 말고. 핸드폰은 안 받아. 급한 일이야. …그래.”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재영의 안색이 좋지 않다. “어, 알았다. …아냐, 신경 쓰지 마. 나중에라도 연락 되면 전화하고. …그래, 학교에서 보자.” 재영은 난폭하게 핸드폰을 끊고 맨땅을 발로 찼다. 연무흠 그 자식은 꼭 이럴 때에 한해서 연락할 방법이 없다. 재영이 모르고 연무흠이 알고 있는 것.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조차 꺼려진다. 재영은 초조감에 짧은 머리카락을 마구 문지르며 자신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경찰도 건장한 사내 녀석이 하루 저녁 집에 안 들어왔다는 이유로는 실종신고조차 받아 주지 않는다. 유괴범에게서 협박전화라도 오지 않은 한 지금 당장은 자헌이네 집에서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돈이 많은 집안이니 별도로 어떤 방법을 강구하겠지만, 재영은 마냥 방안에 들어앉아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자헌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도 재영이었고 또 친우로서 이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하루 무흠이 놈과 함께 자헌이 어떤 트러블에 휘말렸을지 조사하려면 『길순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헌이네 가족들과 좀 더 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 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핸드폰 번호를 자운이 형에게 알려 놓을 필요성도 있었다. 재영은 표정을 굳히고 다시 돌아서서 자헌의 집을 향해 뛰었다. 그 무렵 연무흠은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늘 그렇듯이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드물게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평소의 그 지독한 악몽을 꾸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예자헌이라.” 이름을 되뇐 것만으로도 푸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무흠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잔뜩 인상을 쓴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몹시 불쾌한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무흠은 근질거리는 가슴을 벅벅 긁었다. 하지만 아무리 긁어도 그곳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무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흔적이 그대로 남은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면서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자헌이 돌아가고 난 뒤 무흠은 끈적끈적한 체액 범벅인 그곳에 누워 잠이 들었다. 또 다시 가슴 안쪽이 근질거린다. “…쳇!” 이제 쓰리기까지 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무흠은 혀를 찼다. 잔뜩 인상을 쓴 채 우연히 발치를 내려다보던 무흠은 침대 시트에 점점이 묻은 검붉은 얼룩을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 이상한 흔적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무흠은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것이 분명한 정액이 말라붙어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정액과 섞인 붉은 얼룩이 있고 그 곁에 짙은 갈색으로 변한…. “그 녀석 피를 흘렸군.” 무심하게 내뱉었지만 표정은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쯧!’하고 혀를 찬 뒤 무흠은 미련 없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여전히 침대 시트는 걷어내지 않는다. 무흠은 오늘도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자헌은 봐야했다. 녀석을 뒤에 태우고 멀리까지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오늘도 자헌은 별 말없이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흠은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바지 주머니에서 패거리들 중 한명에게서 빼앗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미소를 지은 채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가기를 기다렸지만, 통화가 연결 되지 않는다. “제길!” 익숙지 않은 감정에 휘둘리자 심사가 뒤틀린다. 자헌을 만나게 된 후로 쉽게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무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시 전화를 받지 않는 자헌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무흠은 핸드폰을 침대위로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무흠은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몸에 대충 옷을 꿰어 입었다. 뭘 먹으려고 해도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얼마 전에 형네들이 이사 나가고 나서부터 무흠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무흠에게 이 집은 철저히 잠을 자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었다. 옷을 다 챙겨 입은 무흠은 잠깐 망설이다 내던져 두었던 핸드폰을 주워든다.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고 손안의 핸드폰을 노려보던 무흠은 그것을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바이크 열쇠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감긴 눈두덩에 열이 올라 눈을 뜰 수가 없다. 자헌은 이를 악문 채 저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타들어가는 입술을 혀로 축인다. 몸의 아픔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갈증이었다. 자헌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간혹 정신을 차리면 사람 그림자가 자헌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자헌을 걷어차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헌이 정신을 잃지나 않았는지 확인했다.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자헌은 자신이 처한 정황을 판단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가 너무 단편적인데다 뭔가를 깨달았다 해도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다 두들겨 맞은 곳들이 너무 아팠다. 한동안 내버려두나 싶더니 어느 순간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바로 위에서 자헌을 들여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야, 눈 좀 떠봐.” 특징 있는 앳된 목소리가 들리고 명백하게 깨우려는 의도를 가진 손이 자헌의 부어터진 뺨을 툭툭- 쳤다. 눈을 뜨지 않으면 계속 칠 것 같은 기세에 자헌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왼쪽 눈은 아예 떠지지를 않고 오른쪽 눈은 반쯤 떠지다 만다. 시야가 흐릿하고 시계가 좁은 것을 보니 많이 부어오른 모양이다. “아, 깨어 있었네? 물 좀 마시라고.” 상대는 조심성 없이 자헌의 목뒤로 팔을 집어넣어 거칠게 머리를 들어올렸다. 순간 고개가 확하고 뒤로 꺾인다. “…윽!!” 절로 신음이 터지고 미처 대비도 하기 전에 벌어진 입가로 미적지근한 물줄기가 쏟아진다. 거칠고 난폭한 움직임 탓에 삼키는 양보다 밖으로 흘러내리는 양이 더 많았지만, 자헌은 급한 대로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할 수는 있었다. 『꽝!』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자헌의 목을 받치고 있던 팔이 흠칫 굳는다. “어쭈구리! 재진이 너 지금 뭐하냐.” 자헌에겐 이미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재미있는 것이라도 발견한 양 비아냥거린다. 그와 함께 자헌의 머리는 거의 내팽개쳐지다시피 바닥에 부딪혔다. 자헌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어금니를 사리물며 아픈 신음을 삼켰다. “이 새끼 이거 웃기는 놈일세. 내가 저놈 도망 못 가게 감시를 하랬지 언제 간호를 하랬냐? 너 죽고 싶어?!”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발로 차인 녀석은 자헌의 옆으로 엎어졌다가 번개처럼 일어났다. “…아니, 형. 그게…!” 우물우물 변명을 하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뜬 자헌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툭툭 얻어맞고 있는 덩치 큰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어쭈구리. 이 자식 변명 하는 것 좀 보게. 말해봐. 새꺄! 내가 언제 저 새끼한테 물 주라디?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하고 지랄이야? 여기서 누가 죽어 나가든 넌 네 할 일이나 잘 하란 말이다. 알았어?” 기의종은 부동자세로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집게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무슨 일을 벌이든 어설픈 동정심이 일을 그르치는 원인이다. 특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어쭙잖게 끼어드는 이런 녀석들이 바로 일을 망치는 요주의 인물이다. 앞으로 이 녀석에겐 이런 일을 맡기면 안 될 것 같다. “이러고 있다가 형진이 형님한테 걸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물통 들고 튀어나가!” “네!” 의종은 바짝 얼어붙어 있는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차 내쫓았다. 녀석은 기겁을 하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물통을 집어 들고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간다. “어이, 깨어 있는 것 다 아니까 눈 뜨시지.” 눈을 감고 돌아가는 상황에 귀를 기울이던 자헌은 지척에서 험악하기만 한 의종의 기척에 부어올라 빡빡한 눈꺼풀을 애써 밀어 올렸다. 한참을 자헌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기의종은 뭐가 못마땅한지 갑자기 누워 있는 자헌의 어깨를 발로 찼다. 전혀 봐주는 것 같지 않은 발놀림에 맞은 곳의 뼈가 시큰하게 아파온다. 자헌은 숨을 삼키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은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고통스러웠다. 기의종이라는 이 남자는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자헌을 괴롭혔다. 어느 순간 깜빡하고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자헌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흐릿하게 일그러진 시야가 차츰 맑아지며 자헌은 바로 앞에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깨어 있으라고 했을 텐데?”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음성이 자헌을 윽박지른 뒤 바닥에 뻗어 있는 자헌의 옷깃을 잡아채 벽 쪽으로 끌고 가 패대기쳤다. 갑작스레 당한 폭력에 자헌은 벽에 등뼈를 부딪치고 그 반동으로 반쯤 옆으로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턱하니 숨이 막혔다. “…으…ㄱ!” “씹새끼. 눈깔 파버리기 전에 눈 똑바로 뜨고 있어.” 사내는 자헌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아랑곳 않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어차피 의종에게 있어 예자헌이라는 존재는 쓸데없이 신경 쓰이는 관리하기 귀찮은 녀석일 뿐이었다. 자헌은 한꺼번에 몰아닥친 충격에 움츠러들었다. 막 가라앉았던 통증과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몸에 스며들었던 냉기가 한꺼번에 몰려와 자헌을 괴롭혔다. 아무리 자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냉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처 입은 채 방치되어 있던 몸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손님을 그렇게 다뤄서야 쓰나.” 언제부터 있었는지 또 다른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자헌과 의종 사이로 파고들었다.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탁하게 갈라진 음성에 자헌은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헌이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안형진. 바로 몇 주 전 연무흠으로 인해 좋지 않게 얽힌 인물이다. 자헌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웃는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안형진.” 가물가물한 눈을 치켜뜬 자헌이 이를 갈 듯이 불길한 이름을 입 밖에 내자 남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안형진은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듯 자헌의 앞에 몸을 낮췄다. 그리고 만족스레 멍울이 진 자헌의 볼을 토닥인다. 자헌은 입안으로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안형진의 손길을 피했다. 좋지 않다. 아니, 얼마 전 그때 무흠에게 안형진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정확한 설명을 듣지 않고 넘어간 것부터가 실수였다. “곧 다시 볼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남자는 자신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린 자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 자헌은 새삼 부어오른 눈두덩을 의식하며 안형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한 눈자위와 퍼렇게 부어오른 눈으로 노려보아봐야 별다른 위협도 되지 않는다.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적의를 불태우는 자헌을 보며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의종이 조사한 것처럼 과연 연무흠이 집착을 보일만한 상대였다. 자신들 같은 무리에게 있어, 가까이에 이러한 기질의 인물이 있다면 친구든 동료든 어떤 식으로든 곁에 두려고 하기 마련이다. 연무흠 역시 이 친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의 일에 절 끼워 넣을 필요는 없을 텐데요.” 자헌은 입안 가득 퍼지는 피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안형진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니, 호소했다. 『쿵, 쿵』커다란 소리를 내며 심장이 느리고 무겁게 움직인다. 시커멓고 불길한 기운이 눅눅한 시멘트벽에서 흘러나와 자헌을 감싼다. 예감이 좋지 않다. 아니, 감에 의존할 필요 없이 상황만 봐도 전에 끌려왔을 때와는 취급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안형진은 눈치 빠르게 자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길한 기운을 알아차렸다. 이런 상황에서 초조함을 느끼고 평정을 잃는다면 예자헌도 끝이었다. 그것을 아는 안형진은 손끝으로 엉망으로 터진 자헌의 얼굴을 치켜들어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전에도 말했지만 말이야. 그걸 판단하는 것은 나야.” 안형진은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는 자헌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재영은 등굣길에 버젓이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연무흠을 기다렸다. 연무흠이 아니라면 그 떨거지들 중 아무라도 좋았다. 그렇게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짧은 시간동안 재영은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갔다. 자헌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어쩌면) 그 실종과 관계있을지 모르는 연무흠 또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놈의 집으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재영은 무흠이 사는 곳을 몰랐다. 이러고 있느니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행여 길이 엇갈릴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재영은 자헌을 생각하면 애가 타고 좀이 쑤셨다. 이 상황에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움직인다고 자헌을 구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운이 형 말처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특히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더 속이 탔다. 이번 일이 사전에 계획된 일인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모르지만, 그때 재영이 자헌을 좀 더 잡고 있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재영을 괴롭혔다. 적어도 그때 모여 있던 그 사람들의 그림자만 주의 깊게 봤어도…. 그런 동네에 덥다고 밖에 나와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재영은 그들을 보고도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알지만 그래도 그때 자헌을 붙잡지 않고 가게 내버려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제길….” 그런데 아까부터 재영의 앞을 지나치는 아이들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물론 본인이야 뻔뻔스레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등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헐렁한 추리닝에 삐죽이 솟은 머리카락은 어떻게 해도 눈에 띄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몇몇 안면이 있는 녀석들이 재영의 모습을 보고 학업은 포기한 거냐며 농을 건넨다. 재영은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 친구들을 쫓아 보냈다. 그런 식으로 실컷 야릇한 시선의 포화를 견딘 뒤에야 재영은 저만치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한중을 볼 수 있었다. “선배? 여기서 뭐 하세요?” 한중은 바이크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채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 재영을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새벽부터 전화를 해 연무흠의 연락처를 묻질 않나, 교문 앞에다 버젓이 오토바이를 대놓지를 않나,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듯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시간에 교복도 입지 않고 이러고 있다는 것은 등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그것도 수험생이. 중학교 때 생난리를 치며 놀던 한중도 고등학교에 와서는 이따금씩 수업을 받는다. 일진이건 뭐건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르다. 일단 고등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무리 불량 학생이라 해도 할 것은 어느 정도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재영은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놀고 있었다. 그것도 내일 모레 대학 시험을 볼 고 3 수험생이. 공부도 웬만큼 하고, 처음 비뚤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제법 상담실에 불려 다녔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사람이 말이다.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재영은 핸들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펴고 한중을 향해 생뚱맞게 한마디 했다. 한중은 재영의 악동 같은 영리한 얼굴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한중은 한쪽 눈썹을 슥- 끌어 올리며 되물었다. 전화만 하면 바로 달려 올 한중을 재영이 일부러 기다렸을 리는 없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아는 사실이다. “무흠이 형한테는 아직도 연락 안 됐나 보죠?” “씨발, 개새끼.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지.” 한중의 물음에 당장 욕부터 튀어나온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천재영에게 욕까지 듣는 걸 보니 또 연무흠이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없는 곳에서라도 연무흠에게 저런 식으로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영밖에 없을 것이다. “야, 임마. 뭘 웃고 있냐!” 탁- 하고 재영에게 뒤통수를 얹어 맞고 나서야 한중은 자신의 입가가 벌어진 것을 깨달았다. “…윽.” “괜한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타기나 해. 우리 담임한테 걸리면 나 죽어.” 재영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여전히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중을 보며 투덜거렸다. 더 기다려봐야 연무흠이 학교에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오지 않는 놈을 기다리기에 학교 앞이라고 하는 장소는 아주 좋지 않은 곳이었다. 학생주임이나 상담 선생에게 걸려도 골치 아프겠지만, 다른 누구보다 담임에게 걸리면 얄짤 없다. 특히, 한번만 더 걸리면 아버지에게 연락하겠다는 소릴 들은 뒤로는 겁 없는 재영도 담임 앞에서만큼은 얌전히 굴었다. 그 인간도 너무했다. 아버지에게 걸리면 몇 주 입원해야 할 만큼 얻어터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아주 즐겁다는 듯이 전화하겠다고 협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재영이 영 말을 듣지 않자 한 말이지만…. “그 선생 아직 선배 포기 안 했어요?” 한중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재영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눌러 참았다. 그 선생에게 들킬 염려가 있을 텐데 잘도 이 시간에 여기에 이러고 있을 생각을 했다. 그 선생이 도망치는 재영을 잡으러 운동장을 뛰어다닌 일은 요 근래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유명한 일화다. “그 인간이 포기할 인간이냐. 출발한다.” 쳇- 하고 혀를 차며 재영이 무언으로 한중을 재촉했다. 그러자 한중은 재영의 날렵한 오토바이에 몸을 실으며 묻는다. “어디로 갈지나 알고 갑시다.” “닥치고 떨어지기 전에 잡기나 해!” 재영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고 급출발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도저도 모르고 방법이 없으면 계춘이 형님에게라도 찾아가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무흠의 연락처는 모르더라도 누구에게 연락을 하면 되는지는 알 터였다. 하지만 도착해서 본 한계춘의 가계 「핑크」는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저녁 장사니 당연한 일이건만…. 오토바이를 멈추자마자 내려서서 담배를 찾아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한중을 돌아보며 재영은 인상을 썼다. “야, 너 계춘이 형 전화번호 알지? 전화 좀 해라.” 낡은 자물쇠가 채워진 셔터를 보며 재영이 한중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등에 메고 있던 빈 가방에서 담배를 찾아 꺼내 문 한중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딱 잘라 거절한다. “싫습니다.” 가게 이름은 귀엽기 짝이 없지만 가게 주인이나 평소 이곳에 드나드는 인간들이나 살벌하기 그지없는 족속들이다. 더군다나 막 잠든 한계춘을 깨우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선배의 명령이라 해도 한중이 자진해서 한계춘에게 전화를 할 리 없다. “싫다니? 하늘같은 선배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너 지금 반항하냐?” 하지만 선배의 권위로 누르기에 한중이란 녀석은 워낙에 싸가지와 경우가 없는 놈이었다. 한중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영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 “전 이 나이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배.” “씨발.” 재영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사람 좋게 웃는 모습만 보았지만 한계춘이 어떤 사람인지 재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연무흠이 그 자식 찾는 것도 힘들어진다. “친척이니 너는 죽이지는 않을 거 아냐? …빨랑 전화해라, 급하다.” “거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 당장 급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선배 아침부터 이러는 것 보면 좋은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요.” 두 사람은 누가 한계춘에게 전화를 할 것인지 서로에게 떠넘기며 신경전을 벌였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들의 핸드폰을 확인한다. “제 겁니다.” 한중은 씨익- 웃으며 핸드폰의 폴더를 밀어 올린다. 재영은 통화하고 있는 한중에게서 눈을 떼고 오토바이에 기대선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의 일을 생각하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바이크를 핑계로 자헌의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싸늘하고 차가운 기운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자운이 형은 여전히 어딘가로 전화 중이었고 오랜만에 보는 자헌의 어머니는 꼿꼿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계셨다. 평소 재영을 살갑게 대하던 일하는 아주머니의 움직임도 조심스럽게만 느껴졌다. 통화가 끝나자 자운이 형은 다시 한 번 재영이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물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자헌의 소식을 알게 되면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재영의 핸드폰 번호를 남겨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숨 막히는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짓눌러왔다. 예자헌의 존재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의미이든 간에 그들은 지금 이런 상황을 당혹해 했다. 자헌은 다른 형제들과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다. 덕분에 셋째형만 빼고 모두들 결혼을 해 분가해 살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출근길에 자헌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차를 돌려 본가로 돌아왔다. 예자헌이 그리 귀염성 있는 녀석은 아니라도 그들 나름의 애정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배에서 난 배다른 동생의 사고 소식에 열 일 제쳐두고 달려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재영이 기억하는 한 자신과 자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울려 놀았다. 그걸로 보면 자헌이 그 집에 들어간 것은 갓난아기 때의 일일 터였다. 자신의 성장배경을 훤히 알면서도 예자헌은 삐뚤어진 구석 없이 제대로 자랐다. 하긴 외모나 성격 어느 것 할 것 없이 딱 그 집안사람이니 당연할지도…. 보상심리인지 누군가를 돌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귀찮은 버릇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귀엽게 봐 넘길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가. “그 사람 응환이 핸드폰 가지고 있답니다.” 때마침 통화를 끝낸 한중이 어이가 없지 않냐는 듯 재영에게 말했다. “…누구?” 하지만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재영은 한중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한중은 점차 더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누구라니? 선배, 연무흠 그 사람 찾고 있었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자식 더럽게 따지네. 알았어 임마. 미안하다. 그런데 왜, 무흠이 그 놈이 응환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거….” 하긴 자기 핸드폰을 자헌에게 줬으니 따로 핸드폰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무흠의 행적들을 생각하던 재영은 기가 막힌 나머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헌이와 연무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을 일들을 묻는 것이 왠지 두렵기까지 했다. 재영은 말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응환의 별명인 「검은콩」을 검색했다. “…이 새끼, 전화는 왜 안 받는 거야.” 계속해서 신호는 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핸드폰을 받지 않는다. 연무흠 그 녀석, 멋대로 남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서는 자신이 거는 용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재영은 거칠게 폴더를 닫으며 한중이에게 말했다. “야, 안 되겠다. 계춘이 형님 번호 좀 알려주라.” 그러자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한중은 재를 털며 재영이 쪽으로 다가왔다.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도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는 지나 압시다.” 그 말에 재영은 묘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한중을 쳐다보았다. 꽤나 궁금한 표정이지만 재영이 기억하기로 한중 이 녀석은 예자헌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니 자헌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해봐야 이 녀석에게 협조를 얻기는 힘이 들 것이다. 오히려 가출한 것 아니냐며 재미있어 할 게 분명했다. “연무흠을 만나고 들어오던 예자헌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흠이 이 자식도 연락이 안 되고… 어떻게 생각하냐?” 짐작대로 한중은 재영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흥. 둘이 도망갔나 보네.” “이 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잔말 말고 빨리 계춘이 형님 핸드폰 번호나 대!” 재영은 그대로 한중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무흠은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귀찮은 듯 저만치 굴려 놓았다. 마침 눈에 띄는 대로 빼앗은 것이라 무흠은 실상 이 작은 핸드폰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무흠이 내민 손 위에 이 기계를 올려놓던 부들부들 떨리던 손가락과 울듯이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것을 보며 처량 맞은 개새끼 같다고 생각했던 게 떠오른다. 하긴 그때도 연무흠은 예자헌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개목걸이 채우듯 그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고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있을까 골몰하느라 다른 것은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했다. 수업시간에는 꺼 놓았지만 예자헌은 무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착실하게 부름에 응했다. 그래서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 무흠이 그런 일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생각하던 무흠은 또 다시 가슴 한쪽이 근질거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부터 연무흠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무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자헌을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 한쪽을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이 살랑거리는 생경한 감촉이 그를 괴롭혔다. 녀석이 핸드폰을 꺼놓고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어제 일 때문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녀석도 분명 거부하지 않았다. 뭐, 처음에는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결국 무흠이 원하는 대로 대주지 않았던가. 꿈에서처럼…. 아니, 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맞닿던 피부도 더 생생했고, 땀 냄새에 섞인 예자헌 특유의 체취와 억지로 잡아 벌리고 들어갔던 그곳도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힘껏 조여들었고…. “…흡!” 무흠은 순간적으로 묵직해진 하체의 변화에 어금니를 악문다. 아랫배가 사정하기 직전처럼 힘이 들어간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발기했다는 걸 깨닫고 무흠은 쓰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무흠은 성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부족을 느낄 새도 없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 맞다. 원하기도 전에 채워졌기에 애써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한 번 했던 짓을 떠올리며 세운 적도 없다. 그러니 무흠에게도 자신의 이런 반응은 생경하기만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병에 걸렸다거나…. 무흠은 치밀어 오르는 불쾌한 덩어리에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시멘트 바닥을 쳤다. 예자헌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식으로 외면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화를 내며 집을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겨우 온 곳이 학교 옥상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해서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랬다면 녀석은 아직도 무흠의 품안에 안겨 있었겠지. 무흠은 이를 갈며 몸을 뒤척였다. 아침나절인데도 뜨겁게 달구어진 옥상의 열기에 숨이 막혔다. 마치 예자헌의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움직이던 그 순간 느꼈던 것처럼. “제기랄!” 무흠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모든 생각이 예자헌 쪽으로만 흘렀다. 무흠은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자헌의 얼굴을 보고 판단하자고 생각했다. 자헌의 성격이면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이 시간이면 등교를 했을 것이다. 쉬는 시간인지 제법 소란스러운 복도를 걸으며 예전에 마주쳤던 자헌의 반 앞에 가서 섰다. 무흠은 『드르륵-』하고 발로 문을 밀어 열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몇몇 녀석들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웅성거리던 교실 안은 무흠이 자헌을 찾아 교실을 한번 훑어보는 사이 점차 조용해졌다.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 엎드려 자던 녀석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다. …없다. 무흠은 눈살을 찌푸렸다. 간혹 빈자리가 보이긴 하지만 연무흠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예자헌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찾던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그대로 얌전히 되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흠은 문틀에 기대선 채 뒷문을 막고 섰다. 그렇게 무흠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자 교실 안의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연무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만 비켜주면 안 되겠냐.”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를 뚫고 누군가 무흠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목소리가 익숙한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무흠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몇 번인가 예자헌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적 있는 자헌의 친구였다. “예자헌.” 무흠은 녀석을 향해 뜬금없이 자헌의 이름만을 입 밖에 냈다. 그러자 상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리고 내키지 않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녀석 오늘 안 나왔는데.” 죽일 듯이 상대를 노려보던 무흠은 방금 들은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흠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안 나와? 왜?!” 하지만 상대는 모두들 무서워서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 무흠에게 자진해서 말을 걸었던 녀석이다.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귀찮다는 듯 자신의 목을 옥죄는 무흠의 팔목을 맞잡아 뜯어낸다. “나야 모르지. 그런 일은 천재영에게라도 묻지 그래?” 탁탁- 움켜잡혔던 구겨진 교복을 털어내며 녀석은 뚱하니 대꾸한다. 뺀질뺀질한 인상의 녀석에게 더 알아낼 게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무흠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헌의 부재가 당혹스러웠다. 천재영까지 결석을 했다. 연무흠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채 턱을 손으로 매만졌다. 지금에 와서는 많이 불량스러워졌지만, 원래 하던 가락이 있는지라 재영은 중간에 도망은 쳐도 결석만은 하지 않았다. “…천재영과 예자헌이라….” 오랜만에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으며 무흠은 나직이 읊조렸다. 원래부터 그 두 사람은 무흠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 두 녀석이 나란히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자헌뿐이라면 (웬만해서 결석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차치하고라도) 어제의 여파로 앓아누웠다라고 애써 자위해 보기라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둘이 함께…’ 라는 부분에서는 걸린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학교에 오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었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그런 우연 따위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흠은 수업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쏠리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대로 뒷문으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탁- 하고 닫히는 문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음이 일었다. 역시 어제 저녁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무흠은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럴 때 한중이라도 불러내면 좀 편할 텐데 공교롭게도 핸드폰 번호를 몰랐다. 항상 단축키만 사용하던 무흠은 자신의 휴대폰을 자헌에게 쥐어 준 뒤로는 다른 녀석들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 하긴 연락하기도 전에 옆에 붙어 있곤 했으니 굳이 전화로 불러낼 필요성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언제나의 버릇대로 무흠은 후문 근처에 세워놓은 바이크에 올라타 헬멧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나직이 혀를 찼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이런 작은 행위 하나도 예자헌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자 무흠은 어이가 없었다. 요즘 들어 무흠의 생활은 자헌으로 시작하고 자헌으로 끝이 났다. 그게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연무흠은 좀처럼 판단할 수 없었다. 무흠은 재영의 집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몇 번인가 재영이와 자헌을 뒤에 달고 왔던 곳이라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상 밤에만 보던 곳이라 그런지 느낌이 달랐다. 적막하다고 해야 할까. 잔뜩 경계를 하고 외부인을 배척하는 것 같다. 민감하게 공기 중에 흐르는 긴장감을 감지한 무흠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이크를 멈춰 세우고 재영의 아담한 이층집을 올려다보는 사이에 몇 번이나 새까맣게 썬팅을 한 고급 승용차가 무흠을 지나쳐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경호 차량까지 달고 가는 것을 보니 근처에 높은 사람이라도 살고 있는 모양이다. 무흠은 곧 그쪽으로는 관심을 끊고 눈을 돌려 재영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흠은 있으나마나한 낮은 담을 훌쩍 뛰어 넘어 현관문 앞까지 갔다. 현관 옆에 초인종이 달린 것을 보고 그것을 눌렀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몇 번 거칠게 초인종을 누르고 이제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이층 창문을 올려다보았지만 여전히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역시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지?” 무흠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모습이 재영과 많이 닮았다. 딱 봐도 남매라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연령은 이십대 중후반쯤, 약간 피로한 기색이 느껴지는 모습임에도 무흠을 훑어보는 눈초리는 빈틈이 없다. “천재영 어디 있어?” 무흠은 여자의 의심 가득한 시선을 아랑곳 않고 난폭한 어투로 물었다. 나이가 더 많다는 걸 알아도 무흠은 누구에게도 존대를 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런 무흠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씩- 하니 한쪽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네가 재영이가 말하던 바로 그 친구?” 천재영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여자는 무흠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했다. 재영의 친구는 자헌이 외엔 처음이라며 여자는 신기한 듯 무흠을 본다. “그런데 재영인 왜 여기서 찾아? 학교 갔을 텐데.” “학교에 안 왔어.” 무흠은 무뚝뚝하게 끊어 말했다. “뭐?” 여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곱상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빠득- 하고 이를 갈았다. “…그 녀석 죽고 싶어 용을 쓰는군.” 그리고 표정을 가다듬고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눈으로 무흠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런데, 자헌이가 아니라 왜 네가 여기 왔냐? 항상 재영이가 문제 일으키면 자헌이가 붙잡고 괴롭혔는데.” “….” 무흠은 그냥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헌에게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말은 왠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뭐, 너도 그 녀석 어디 있는지 모르니 여길 왔겠지. 핸드폰 해보지 그랬어?” “번호를 몰라서.” 여자의 말에 무흠은 마지못해 대꾸했다. 뭐가 어찌 되든 좋으니 어서 천재영을 찾아냈으면 했다. 그런 무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건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천재영과 너무 닮아서 무흠은 멀거니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여자가 무흠을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여보세요? 재영이니?” 여자는 급히 무흠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상대를 확인한다. “…무슨 일이냐니? 큰일이 있지만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따지고. 여기 너 찾는 사람 있어. 바꿔줄 테니까 받아 봐.” 그렇게만 말을 하고 여자는 무흠에게 핸드폰을 넘긴다. “천재영, 너 지금 어디야.” 무흠은 기분 나쁜 어조를 감추지 않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천재영의 절규하는 듯한 험악한 목소리였다. 「연무흠, 이 자식! 너 지금 거기 어디야!!!」 징- 하니 울리는 귀를 전화기에서 떼며 무흠은 인상을 썼다. “여기 너희 집 앞이다.” 무흠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아니, 정확히 말해 무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노려보는 여자를 곁눈질 하며 즐거이 대꾸했다. 「씨발 새끼! 아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만.」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서도 천재영은 다다다- 떠들어댄다. 「내가 새꺄!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야?!」 “…학교에. 그러는 너는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냐.” 「어디에 있기는 너 찾으러 다녔지! 그리고 핑계를 댈 것을 대라. 내가 아침부터 학교 앞에서 지키고 서 있었는데 네 코빼기도 못 봤다.」 “나 후문으로 등교했다.” 「…씹!!」 감이 멀어지며 수화기 저 너머로 뭐라고 욕설을 내뱉더니 다시 핸드폰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어쨌든 급하니까 여기로 와라. 여기 계춘이 형님 가게다.」 “알았어.” 간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재영이 다급하게 속삭여 왔다. 「야, 그런데 네가 왜 우리 누나랑 같이 있는 거냐?!」 등과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시멘트벽에 피부가 아려오는 반면 얻어맞은 곳에서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자헌은 마른 침을 삼키며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감은 눈자위를 찌푸렸다. 등 뒤로 묶여 있는 팔은 이제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새어드는 환한 빛이 눈동자를 찔러 자헌은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고양이가 쥐 가지고 놀듯 자헌을 데리고 농을 치던 안형진이 이곳을 기의종이라는 부하에게 맡기고 사라진 지도 꽤 됐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족제비 같은 인상의 기의종이라고 하는 남자는 자헌이 상대하기 불편한 스타일이었다. 자헌이 보기에 기의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숨통을 쥐락펴락하며 죽기 직전까지 가지고 놀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자헌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맞은편의 붉은 소파에 앉아 있는 기의종의 발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때 의종은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자헌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거만한 걸음걸이로 자헌의 앞으로 다가온다. “어때? 잘 나왔지?” 팔랑- 하니 뭔가가 자헌의 뻗은 다리 위로 내려앉는다. 그것을 보며 기의종은 킥킥거리며 웃는다. 자헌은 부어올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의종의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뒤 시선을 내려 자신의 허벅지에 떨어져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자헌 자신의 사진이었다.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인데, 자신의 모습임에도 자헌은 몽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이곳에 끌려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찍은 듯 했다. 그걸 보자 자헌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교복과 부어터진 얼굴은 흘린 피가 눌어붙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헌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사진이었다. “…어째서 이런 걸….” 자헌은 의종이 어떤 의도로 이런 사진을 찍어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알 수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이걸 본 연무흠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조금 놀라주면 재미있을 텐데 말이지.” 기의종은 삐딱하게 선 채 자헌을 내려다보며 이죽댔다. 정말 무흠의 반응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자헌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묘한 취미를 가지고 계시네요.” 자헌이 기의종을 향해 터진 입술을 억지로 비틀어 올리며 말을 한 순간 의종은 가차 없이 자헌의 뺨을 후려쳤다. 고개가 뒤로 꺾이고 쿵-하고 뒷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살이 씹혀 또 다시 입안 가득 피가 고이고 머리가 멍해졌다. “잘도 나불대는 걸 보니 아직은 살만한가보군.” 신음을 삼키며 아픔을 참는 자헌을 내려다보며 의종이 비아냥거렸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웃음은 그가 이 상황을 철저히 즐기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네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야. 연무흠 그 개자식이 네가 죽든 말든 상관 않고 찾지도 않으면 살아 나갈 수도 있을 거야. 기도하라고. 연무흠에게 예자헌이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천천히 떨어져 있는 사진을 주워 올리며 기의종이 즐겁게 속삭여 왔다. 『꽈당-』 마치 때를 맞춘 듯 거칠게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자헌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의종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걸 보면 그의 아래에 있는 패거리가 분명했다. 심심치 않게 보던 광경인지 그들은 엉망으로 터진 채 한쪽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자헌에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처럼 자기네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후린 여자애들 이야기며 술 마시다가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이 일어났던 일, 더 나아가 취객의 주머니를 털었던 일까지 화제는 끝이 없었다. “그런데 의종이 형. 저 녀석은 뭐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들 중 한 명이 의종에게 물었다. 그러자 낄낄거리며 무용담인지 만용담인지를 늘어놓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자헌을 돌아보았다. “누가 했는지 골고루 두들겨 놨네.” 한 녀석이 어슬렁거리며 자헌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헌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 올린다. “이거 멋진걸. 형이 한 거유?” 손가락으로 자헌을 턱을 치켜 올려 엉망으로 터진 얼굴을 살펴보던 남자가 의종을 돌아본다. “내가 했으면 그렇게 멀쩡할 것 같냐.” 낡은 철제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녀석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의종은 피식 웃는다. 그런 의종의 반응에 남자는 묘하게 납득한 얼굴로 붙들고 있던 자헌의 턱을 휙 뿌리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뼈가 멀쩡한 걸 보니 형 작품은 아니네. 형이 귀찮게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툭하니 발치로 자헌을 건드렸다. “새끼. 더럽게 운 좋네.” 그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헌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종이 한마디 하기 전까지는. “너무 그렇게 겁주지 마라. 그 녀석 형진이 형님 손님이다.” 의종의 말에 여기저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자헌을 돌아보았다. 순간 느슨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바짝 날이 섰다. 덩치 큰 녀석들이 슬슬 자헌 쪽으로 모여들었다. 바로 얼마 전에 안형진이 연무흠의 친구라는 녀석을 잡았다가 놓아준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다음엔 또 언제?’ 라고 모두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안형진의 손님이라니 당연히 호기심이 일만하다. “헤에… 이 녀석이 그 녀석이유?”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모두들 눈을 빛냈다. 자헌은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자 설핏 인상을 썼지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날뛰어봐야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였다. 자헌과 시선이 마주치자 기의종은 짓궂은 웃음을 짓는다. 이들 패거리는 연무흠이라면 치를 떨었다. 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녀석도 무흠의 이름만 들어도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였다. “이 녀석이 요즘 연무흠 그 새끼가 달고 다닌다는 그 놈?” 자헌의 무릎을 걷어차며 누군가 빈정댔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자헌의 부어터진 얼굴을 훑어보며 노골적으로 농을 던진다. “난 또 연무흠이가 달고 다닌다기에 계집애 같은 상판일 줄 알았더니.” “푸하핫! 그랬다면 그거야말로 볼만했겠다.” 그들은 자헌을 앞에 두고 자신들끼리 낄낄거렸다. 노골적인 성적인 농담은 자헌과 무흠을 싸잡아서 깎아내리려는 수작이었다. “하긴 그 자식 얼굴 하나는 기똥차지.” “좋으시겠어. 애인이 쌔끈해서?” 누군가 이렇게 말을 하자 모두들 왁자지껄 웃어젖혔다. 자헌은 자신을 뱅 둘러선 무리의 집중 포화에 표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 사진이 주흠에게 전달된 것은 막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젊은 녀석이 받아 놓은 서류 봉투의 출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봉투 안의 사진에 찍힌 청년은 그들 조직원이 아니었다. 아래 녀석들을 관리하는 애들까지 불러 확인을 한 뒤엔 모두들 잘못 온 사진으로 치부해 치우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방치해두었다. 무흠이 사무실로 쳐들어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잔뜩 화가 난 채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무흠은 형인 연주흠을 찾았다. “형은?” 평소 무흠의 광폭한 성질을 잘 아는 남자들은 쓸데없는 말 대신 안쪽 사무실을 고갯짓 했다. 다들 무흠이 안에서 난동이나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엉터리 직업소개소를 차려놓고 일을 하지만 이곳도 엄연한 영업소였다. 간혹 돈 되는 진짜 손님들이 찾아 들곤 하는…. 직원들의 걱정을 뒤로 한 채 무흠은 거칠게 안쪽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서류 같은 것을 보던 연주흠과 차를 준비하고 있던 키가 큰 남자가 동시에 무흠을 돌아보았다. “안형진.” 무흠은 연주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 이름만 씹어 뱉듯이 내뱉는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흉악하게 빛나는 무흠의 눈초리에 연주흠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눌렀다. 저런 식으로 한번 핀트가 나가면 자신의 동생을 아무도 못 말린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 골치가 아팠다. “무슨 일이냐.” 말없이 차를 한 잔 더 준비하는 남자를 흘끔 쳐다보며 연주흠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새끼 찾아내.” “….”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나운 목소리에 연주흠은 눈가에서 손을 떼고 문가에 버티고 서 있는 무흠을 훑어보았다. 언뜻 표가 나지는 않지만 무흠이 지금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걸 모를 그가 아니었다. 잘 갈무리하고 있다고 하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를 하자고 해도 말들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아는 연무흠은 날카로운 시선을 자신의 동생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지?” 언제나 경고를 해도 들은 척도 않던 녀석이다. 도와주겠다고 해도 무시하던 놈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무흠 자신의 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일이 생겼거나. 그리고 그제야 연주흠은 동생 주변에서 요즘 돌고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던 녀석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풍문은 저 안형진의 흥미를 끌만 한 화제일 터였다. 실제로 연주흠 자신도 바로 어제 소문의 그 친구를 보지 않았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숨겼어야지.” 느긋하게 턱을 괸 채 연주흠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자 무흠은 그런 자신의 형을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한마디 한다. “그래서 당신은 저 사람을 감옥에 보냈나?” 무흠은 말라서 키만 껑충하게 커 보이는 남자를 곁눈질하며 실소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쩡- 하고 얼어붙었다. 형제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두 분 다 그만 하십시오.”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남자가 연주흠을 대신해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지만, 연주흠 앞에서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조직 내의 불문율이었다. “친구 분 때문에 오셨습니까?”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 막 자라기 시작한 까만 머리카락에 위아래로 차려입은 검은 옷이 그렇지 않아도 존재감 엷은 남자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남자는 불쾌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형제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연주흠에게 귀엣말을 속삭인다. 무흠은 초조감에 이를 악물고 그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지금 여기서 이런 식으로 노닥거리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무작정 안형진의 거점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훨씬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무흠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네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데. 네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모양이지? 무슨 일인데 그래?” 연주흠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대답을 재촉하듯 표정 없는 얼굴로 무흠을 쳐다본다. “사라졌어.” 무흠은 굳은 얼굴로 이 한마디만을 말했다. 유심히 무흠의 반응을 살피던 두 사람은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그리고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미끄러지듯 사무실을 나가자, 연주흠은 고개를 기울여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 친구라는 게 어제 본 그 청년인가.” 무흠에게 묻는다기보다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입 밖에 내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직업상 연주흠은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웬만해서는 잊지 않는다. “어떻게 해줄까?” 연주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게 있는 한마디였다. 이제까지는 모르는 척 해왔지만 원한다면 두 사람의 원한관계를 청산해 주는 것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다. 하지만 무흠은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안형진도 그렇지만 연무흠 역시 원한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풀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주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무흠은 빠른 말투로 뇌까린다. 다른 때와 달리 나름대로 꽤나 잘 참고 있었다. 그만큼 초조한 것이겠지. 연주흠은 새삼스레 자신의 동생을 살펴보았다. 어째 어릴 때 모습 그대로 클 생각을 않더니 요즘 부쩍 키가 컸다. 거기다 날이 갈수록 악귀 같던 그 아버지를 닮아가는 듯 했다. 평소에도 반쯤은 미쳐 있던 남자가 그 여자, 무흠의 모친을 만난 뒤론 죽을 때까지 한 여자에게 빠져 있었다. 그 지독한 집착과 이기심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얽혀 고통을 겪었다. 그런 피가 자신들에게도 반이나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외모뿐이라면 상관없지만 무흠은 자신을 위해 머릿속만은 그 남자와 닮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래왔다. 하지만 유난히 반질거리는 무흠의 사나운 눈을 보면 그런 걱정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나 무흠에게나 그 남자의 미친 유전자가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맞다면 점심 때 사무실로 배달된 사진의 수취인은 무흠이 분명했다. 연주흠이 기억하기로 그 친구는 무흠이 최초로 감정을 가진 상대였다. 그러니 사진을 보고 휙- 돌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확인해 주실 게 있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사내는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무흠에게 그것을 건넸다. “사진의 그가… 친구 분이 맞습니까.” 반사적으로 봉투를 받아들었던 무흠은 의혹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지?” “우선 보신 후에 말씀 나누시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흠을 재촉했다. 무흠은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봉지를 열어 그 속에 든 것을 꺼내들었다. “이게 뭐야?!” 무흠은 사납게 눈앞의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사진은 집단 구타당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자헌의 모습이었다. 기교 없이 찍은 사진은 더 적나라하고 현실감 있게 보였다. 일부러 얼굴을 크게 클로즈 업 해서 찍은 사진은 구타의 흔적이 역력했다. 퉁퉁 불어 터진 것처럼 부어오른 눈두덩이의 피멍이 참혹함을 더했다. 얼굴의 반쪽은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무흠은 머리 꼭대기부터 싸늘히 식어 내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악-하고 열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무흠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사진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진은 오늘 이곳으로 배달이 된 것입니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연주흠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이 흥분한 무흠을 제지하며 조용히 말했다. 순간 핏발선 눈동자가 남자에게로 와 꽂힌다. “어떻게 된 거야?” 무흠은 어깨로 숨을 쉬며 이를 드러냈다. 원래 거칠 것 없이 행동하던 녀석이지만 유독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연주흠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자신의 동생을 올려다본다. 검지와 중지로 입매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상대가 누구인지는 뻔하지. 문제는 어디에 숨겨 뒀느냐 하는 것인데, 사진까지 보내 온 것을 보면 널 도발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그러니 못 찾을 곳으로 기어든 것은 아니겠지.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찾는 동안 무흠이 넌 집에 가 있어라.” “…여기 있을 거야.” “집에 가서 기다려. 여기 있는다고 더 빨리 찾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밑에 애들 괴롭히기나 하면 모를까. 하지만 말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이미 연무흠이 아닐 것이다. 연주흠은 무흠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참, 너 핸드폰 안 되던데.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있냐?” “없어.” 무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침까지 들고 있던 다른 녀석에게 빼앗은 핸드폰은 그대로 옥상에 두고 내려왔다. 연주흠은 무흠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건넨다.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 잘못해서 잃어버리지 말고.” 연주흠은 휴대폰을 문가에 서 있는 무흠에게로 던졌다. “….” 무흠은 핸드폰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두 사람을 힐끔 한번 쳐다본 뒤 휙- 하니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무정하게 닫히는 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얌전하게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연주흠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왜?” 차라리 사무실에 붙잡아 두는 게 문제를 덜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가게 내버려뒀냐는 말이다. “실컷 휘젓고 다니라고 해. 형진이도 그러길 바라고 있을 테니 오히려 잘 됐지.” “…곤란한 분이군요.” 남자의 말에 연주흠은 씨익-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밀치고 밖으로 나온 무흠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아직도 손에 들려 있는 누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확 하니 열이 치받는다. 분노가…, 앞을 가로막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걷어차 버리고 싶을 정도의 화가 가슴 속에서 끓어올랐다. “안형진.” 나지막이 그 이름을 되뇌며 무흠은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순간 무흠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끓고 있는 열을 식힐 방법이 없어 무흠은 으르렁대며 건물 입구의 타일 벽에 마구잡이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퍽퍽- 하고 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먹 끝에서부터 달콤한 둔통이 느껴진다. 그것은 팔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으로 찌르듯이 들어와 박혔다. 갑자기 폭발할 듯이 통증이 살아난다. 건물 밖의 소음과 귓가를 스치는 후덥지근한 바람까지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무흠을 공격했다. 통각이 살아나자 아픔마저도 짜릿하게 느껴진다. 항상 마음속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던 미친 피가 들끓는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악의와 살의가 무흠을 지배했다. “….” 주먹의 관절부위에서 피가 튀었다. 이제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흠은 몇 개인지의 타일이 박살이 나 바닥에 피와 함께 흩어져 있는 장면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발치에 떨어뜨렸던 자헌의 사진이 든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거리에 때 이르게 네온이 켜졌다. 특유의 화려함을 잃은 초라한 불빛이 저녁나절의 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속도감 있게 지나치는 회색의 거리나 넘쳐나는 사람들이 더욱 낯설어 보인다. 무흠의 눈엔 모든 것이 빛을 잃은 듯이 보였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는데, 연무흠 자신만이 다른 세계에 다녀온 듯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끼친 영향력치곤 지나치게 강렬한 변화였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다. 어느새 예자헌으로 인해 연무흠의 인생이, 생활이, 시야가 바뀌어 있었다. 그 변화는 본인조차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웠던 모양이다. 잃을 수 없다. 무흠은 오토바이의 핸들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미 한 번 맛을 보아버려 무채색의 무미건조한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예자헌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무흠의 차갑고 텅 빈 세계를 형형색색으로 칠하고 온갖 것들로 가득 채웠다. 그가 바로 세상의 주인이었다. 이미 시간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무흠은 클럽 『핑크』로 되돌아왔다. 분명 아직도 이곳에 재영이나 한중이 남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무흠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형에게 맡겨 놓긴 했지만 그대로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구의 손을 빌리든 자헌을 찾아야 했다. 생각대로 막 영업을 시작해 사람이 없는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천재영과 한중의 모습이 보였다. 무흠은 그들이 앉아 있는 카운터 바 쪽으로 다가가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 재영이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저기 피가 묻고 형편없이 구겨진 봉투와 연무흠을 번갈아 쳐다보며 막 뭐라고 쏘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무흠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흠의 심상치 않은 반응 탓일까. 한참을 그렇게 두 눈을 마주보고 있다가 재영은 말없이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잡히는 대로 끄집어낸다. “…뭐?” 뭔가 말을 하려던 재영은 멍하니 넋이 나간 얼굴로 손에 들었던 사진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옆에 있던 한중은 떨어진 사진들에 시선이 못 박힌 채 얼어붙어 있는 재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선배?” 사진을 넘겨다보았지만 한중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왜 연무흠이 이런 입맛 떨어지는 사진을 들이미는지 의아했을 뿐이다. 하지만 재영은 그런 엉터리 사진으로도 상대를 알아본 모양이다. “…자… 자헌이?” 재영이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무흠을 돌아보았다. 사진을 집어 올리는 손가락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무흠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런 재영을 쳐다보다가 눈을 돌려 한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형진이 찾아내.”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나직하게 한 마디 한 것이지만, 그 순간 한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뒷골이 당겨올 정도로 전신에 오싹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무흠의 눈동자는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그는 더욱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고요해서 오히려 그게 더 소름이 끼쳤다. 마치 수렁처럼, 어둠 속에 가만히 엎드리고 있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누군가의 발목을 붙잡고 진흙 속으로 끌어당겨 숨통을 조여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것 같았다. 한중은 잔뜩 긴장한 채 무흠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숨죽인 채 고개를 끄덕여 무언으로 명령에 따르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전신을 빳빳이 조여 오는 위압감에 한중은 대답은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단지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한중은 패거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 대고 가게 밖으로 나선 순간 새빨갛게 물든 시야에 숨을 멈췄다. 해가 지면서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맞은편의 회색 건물도 하늘의 구름도 빨갰다. 그 불길한 기운에 천하에 무서울 것 없다고 큰소리치던 한중도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는 완벽한 암흑 속에서 자헌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 순간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자헌은 분명 어떤 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자헌 자신의 숨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떤 예감에 자헌은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 또다. 또 다시 가까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자헌은 딱딱한 바닥에서 고개를 들고 방금 전에 느꼈던 희미한 기색에 정신을 집중했다. 누군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체되어 있던 공간에 희미한 알코올의 향마저 맡아진다. 착각일까. “…ㅅ준아….”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있다. 자헌은 눈을 홉뜨고 어둠 저편을 노려보았다. 축축한 공기에 실려 자헌이 누워 있는 곳까지 술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자헌은 그가 누구인지 직감했다. 안형진 그 사람이다. 자헌은 숨죽이고 가만히 상대의 기척을 살폈다. 자헌이 알아차렸듯 상대 역시 자헌이 깨어났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상대의 존재를 묵인하고 있었다. 탈출이 불가능한 곳에 가두어 놓고도 그들은 자헌을 묶어 두었다. 종일 흘린 땀에 질척하게 젖은 옷이 몸에 휘감겼지만 이미 그것을 불편함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자헌은 의식적으로 몸의 상태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식사는커녕 물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헌은 인질이 아니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안형진의 태도로 보아 분명 살려 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예전에 자헌은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그가 접해 본 뒷골목의 풍경은 지나가는 이들의 지갑을 노려 가벼운 시비나 거는 정도의 것이었다. 사람을 죽일 정도로 패는 단지 그것이 목적인 폭력은 처음이었다. 그가 알고 겪어왔던 세상은 좀 더 추악하고 음험하고 더러웠으며 항상 돈이 목적이었다. 안형진이 연무흠에게로 향하는 것 같은 순수한 분노나 원한은 보지 못했다. “…절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갈라진 입술을 열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물었다. 어둠 저편으로부터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직한 웃음의 기척이 일고 의자의 삐거덕거림과 함께 공기가 일렁이며 밀려온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했을 텐데. 네 말대로 단순한 친구라면 죽이진 않아.” 컬컬하니 어딘가 바닥을 끄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놀리듯이 자헌을 희롱한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헌은 남자가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을만한 위치로 시선을 들고 말했다. “죽일 겁니까?” “각오가 되면 말 하라고….” 조롱기 어린 목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가까이서 와 닿았다. 자헌이 흠칫 어깨를 굳히자 민감하게 그것을 알아차린 남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린다. “왜? 겁이 나나?” “….” 자헌은 남자의 말보다 재미있어 하는 듯한 웃음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이 없자 안형진은 손을 뻗어 자헌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당긴다. 지척에서 숨쉬는 소리까지 들리자 자헌은 아픔은 둘째 치고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연무흠이 너를 미친 듯이 찾고 있더군. 그런데도 단순한 친구라고 할 생각인가?” “….” 안형진이 말하는 단순한 친구는, 단지 ‘친구’라는 단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친구라는 말은 천하의 연무흠이 ‘미친 듯이’ 찾아 헤맬 정도로 녀석에게 특별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런 닭살이 돋았군. 내가 무서운가?” “아아….” 자헌은 안형진이 두려웠다. 그가 휘두를 가능성이 있는 폭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어둠과 그 안에 숨겨진 깊은 상처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끌어 들여 자신의 어둠 속에 가둘 것 같아서 그것이 자헌을 움츠러들게 했다. “이대로라면 날이 밝기 전에 여길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던데. 어때? 안심이 되나?” 시종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놀리듯이 자헌의 귓가를 간질인다. 왠지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발작적으로 자헌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라지곤 했다. 딱히 한기나 신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자헌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그런 낯선 반응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는 친구일 뿐입니다.” 낮게 잠긴 목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설득력이 없었다. “친구, 친구, 잘도 강조를 하는군. ‘친구’를 저 연무흠이 찾아다닐 것 같은가?” 또 다시 귓가에 숨결이 와 닿았고 쭈뼛하고 솜털이 일어섰다. 안형진은 자헌의 그런 반응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훗’하고 웃으며 목덜미에 숨을 불어 넣는다. 이번엔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네가 어떻게 되든 그 놈이 널 모르는 척 내버려뒀으면 넌 여기서 풀려나게 되어 있었어. 그걸 그 녀석도 알고 있지. 그랬으면 네가 좀 고생을 하고 말았을 거야. 녀석은 지금까지처럼 이기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번엔 조급증 난 어린애처럼 굴더군. 그 개자식이 말이야.” 안형진은 땀으로 범벅이 된 자헌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이를 갈았다. 너무 낮아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떤 사이지?” 갑자기 목이 확 꺾이며 목 뒤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연애라도 하는 건가? 응?” 거친 목소리가 자헌을 추궁했다. 목을 꺾을 듯이 잡아채자 힘껏 버티고 있던 자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흡!”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짧은 신음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안형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헌을 한동안 그렇게 잡고 있다가 손을 확 뿌리쳤다. 이내 바닥에 쓰러진 자헌은 손을 뒤로 묶인 채 몸을 둥글게 말고 기침을 해댄다.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됐는걸.” 안형진은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애써 고통을 안으로 삼키는 검은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오늘 낮 가방이 발견되고, 재영이 무흠을 찾아 헤매는 동안 경찰뿐 아니라 사설 경호회사에서까지 은밀하게 자헌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몸값을 노린 유괴를 의심했던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도 몸값 요구가 없자 집안과 관련한 원한관계에서 종국에는 교우 관계로까지 범위를 확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형.” 재영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자운을 찾아 말을 걸었다. 자헌의 행방을 자운에게 알려야 했다. 아니, 알릴 수밖에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무흠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지금 이 상태로 자헌이 붙잡혀 있는 곳을 쉽게 찾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작정을 하고 납치를 해 갔던 녀석들이 인질을 순순히 넘겨줄 리는 없지 않은가. 특히 상대가 연무흠에게 원한이 있어 무흠을 괴롭히기 위해 주변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또 자헌의 행방에 대해 연무흠과 연관된 사항은 오래 숨길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늦든 빠르든 자운이라면 두 사람 사이를 알아낼 테지만 그때는 이미 늦을 지도 모른다. 요즘 자헌이 연무흠이라는 녀석과 어울려 다닌다는 말을 자운에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니 적어도 오늘 아침 자헌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 말을 했어야 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요.” 재영은 자운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였다. 초조한 듯 안절부절 못하는 재영을 보던 자운은 따라오라는 듯 이층 서재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간 자운은 서재의 문을 열어 재영을 먼저 들어가게 한 뒤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냐.” 자운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영은 자운의 그런 침착한 태도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확실한 것은 아닌데… 자헌이 데려간 사람을 알 것 같아.” 재영의 말에 자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리고 재영이 불쑥 들이민 종이 쪼가리를 받아든다. “이게 뭔데…” 네모반듯하게 접혀 있던 종이는 사진이었고 그것은 연무흠이 재영에게 보여줬던 것들 중 하나였다. 상처투성이인 모습이지만 얼굴은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었다. “….” 자운은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재영은 그런 자운을 보며 어렵게 입을 연다. “자헌이 요즘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생겼어. 연무흠이라고…. 좀… 불량스러운 녀석인데. 그냥… 몇 달 사이에 갑작스럽게 엄청 친해졌어. 자헌이 그런 것 좋아하잖아. 남 돌봐주고 하는 것.” 그런 자헌에게 가장 도움을 받은 게 재영 자신이었지만 말이다. 자운은 재영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뚫어질 듯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자운의 그런 모습에 재영은 흐르지도 않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침을 삼켰다. “그래서…?” 말을 멈추자 자운의 음울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하기를 재촉한다. 안 듣는 줄 알았는데 재영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영은 그런 자운의 반응에 예자헌과 연무흠 사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둘은 친구라고 소개하기에는 지나치게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는 사이나 같이 노는 사이라고? 저 예자헌이가 불량학생이랑 놀고 다닌다니 그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재영은 결국 두 사람 사이를 굳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따져 설명할 필요 없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어쨌든 오늘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연무흠 그 자식에게 원한을 품은 놈이 있다는 소릴 들었어. 무흠이 놈한테 중요한 사람이 생기면 그 녀석 대신 상대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대.” 재영은 말을 하면서 점점 온몸을 짓눌리는 듯한 공기에 숨조차 쉬기 어려워졌다. 왠지 자신의 말에 자신이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일이 일어났던 당시에 왜 좀 더 따져 묻지 않았는가 하는 때늦은 후회도 재영의 목을 조르는 요인이었다. 몰랐다는 것은 일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변명조차 되지 못한다. 거기다 자운에게서 뻗어 나오는 위압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이 사진은 어디서 났는데.” 자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자운이 화를 내거나 큰소리라도 질렀다면 이렇게 숨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무흠이 어딘가에서 가지고 왔어.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 이름이 …안형진인가 그렇대. 말 들어보니까 학생은 아니라는 것 같고 신천 주변 뒷골목에서 좀 노는 사람 같았어. 무흠이 놈이 그 사람 행방 찾는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애들보다는 형네가 더 빨리 찾아낼 거 아냐.”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볼 테니까 헌이 찾는다고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재영은 차마 자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자운이 재영을 책망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차라리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자운은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진의 날짜는 오늘 새벽으로 되어 있었다. 조작되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가장 그럴듯한 증거였고 유일한 단서였다. 재영이 말하지 않았다면 엉뚱한 곳만 조사하다가 시일을 놓쳤을 수도 있었다. 자헌이나 재영이 무슨 일을 하고 다녔거나 누구와 어울렸나 하는 문제는 이 일을 해결한 뒤에 따져도 되는 일이었다. 자운은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재영의 어깨를 한 번 꾸욱 움켜쥔 뒤 서재를 나섰다. 자운이 방을 나간 뒤에도 재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술 냄새 섞인 퀴퀴한 곰팡이 내가 어두컴컴한 창고 안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너머로 시끄럽기 만한 음악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지만 창고 안은 이상하게 적막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쪽 구석에 있는 형광등은 문제가 있는지 계속해서 깜빡거린다. 술 창고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용도로 지어졌기 때문인지 이곳은 후덥지근해지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연무흠은 아까부터 이곳에 있었다. 낡은 당구대 한 귀퉁이에 올라앉은 채 어두운 창고 구석을 노려보며 미동도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벌컥 문이 열리며 소란스러운 음악과 요란한 소음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그리곤 누군가 소년을 거칠게 창고 안으로 밀어 넣고 ‘탕-’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실컷 두들겨 맞고 억지로 끌려 온 소년은 갑작스레 어두컴컴한 창고 안으로 떠밀리자 처음 한동안은 어리둥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운 나쁘게도 연무흠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힉!” 자신도 모르게 놀라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치던 소년은 가까스로 멈춰 섰다. 창고 안이 어둡긴 했지만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은 막 당구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 연무흠.” 그들 패거리 내에서 혼자는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 1순위로 꼽히는 녀석이다. 그런 놈을 자신 혼자 상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말해." 갑작스레 어두운 창고로 끌려와 어물어물 서 있는 소년의 주위를 한바퀴 맴돌며 연무흠이 나직이 속삭였다. "뭐… 뭘?" 소년은 불안스레 눈동자를 굴리며 막 자신의 정면으로 마주선 무흠에게 시선을 비켰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소년이 미처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짧은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그대로 벽에 머리를 갖다 박는다. “으―윽!” 머리를 벽에 짓눌리자 소년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럴수록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말해.” “크흐…. 노, 놓고….” 소년은 당장 터뜨려버릴 듯이 자신의 머리통을 누르고 있는 무흠의 팔목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무흠은 다시 한번 소년의 머리를 벽에 갖다 박으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이대로 죽여줄까?” “악! 그만!! 뭐든 마… 말할 테니까!” 소년은 얼굴을 감싸 쥐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입과 코피가 함께 터졌는지 손가락 사이로 붉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무흠은 비틀거리는 소년을 차서 쓰러뜨렸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채 울고 있는 소년의 목을 발로 눌러 고정시키고 이를 갈았다. “안형진 그 새끼 어디 있어.” 한중은 바닥에 몸을 둥글게 말고 끅끅거리며 우는 덩치만 큰 사내 녀석의 모습을 확인하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무흠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인간은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아주 잔인하게 다룬다. 폭력으로 상대의 넋을 쏙 빼놓고는 더불어 자신에 대한 공포심까지 심어준다. 연무흠은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인식시키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이 놈이 마지막인데. …있는 곳은 알아냈습니까?” 한중은 발끝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녀석을 툭툭 건드리며 무흠에게 물었다. 하지만 무흠은 곁눈질도 않고 휭-하니 창고를 나가 버린다. 거칠게 창고 문을 걷어차는 걸 보니 단단히 열이 오른 모양이다. 한중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나간 무흠을 따라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애들을 모아서 안형진을 찾으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패싸움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예자헌과 관련된 이번 일은 연무흠 개인의 일이었다. 무흠이 나서서 ‘쳐들어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패거리 전체의 싸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상태로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끼어들어야 할지, 이대로 연무흠과 안형진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할지, 한중 역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어, 한중은 일단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주차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패거리들 중 아무나에게 전화를 해 먼저 나간 무흠을 좇도록 연락을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한중은 아직도 바닥에 누운 채 울고 있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비상계단을 통해 창고 밖으로 끌어냈다. 중요한 술창고 안에 이런 커다란 쓰레기를 그냥 버리고 가면 가게의 주인이자 육친인 한계춘씨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한중의 멱을 따려고 할 것이다. “예자헌이라고 했던가? 막 네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는데 아쉽게 됐군.” 형진은 부어터진 얼굴로 간신히 한쪽 눈만 뜨고 있는 자헌을 굽어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제 더 이상 움직일 형편이 아닌 자헌은 쓰려오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말은 할 수 있었다. “저도 막 당신의 그 목소리에 정이 들려던 참입니다.” “하하하하하핫!! 배짱 한번 좋군, 그래. 정말, 그 빌어먹을 악마새끼에게는 아깝지만 성준이에게는 잘 어울리는 길동무가 되겠어. 이번만큼은 그 녀석의 안목을 인정해주어야 하겠는걸.” 커다란 손을 피에 젖은 자헌의 머리 위에 얹고 형진은 흡족한 듯 웃어젖혔다. 하지만 지금 자헌은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순전히 고통을 주기 위해 조금 전 안형진이 자헌의 어깨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안형진은 자헌이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그에 비례하듯 만족스러워 했다. “생각해봐.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 것과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죽어버린 것 중, 어떤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 아직 숨을 헐떡이는 자헌의 귀에 대고 안형진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묻고는 있었지만 굳이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닌 듯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 이건 네가 아니라 그 악마에게 할 질문이군.” 안형진은 찢어져 너덜거리는 자헌의 셔츠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붉게 벌어진 복부의 상처에 손톱을 박아 넣는다. “…으…윽!” 상처를 헤집는 손가락에 이를 악물고 버티던 자헌이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정신을 잃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안형진은 혀를 찬다. “아직 안 되지. 벌써 정신을 잃으면 재미없다니까.” 조용히 중얼거리며 안형진은 조금 전에 자신이 잡아 빼, 축 늘어진 자헌의 어깨를 가차 없이 비틀어 올렸다. 그가 인질을 잡아 온 이유는 단지 상처를 입히기 위한 게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편하게 기절 따위를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확실히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고통을 느껴주지 않으면 무척 곤란하다. “으아아아악-!!” 자헌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튼다. 그런 자헌을 내려다보던 안형진이 빈정대듯 말을 한다. “성진이는 훨씬 더 고통스러웠어. 여기서 네가 기절해 버리면 내가 그 녀석에게 미안하거든. 그러니 조금만 참아봐.”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말투와는 반대로 자헌을 내려다보는 눈은 더 없이 차갑다. “다리가 부러졌더군. 왼쪽 발목이 바스라지고….” 자헌의 왼쪽 다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던 안형진은 한순간 당장 부러뜨릴 듯이 자헌의 발목을 힘껏 움켜쥔다. 순간 자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굳혔다. 그러자 귀에 거슬리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축축한 지하실을 가득 메우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골반이 뒤틀리고, 장출혈이 있었지.”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 안형진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계속해서 자헌의 몸 위로 손을 움직인다. 마치 가늠하듯 자헌을 내려다본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형진의 이마 위로 땀이 솟고 뺨 근육이 실룩거리며 찌푸린 눈가에 경련이 인다. 그의 이런 말들은 자헌을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되새기는 행위였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누군가를…. “늑골이 부러지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 …아플까?” 안형진의 쉰 목소리가 더욱 거칠게 변하며 낮아진다. 그가 보고 있는 상대는 이미 예자헌이 아니었다. “부러진 뼈가 폐를 찔러 죽을 때까지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하는 기분은 어때? 기침을 하며 피거품을 토해내는 기분은? 딱딱한 바닥에 내던져져 척추가… 쇄골이 부러지고, 팔이 빠져 뒤틀리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안형진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며 얼굴이 붉게 충혈되었다. 자헌의 목을 옥죄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커다란 손을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움켜쥔다. “마지막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취해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이미 제 기능을 잃고 쉬어 있었다. 안형진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환각처럼 자헌에게 겹쳐 보던 기억 속의 모습이 사라진다. 안형진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렇게 사라지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때 넌 살고… 싶었을까?” 하얗게 질려 숨이 넘어가는 자헌을 내려다보던 안형진은 갑자기 목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격정적인 태도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나 경련하던 뺨도 모두 정상을 되찾았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라고 애. 인. 을 잘못 둔 그쪽 책임도 반은 넘으니까 말이야.” 안형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괴로운 듯 기침을 하는 자헌에게 비꼬듯이 말을 했다. 그리고 근처에 세워 두었던 금속 배트를 집어 들고 자헌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한순간 서늘한 칼날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선연하고 차가운 감촉에 무흠은 무의식중에 잡고 있던 핸들을 놓칠 뻔 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오토바이는 삽시간에 균형이 무너지며 마주 오는 차선을 침범했다. 샛노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요란한 브레이크 음과 함께 무흠을 덮쳤다. 그 순간만큼은 천하의 연무흠 역시 진심으로 놀랐다. 반사적으로 원래 달리고 있던 차선으로 되돌아와 뒤를 돌아보자 저만치에서 차들이 덩어리를 이룬 채 멈춰서 있다. 그것을 본 무흠은 자신이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의 사고 탓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가슴 쪽이 서늘했다. 그리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박동을 하며 피를 한 움큼씩 뱉어낸다. 그 붉은 영상이 무흠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쳤다. 무흠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재빨리 자신의 가슴을 훑어 내렸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가슴이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지도 옷이 젖어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무흠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이 아가리를 벌리고 뭉글 뭉글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환상을 보았다. 그 기묘한 백일몽은 소름끼칠 정도로 현실감 있게 다가와 무흠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안형진.” 무흠은 이를 갈며 이번 일의 원흉일터인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조금 전 덩치만 크고 엄살이 심한 똘마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 남자는 자헌을 납치한 주제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버젓이 자신들의 아지트 지하에 처박아 둔 것을 보면 무흠을 우습게 봤거나, 할 수 있으면 와서 데려가 보라는… 도발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입막음도 하지 않고 아래 녀석들을 내돌렸을 리가 없다. 안형진은 분명 무흠이 이런 식으로 예자헌을 찾아 헤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일을 벌일 남자가 아니다. 남자의 분노를 알면서도 자헌을 달고 다니며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은 명백하게 무흠의 실수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흠에게 그때 그 사건은 어찌 되든 좋은 일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예전,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싸움 도중 피를 분수처럼 흘리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을 때도 무흠은 무감각하기만 했다. 애초에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무흠 자신의 목숨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 전혀 아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예자헌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고 남자가 목숨을 빼앗으려는 대상이 자헌이 되기 전까진. 그들의 아지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좀처럼 닿지 않는다. 초조감에 무흠은 더욱 속력을 높여 어두운 도로를 내달렸다. 그곳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거리 역시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한산했고, 익히 알고 있는 건물 2층에 있는 저들의 단골 술집 역시 겉으로 봐선 장사를 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건물 입구는 어둡고 거대한 입을 벌린 채 무흠을 맞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무흠이 주변을 경계하며 사방에 눈을 주었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곳은 마치 태풍전의 고요를 연상시키듯 불길한 기운만 뿜어내고 있었다. 싸움은 자신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흠은 주변을 경계하는 대신 어두운 계단을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지하실 문틈으로 불빛이 흘러나오며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말을 하고 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명이다. 귀를 기울이자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무흠은 축축하게 젖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손잡이를 돌리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린다. 지하실 안에는 묘하게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지만 찾고 있던 자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무흠은 눈살을 찌푸리며 모여 있는 무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상을 느낀 패거리들 역시 하나 둘씩 문 앞에 서 있는 무흠을 돌아본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무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품속에 넣어 두었던 연주흠에게서 받은 핸드폰이 진동을 하며 가슴을 두드린다. 묘한 침묵 속에서 무흠이 품안의 핸드폰을 꺼내들자 연주흠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 녀석들 모이는 곳이 두 군데 있더군. 알아본 바로 네 친구가 잡혀 있는 장소는…』 소식을 듣는 와중에도 무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를 악물고 씹어 삼켰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지하실에 있던 무리들 중 몇몇이 무흠을 알아보았다. “저거 연무흠 아냐?!” “저 자식이 여긴 웬일이지?” 특히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한 상대 패거리들을 보고 있자 파괴 욕구가 더해졌다. 하지만 무흠은 여기서 느긋하게 싸움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몇 주 전에 업주가 식위법 위반으로 들어가 내부공사로 쉬고 있는 호프집. 너도 알지? …연무흠 듣고 있는 거냐?』 잘못 짚었다. 몸에서 확- 하고 열이 치솟았다가 차갑게 식어 내린다. “끊어.” 무흠은 간단하게 전화를 끊고 한마디 하고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녀석들에게 등을 돌렸다. “어? 저 자식, 뭐야? 저거 지금 우릴 무시한 거냐?!” 잔뜩 흥분한 녀석들이 우르르 뒤쫓아 나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두 세 개씩 뛰어 올랐다. 저들이 지금 여기서 무흠을 맞은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 분명했다. 오늘 하루 종일 무흠은 어쩌면 안형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달았다 해도 무흠은 여기서 느긋하게 화나 내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헌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저 녀석들과 맞부딪혀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대장?!” 무흠이 정신없이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자신의 패거리 중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흠의 오토바이 곁에 서 있었다. 클럽『핑크』에서부터 뒤쫓아 온 모양이다. “딴 놈들은?” 무흠은 번개처럼 자신의 바이크에 시동을 걸며 녀석에게 물었다. 지하실에 있던 놈들 역시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멈춰 섰다. “곧 뒤따라 올 겁니다. 그런데 싸움입니까?” 녀석은 무흠과 뒤쫓아 나온 안형진의 패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반색을 하고 묻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한 바이크 소리가 가까워진다. 무흠을 쫓아 나왔던 녀석들도 흥분한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흠에겐 저 녀석들과 자신의 패거리 사이에 일어날 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뒤를 부탁한다. 한 놈도 쫓아오지 못하게 막아.” 무흠의 말에 흥분한 녀석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이 한중을 비롯한 무흠의 패들이 도착했고, 있는 대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안형진 쪽 놈들 역시 슬슬 거리를 좁힌다. 그 사이 무흠은 자신의 패거리에게 뒤를 맡기고 튀어나가듯이 바이크를 몰고 골목을 누볐다. 연주흠이 말한 곳은 무흠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중학교 때 안형진을 도발하기 위해 무흠 역시 자주 들락거리곤 했던 곳이니까. 골목만 몇 개 지나면 될 정도로 방금 그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무흠은 사람들 사이를 묘기처럼 빠져나가며 이를 악물었다. 곧 눈에 익은 낡은 건물이 보이자 무흠은 주차하는 시간도 아까워 거의 내팽개치듯 오토바이를 내던지고 뛰어내렸다. 그러자 부르릉- 하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바닥에 쓰러진 바퀴의 회전속도가 느려진다. 그러든지 말든지 무흠은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그렇게 눈에 띄는 대로 계단 구석에 굴러다니는 합판 사이에서 젖어서 쉰내를 풍기는 각목을 하나 집어 들고 재빨리 지하실로 달려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녹슨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무흠은 가타부타 생각할 것도 없이 있는 힘껏 그것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리 튼튼하지 않은 문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잠금쇠가 뜯겨져 나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갈색으로 선팅된 문이 막아섰지만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자하실 안의 풍경은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탁탁』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들고 있던 것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배트를 세우고 소파 팔걸이에 앉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무흠은 일순 그가 안형진이고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영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순간 쿵- 하니 가슴이 내려앉았다. “…열어.” 무흠은 들고 있던 각목으로 자신과 그들 사이를 막고 있는 유리를 깨기 시작했다. 앞뒤로 붙여 놓은 필름 때문에 문은 잘 깨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흠은 미친 듯이 각목을 휘둘렀다. 깨진 유리조각이 튀어 얼굴과 목에 상처를 냈지만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나머지 유리를 발로 털어내고 지하실 안으로 뛰어 들었을 때는 이미 무흠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픔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흠의 시선은 온통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자헌에게로 향해 있었다. 찢겨나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저 상처들이 진짜일 리 없다. 더러운 바닥을 적시고 있는 저것이 피일 리도 없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는 모습으로 죽은 듯 누워있는 저것이 자헌일 리가 없다. 그럴 리 없다. “너무 늦었어.” 안형진은 피 묻은 배트를 어깨에 걸치고 비릿하게 웃으며, 숨 쉬는 것도 잊고 망연히 자헌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무흠을 맞는다. “네겐 안 어울리게 멋진 취향이더군.” 피로 얼룩진 배트를 장난스럽게 휘두르던 안형진은 무흠을 힐끔 곁눈질 하더니 일부러인 게 분명한 태도로 발끝으로 자헌을 툭 찬다. 그 모습을 본 무흠은 눈을 부릅뜨고 안형진을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건드리지 마.” 그러자 안형진은 달뜬 듯한 묘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연무흠. 먼저 손을 댄 건 너였잖아?” 남자는 확실히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요 몇 년 동안 쭉- 연무흠과 대치하면서 보여준 그 집착과 광기는 확실히 보통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임으로 인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연무흠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때로 되돌아간다 해도 무흠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할 것이다. 그때 자신들은 미쳐있었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기분이 어때?”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며, 안형진은 금속 배트를 빙 돌리더니 어깨에 얹고 무흠에게로 다가온다. 가까이 온 순간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오자, 무흠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각목을 비틀어 쥐며 몸을 긴장시켰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저 남자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다. 그런 무흠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형진은 은밀하게 속삭여온다. “…살아 있을 것 같나?” 순간 무흠의 시선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자헌에게로 가 박혔다. 안형진은 그런 무흠의 반응을 즐기듯 나직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그리고 자신의 목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너에겐 갚아야 할 빚이 아주 많을 텐데.” 라고 농을 던졌다. “…죽여버리겠어.”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전혀 움직임이 없는 자헌을 내려다보며 무흠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안형진은 한쪽 눈썹을 슥- 끌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는다. “글쎄…. 네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순간 무흠은 자신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퍼억-』하고 고개가 꺾일 정도로 세게 얹어 맞은 무흠은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안형진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뒤통수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질척한 것이 묻어나온다. 뒤를 돌아보자 기의종이 특유의 얍실한 얼굴로 안형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배트를 든 채 웃고 있었다. “조심성이 없… 윽!!” 무흠은 눈 깜짝할 새에 기의종의 그 웃는 얼굴 아래의 목을 노리고 각목을 휘둘렀다. 미처 다 피하지 못한 기의종은 목을 움켜쥔 채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섰지만, 무흠은 귀신처럼 따라붙어 등을 찍어 누르며 후려쳤다. 순간 그렇지 않아도 혹사당하던 각목이 불규칙한 단면을 남기고 떨어져 나간다. 무흠은 가차 없이 쥐고 있던 뾰족한 나무 조각을 기의종에게 찔러 넣었다. 기의종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귀에 닿기도 전에 무흠은 엄청난 힘에 의해 벽으로 내던져 졌다. 시멘트벽에 등뼈를 부딪치고 바닥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리고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려는 순간 왼쪽 팔꿈치가 뒤틀려 기묘한 형태로 어긋났다. 무의식중에 안형진이 휘두른 배트를 왼쪽 팔로 막은 것이다. “….” “과연 괴물 같은 놈이군.” 안형진은 아플 텐데 찍소리도 내지 않는 연무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여기서 날 쓰러뜨리면 둘 다 보내주지.” 뜬금없는 말에 무흠은 미심쩍은 얼굴로 안형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아. 진담이니까. 저 친구도 아직 살아 있고. 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곧 죽을 걸.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거든. 데리고 나가도 좋아. …아, 그 전에 나를 쓰러뜨려야겠지만.” 씨익- 하고 사악하게 웃으며 안형진은 무흠이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왼쪽 팔꿈치를 발로 짓눌렀다. “…으… 크흑!” “웃기는군. 천하의 연무흠도 아픔을 느끼나?” 이를 악물고 버티는 무흠을 안형진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모두들 연무흠은 심장이 없다고 하더군. 뒤를 봐주는 대단한 형님에 눈 씻고 찾아도 꼬투리 잡을 약점 따위도 없고. 그동안 세상 살기 참 편하셨겠어. 안 그래? 감정도 없고, 누가 옆에서 죽어 나가도 눈도 깜짝 안 했지.” 안형진은 고통에 신음하는 무흠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듯 말을 했다. “아-주 오래 기다렸다. 가끔은 말이야. 다 귀찮아져서 그냥 잡아다가 생매장을 시켜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 아무리 기다려도 네 놈은 인간이 될 것 같지 않았거든.” 이렇게 말하며 안형진은 쓰러져 있는 자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자헌이라고 했던가? 나는 저 친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당연히 원한도 없지. 그런데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연무흠? …그가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날 원망할까? 아니면… 너를 싫어하게 될까? 어떻게 생각해?” 안형진이 배트 끝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속삭이자,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있던 무흠이 멀쩡한 손으로 배트를 움켜잡은 채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맞잡은 배트를 쳐낸 뒤 몸을 굴려 안형진에게 벗어나며 이죽거렸다. “그렇게 죽은 놈 뒤를 따라가고 싶다면 내가 죽여주지.” 안형진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무흠이 다친 팔을 늘어뜨린 채 뒷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드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핫핫-!! 그 칼이군, 그래. 아직도 가지고 다니다니…. 난 그걸 꿈에서까지 봤지.” 안형진은 목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아주 유쾌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핏발 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금속 배트가 무흠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왔다. 계속 출혈하고 있는 뒷머리와 다친 팔 때문에 생각처럼 빨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안형진이 휘두른 배트가 무흠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윽, 제길.” 무흠은 멀쩡한 쪽 손등으로 스친 이마를 문지르며 파고들 틈을 노렸다.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도 되지만 칼을 쓰려면 최대한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집중하려 해도 아까부터 시야가 일그러져 보여 도저히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거기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무흠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계속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뒷머리를 적시고 있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머릴 흔들면 좋지 않을 텐데.” “…닥쳐!”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안형진이 주위를 돌며 비웃자 무흠이 소리쳤다. 그때 다시 한번 안형진이 배트를 휘둘렀다. 무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굽혀 안형진의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을 노리고 있었지만 안형진은 무흠이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몸을 틀었다. 무흠의 칼은 심장대신 옆구리를 길게 갈랐다. “그만 멈춰!!” 누군가 소리쳤다. 그 찰나에 무흠은 또 다시 안형진이 휘두른 배트에 등을 맞고 쓰러졌다. 조금 전 무흠이 깨부수고 들어온 지하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무흠은 얼핏 패거리들이 쫓아온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쥐고 있던 칼도 어딘가에서 놓쳐버리고 지금 연무흠은 무방비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눈을 들자 안형진이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한손으로 누르고 다른 손에는 배트를 든 채 무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무흠을 내리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 주변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무흠은 이상하게 적막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자헌을 바라 본 뒤 다시 안형진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하아….” 무흠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지금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이 안형진이나 자신의 패거리가 아니라 경찰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다. 제4장. 에필로그 “어? 형, 벌써 들어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던 재영은 자운과 마주치자 시간을 확인하며 놀란 얼굴을 한다. 자운은 그냥 피식 웃으며 재영의 까까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일이 있어서 잠깐 들어온 거야. 다시 나가봐야 돼. 자헌이 보고 가는 길이냐?” “어제 못 와서 오늘 들렀지.” 재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놈의 선생이… 하고 투덜댄 뒤 어깨를 으쓱한다. 그 일이 있고 재영 역시 편안한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자헌이 자퇴를 하고 난 뒤부터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더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고맙다. …여전하지?” 자운은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재영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보통은 지칠 만도 한데 재영이 만은 계속해서 자헌을 보러 와주고 있었다. “걱정 마요. 의사가 멀쩡하다고 했다며? 실어증도 아니라며. 병원가면 한두 마디 말도 하고. 자헌이 녀석이야 원래 집에서 말 잘 안 했잖아요. 형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저 자식 나한테도 입 딱 다물고 무시한다니까.” 그 일이 있고 자헌은 한달 정도 입원해 있었다. 처음에야 워낙에 많이 다쳐 살아 있는 게 기적인 상태였으니 몰랐지만, 상처가 나아감에도 말없이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모습에 가족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란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딱히 이렇다할 차도가 없다. 집에 있으면 좀 나아질까 해서 퇴원을 좀 빨리 했지만 외래로 병원에 갈 때 외에는 좀처럼 자신의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의사가 아무 이상 없다고 했으니 곧 괜찮아지겠지.” 자운은 쓰게 웃으며 위로하듯 재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외려 재영이 자운을 향해 씩씩하게 말한다. “그럼요! 딴 놈도 아니고 자헌이가 이대로 무너질 리 없잖아요. 저 자식이 얼마나 독한 놈인데. 곧 멀쩡해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형!” “하여튼 말은 잘 하지. 너나 누나 속 썩이지 말고 집에 잘 들어가 인마! 니 누나 너 때문에 다시 집에 들어왔다고 이 갈던데.” 어린애에게 위로받았다는 생각에 자운은 부러 재희 얘기를 꺼내 재영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영이 갖은 인상을 쓰며 “이엑! 그 여자가!!” 하고 호들갑을 떨자 탁- 하니 동글동글한 재영의 뒤통수를 올려치며 협박한다. “재희한테 이른다?” “에이, 형? 그런 심한 소릴 하시다니, 서러워서 저 갈랍니다.” 한껏 농을 치며 재영은 미련 없이 남은 계단을 내려간다. 그런 재영을 보던 자운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나직이 중얼거린다. “…또 와라.” “오지 말라도 올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죠!” 목소릴 들었는지 재영은 큰 소리를 치며 신나게 손을 휙휙 흔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 거침이 없는 동작을 보며 자운은 쓴 웃음을 짓고 계단을 올라간다. 밖으로 나온 재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헌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커튼이 쳐 있는 창은 아까 그대로 변함이 없다. 몸은 거의 나았다고 했다. 실제로 날이 갈수록 겉으로 보이던 상처가 나아갔고 얼마 전엔 팔과 다리에 하고 있던 석고 붕대도 제거했다. 부러졌던 발목도 다 나아 걷는 것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듣긴 했지만 재영은 자헌이 걷는 걸 본 적이 없다. 병원에 가거나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는 제 발로 걸어갈 텐데도 그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니 재영은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한 곳도 예전의 자헌다운 모습이 없다. 꺼칠하게 마른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루 종일 멍- 하니 앉아 있으니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시간 외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 좋아하던 영화는 물론 책도 펴보지 않는 것 같다. 좀 전에 자운이 형 앞에서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얘길 했지만 재영도 실은 지금 자헌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과연 정상일까? 수술 후 자헌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된 것은 자헌을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기고도 며칠이 지난 뒤였다. 면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재영은 자헌의 병실을 찾았다. 문을 노크하고 재영이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자헌이 눈을 떴다. 그때만 해도 아직 얼굴의 붓기가 빠지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웠다. 하루의 대부분을 진통제를 맞으며 잠으로 보내던 때니 더 설명할 것도 없다. “괘… 괜찮냐.” 눈이 마주치자 겨우 튀어나온 소리가 한심했다. 그만큼 재영이도 꽤 당황했던 것이다. 직접 보니 전해들은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자헌은 대답도 없이 그냥 멍-하니 눈을 뜨고 재영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게 정상적인 반응인지 어쩐지 재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헌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 낯설었다. 재영은 어색하게 침대 옆에 놓인 둥근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자 얼굴의 상처들이 더 아파보였고 어깨와 발을 고정시켜 놓은 석고 붕대는 불편해 보였다. “….”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재영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친우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뜻 위로의 말을 꺼내놓기가 어려웠고, 한 마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헌은 그런 재영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딘지 어색함을 느끼며 재영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자헌이 그동안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무흠이는?” 갑자기 입을 연 자헌에 놀란 재영이 ‘뭐라고?’ 하고 반문했지만 자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놀랍고 반가웠다. 실어증 같은 잘 이해되지 않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뛸 듯이 기뻐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을 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죽었다 살아난 놈이 기껏 문병 온 친구에게 할 말이 그거 밖에 없냐고 화도 내봤지만, 녀석은 끝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말을 걸어줬다는 생각에 재영은 그 뒤로 병문안을 갈 때마다 혼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자헌이 궁금해 하던 그 빌어먹을 무흠이 새끼는 소년 법원에 송치되었고, 자헌을 납치했던 남자가 심신상실로 판명됐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자헌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다. 원래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무심한 얼굴을 한 적은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무흠이 폭력행위로 소년법원에서 6호 처분을 받고 소년원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도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의 하얀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자헌을 보고 있으면 머리를 잘못 맞아 바보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두 번째로 자헌이 말을 한 것은 퇴원을 하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학교를 가지 못한지 1개월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을 가지고 수시를 넣으려던 자헌으로서는 계획에 차질이 났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를 놓친-당시엔 시험을 따로 볼만한 상태가 아니었다-자헌으로서는 되돌릴 수 없을 지경이 된 학교생활에 제멋대로 미련을 접어버렸다. 모두들 굳이 학교를 그만 둘 필요가 있느냐고 말렸지만 자헌은 듣지 않았다. 재영은 물론, 가족들이나 담임에 반 친구들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갔지만 녀석은 자퇴 한다는 한마디만 하고는 또 전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건 기가 막히다 못해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물론 녀석이 엉망이 된 내신이나 입원으로 인해 너덜해진 생활기록부 따위를 신경 쓰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헌의 뜻대로 됐다. 학교를 자퇴해 버린 녀석은 아예 작정을 한 듯 벽만 보고 앉아서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예전 자헌의 성격을 생각하면 납치당해 끔찍한 시간을 보냈어도 저렇게 자신 속으로 파고들기보다는 그것을 이겨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법은 한데…. 재영은 자신의 친우가 언제까지나 저렇게 벽이나 보며 참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때가 되면 안 좋았던 일들을 떨치고 일어나 전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잠에서 깬 자헌은 몸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창밖으로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인가.” 자헌은 혼잣말을 하며 가뿐하게 일어나 앉았다. 어제는 악몽을 꾸지도 않고 잠을 설치지도 않아서인지 기분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고 세상이 분명해 보였다. 다리를 약간 절며 욕실로 향하던 자헌은 피식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생긴 것과 달리 의외로 걱정이 많은 재영의 노파심처럼 자헌이 정말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동이 좀 불편하기는 해도 전보다 움직임은 훨씬 편해졌다. 몸은 차츰 나아갔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엉망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신적인 타격을 받긴 했던 것 같다. 처음 입원을 했을 때야 약에 취해 거의 하루 종일 잤지만 몸이 나아감에 따라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때가 바로 악몽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흠칫거리며 놀랐다. 대낮에 멀쩡히 눈을 뜬 채 꿈을 꾸었다. 이미 한번 겪었던 끔찍한 폭력이 꿈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헌을 두렵게 만든 것은 어둠이었다. 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고 자헌은 그 시간을 불면증에 시달리며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정신을 추스르는 게 가장 힘이 들었다. 놀라서 잠이 깨지 않고 잘 수 있게 될 때까지 몇 달이나 걸렸다. 하지만 자헌은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자헌이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남들이 자헌을 걱정하는 동안 그는 미래를 고심하고 있었다. 생각해야 할 것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자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연무흠과의 관계였다. 그것을 고심하게 된 계기는 그 사람 때문이다. 문병을 왔던 사람들이 모두 가족과 친구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가끔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방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무흠의 형이었다. 같이 대동하고 왔던 부하인 듯한 남자가 병문안용 과일 바구니를 건네고 안부를 묻는 동안 무흠의 형은 아무 말도 없이 자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헌 또한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사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이기도 했지만 침묵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오 분쯤 있었을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무흠의 형이 문득 입을 열었다. “광명시에 있는 **정보산업학교다. 10월 6일 오전 10시에 나오니까 생각 있으면 가봐.” 다른 말은 없었다. 곧 두 사람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자헌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 뒤의 몇 개월은 자헌에게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야 자헌은 마음을 정했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자운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퇴원을 한 이래 자헌이 식사 시간에 아래로 내려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너….” 자운은 말문이 막힌 듯 자헌을 보았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네, 형.” 자헌은 싱긋- 웃으며 자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은 오랜만인 것 같다고 한 주제에 자헌의 태도는 아주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자운만큼이나 놀라고 있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저도 밥 좀 주세요.’ 라고 태연하게 말했던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자신의 동생을 쳐다보던 자운은 그동안 속 태웠던 것을 생각하니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이 자식,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마음 같아서야 뭔가 더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덜컥 뭐라도 잘못될까봐 그러지도 못하는 소심한 형이었다. 하지만 자헌은 그런 자운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기만 하다.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있어서.” “넌 생각을 꼭 그렇게 해야겠냐? 어머니랑 형들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참으려고 했지만 역시 큰 소리를 내고 만다. 아프고 나더니 넉살이 좋아진 건지 뻔뻔스러워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자운은 그래도 자헌이 말을 하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내심 안도했다. “…하하. 그래도 제 걱정을 하셨다니 기분은 좋은데요.” “말이나 못하면!!” 속이 시커멓게 타도록 걱정한 식구들 속도 모르고 잘도 말한다. 자운은 넉살좋게 웃고 있는 자헌에게 손을 뻗어 젖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도 한참 동안 말라서 볼이 훌쭉해진 자헌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눈에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난다. “…이제 괜찮은 거냐.” 자운은 목이 잠겨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럼요.” “어머니 요즘 심장 안 좋으시다.” “…네.” “그리고 형님들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하신다. 언제 시간 내서 한번 찾아봬라. 안 그러면 삐지실 거다.” “명심하죠.” 자운의 너스레에 자헌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같이 산다는 이유로 그동안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시달렸는지 저 말을 하는 자운은 꽤나 홀가분한 표정이다. “오늘은 뭘 할 거냐.” “가볼 데가 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묻는 말에 자헌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운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혼자가도 괜찮겠냐?” “걱정 마세요. 오래 나가 있진 않을 겁니다.” 자헌은 근심 많은 형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자운은 자신의 노파심에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결국 한마디 더 하고 만다. “나가기 전에 머리 말려라.” “….” 자운의 말에 자헌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시원한 바람에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눈부신 태양,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대지는 맑았다.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헌은 낯설면서도 왠지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자헌은 정문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서서 무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엔 자헌 외에도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한쪽엔 짙게 선팅한 고급 승용차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람이 불어 셔츠 자락과 약간 긴 듯한 머리카락을 날린다. 단추를 거의 풀어버린 오렌지색 셔츠 안의 하얀 티가 눈부시다. 그레이로 색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끼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자헌의 모습은 산뜻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이는 셔츠 사이로 한동안 볕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가 엿보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지정된 시간이 되자 퇴소식을 마친 학생들이 몰려나온다. 간간이 마중 온 사람들과의 해후로 작은 소동이 이는 것을 보던 자헌의 시야 안으로 다른 사람 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큰 남자가 뛰어들었다. “…아, 이런 정말 많이 변했잖아.”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에 입술을 끌어올리며 자헌은 혼잣말을 했다. 얼마나 변했을까 상상은 많이 했지만 저 정도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변화’의 예를 보여주듯이 연무흠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조금만 더 변했으면 못 알아볼 뻔 했다.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무흠은 생각지도 못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거침없이 자헌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그때 타이밍을 잰 것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듯이 스르륵 검은 승용차가 무흠의 앞으로 와서 섰다. 자헌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던 무흠이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숙인다. “….” 자헌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는 무흠을 태우지 않은 채 미끄러지듯 사라진다. 두 사람은 사라지는 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 자헌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변한 모습이 눈에 띈다. 둘 다 말랐지만 그 외엔 전부 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서 와.” 자헌이 먼저 말을 하자 무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낮게 속삭인다. “그래.” 두 사람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다. 모습은 변했지만 그들은 예자헌과 연무흠이었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키스해주지 않을 건가?” 무흠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뻔뻔스레 요구했다. 그러자 자헌은 성큼 다가서서 한쪽 팔로 무흠의 목을 끌어당겼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졸지에 남자끼리의 키스씬을 보게 된 주변 사람들의 놀람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사람은 혀를 섞었다. 자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마주 댄 채로 낮게 속삭였다. “어디로 갈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무흠이 자헌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The End